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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4부 - 2. 김준, 고종, 그리고 마지막 항쟁
게시물ID : history_221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6
조회수 : 146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7/19 09: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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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준은 상모(相貌)가 헌칠하고 활쏘기에 능하며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여 인심을 얻었다. 날마다 호협한 자제들과 떼를 지어 술마시는 것을 일삼아 집에는 아무 저축도 없었다."

두 글자로 줄이면 전형적인 호걸이라 하겠죠. 생각보다 까는 서술은 없습니다. 당시 집권한 무신들이나 그들의 측근에 대한 서술을 보면 다 천하의 개쌍놈 취급이거든요.

그는 노비 출신으로 일찍부터 최우의 마음에 들었고, 최우가 총애하는 첩과 간통하다 -_-; 귀양 갑니다. 그래도 신임을 받았는지 몇 년 후에 돌아오죠. 드라마 무신에서 이 소재를 써 먹을 모양입니다. 하긴 노비 출신에 이런 불륜에 딱 좋은 소재긴 하네요. 후에 최우가 죽자 그의 측근이나 야별초 무리에서도 왕 쪽으로 돌아서려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 때 앞에 나선 게 김인준이었습니다. 그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최항을 밀었고, 덕분에 최항 시대에도 측근이 됩니다. 최항이 사람을 많이 죽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권력이 불안한 게 이유긴 했던 거죠.

문제는 최의의 권력은 더 적은 상황에서, 이 정도로 무게감이 있던 김인준을 무시했다는 겁니다. -_-; 뭐 그 이유가 이해가 갑니다만, (송길유를 탄핵하는 걸 숨기려 했죠) 이 시대가 어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인가요. 

그는 이렇게 새로운 무신정권의 수장이 됩니다.

1. 왕정복고?
거사에 성공한 유경과 김인준은 곧바로 고종을 찾아갑니다. 그는 감동하며 이렇게 말 합니다.

"경 등이 과인을 위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도다"

이 때가 고종 45년, 최씨 정권을 모두 거쳤으며 대몽항쟁 기간을 모조리 거친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조선의 고종과 비교하면 공통점이 정말 많죠. 애초에 이 고종高宗이 이런 쪽 왕들에게 붙이는 칭호라 합니다. 

아마 고종은 이 때 왕정복고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김인준 등은 최씨와는 다른 충신이라 생각했을지도요. 하지만 그게 곧 틀렸다는 걸 알게 됩니다. 물론 최씨 정권만큼의 권력을 누리진 못 했지만, 기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죠. 그리고 고종은 무언가를 할 힘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무신정권에서 폐위된 왕이 4명입니다. 왕의 힘은 아예 없어져 버렸고, 그가 유능한 왕이었다면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겠죠. 그래서인지 아예 초탈한 모습도 보여주고 뭐 같은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그런 아버지를 쭉 지켜봤던, 이제 40이 된 태자의 가슴 속이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아무튼 고종은 강안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으니, 마치 새로 즉위한 것 같았고, 이런 저런 활동을 할 때 도방, 야별초, 신의군, 서방(문관들)이 호위하니 보는 이들이 감동하여 울었다고 합니다. 뭔가 새로운 세상이 온 것 같았죠.

그 감동만큼 논공행상도 아끼지 않아 이 일을 주도한 이들을 모두 공신에 봉합니다. 이 때 튄 사람이 최의를 죽인 임연이었죠. 그에 대한 얘기는 그의 시대에 가서 하기로 하구요. 이외에 최의의 창고에서 곡식을 모두 빼 여기저기 나눠주면서 민심을 달래는 것도 잊지 않았죠.

하지만 뭔가 달라지기에는 최씨의 그림자가 너무 컸습니다. 어쨌든 최충헌이 쌓아 올린 정권이었고, 최의가 일찍 죽긴 했어도 4대 63년을 이끌었던 정권이었죠. 가령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김인준과 유경은 최의의 심복이었던 이주, 최문본, 유태, 박선, 유보 등을 죽이기를 청하니 고종은 "이들이 미치고 미혹하여 오직 눈앞의 이익만 도모하니,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 용서하는 것이 가하나 경들이 청하니 귀양을 보내라"고 답 합니다. 아직 최씨 정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 했거나, 반대로 김인준, 유경의 권력이 너무 커질까 견제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죽이긴 해야 된다고 계속 압박하자 이제껏 보지 못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드시 죽이려고 하면 어째서 다시 나한테 알리는가. 경들 마음대로 하라"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죠. 벙찐 둘은 백배사죄하고 귀양보내는 걸로 끝냅니다. 왕도 슬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김준 정권으로 지칭되긴 하지만 그가 절대 권력을 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부승선에 오른 유경이 정방을 더 장악했거든요. 김준의 세상이 오기엔 시간이 더 필요했고, 그의 세상이 된 이후에도 최씨만큼의 권력을 가지지 못 합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겠지만, 혹은 시간이 더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죠.

당장 그들은 다가오는 몽고의 마지막 침공에 맞서야 했습니다.

2. 지나간 버스
이 8차 침공(1254년부터 1257년까지를 다 6차로 묶고 이를 7차로 하기도 합니다), 몽고의 마지막 침공의 대응은 최씨 정권과는 조금 달라지긴 했습니다. 4월에 한창 축제 분위기에 몽고 척후병 1천기가 수안(황해도 수안)에 이르자 야별초를 보내서 막았죠. 나름 제대로 맞서보려 한 것 같습니다만,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동사강목에는 5월로 돼 있습니다)

5월에 차라대의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승천부로 갑니다. 이에 대한 별 다른 기록은 없고, 전후사정으로 보아 그냥 "우리 또 왔쪄염 뿌우 ^_^"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방식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이미 고려는 끝났다, 적당히 위협만 하면 될 것이다 정도였죠. 대신 섬에 대한 공격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많은 고려인들이 결국 버티지 못 합니다. 어차피 명분은 있었습니다. 아직도 태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었죠.

5월에는 이전에 김방경이 개발했던 위도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당시 박주(평북 박천) 사람들이 살았는데, 도령낭장 최예와 야별초를 보내 다스리게 하려 했지만 반란을 일으켜 모두 죽여 버립니다. 투입된 야별초들은 모두 도망갔다가 죽었고, 교위 신보주만 살아서 돌아왔죠.

+) 다만 야별초라고 명시돼 있지는 않습니다. 이 별초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은 삼별초 얘기 때 한꺼번에 하겠습니다.

깜짝 놀란 병마사 홍희는 병력을 보내 여자와 노약자들을 붙잡아 왔고, 장군 박견과 낭장 김군석을 위도로 보내 남은 사람들을 달래야 했습니다. 몽고는 더 이상 직접적인 침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국경(에 그러니까 자기들 있는 곳 기준으로)과 섬 지역만 집요하게 노리며 민심의 이반을 시도했죠. 조정에서는 홍희가 여자랑 재물만 밝혀서 민심을 악화시켰다고 자르고 명망이 높았던 김지대를 보냅니다. 이 때문에 서북 사람들이 평화로워졌다과 하는데, 글쎄요 -_-;

6월에는 여수달, 보파대가 1천씩을 거느리고 가주(박천)와 곽주(곽산)에 주둔했고, 조정에서는 이에 맞서 북계에 있는 장수들에게 은과 비단을 줍니다. 몽고군은 슬슬 남진을 시작해 서경까지 도달했고, 다시 계엄령이 내려졌죠.

차라대는 "황제의 칙령에, '고려국이 만일 실제로 강화에서 나와 항복하면 비록 개나 닭이라도 하나도 죽이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섬을 쳐서 부수라.' 하셨으니, 지금 국왕과 태자가 서경(西京)에 나와서 항복하면 곧 회군하겠다"라는 말을 전했고, 고종은 자기가 늙었다면서 거부하고 영안공 왕희를 보냅니다.

그 동안에도 내부에서는 이런 저런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최의를 죽일 때 얼굴 마담으로 내세운 최온을 탄핵한 것이죠. 하필 나중에 최온의 아들 최문본이 김인준 등의 음모를 최의에게 알린 게 밝혀졌고, 그를 귀양 보내니 최온이 김인준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싫다 싫다 하다가 귀양 보냈다가 몇 해 후에 풀어줬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몽고군은 천천히 황해도 일대를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다시 여수달을 사자로 보내 태자를 보내라고 독촉하죠. 이 때 고려에서는 대군이 와서 두려워서 못 나온다느니 병에 걸렸다느니 하면서 피했고, 결국 그는 열 받아서 약탈하고 돌아갑니다. 이 때 말 두 개를 옮겨 보죠.

"내가 가서 태자를 보아야 하느냐, 태자가 와서 나를 보아야 하느냐"

"비록 국왕이 나와서 맞지 않았지만 태자가 와서 본다는 약속이 있어서 내가 회군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자가 왕복하기를 너덧 번이나 하였는데도 태자가 이르지 않으니, 이것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제 한 번 결단하는 것을 보고자 하여 또 사자를 보내는 것이니, 국왕은 살리든지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라"

8월이 되자 차라대는 개경까지 내려와 곳곳을 약탈했고, 계속 태자를 요구합니다. 고려에서는 태자의 병을 계속 핑계댔죠. 몽고군의 약탈도 계속돼서 가수굴과 양파혈이라는 동굴에 숨은 수안의 병력과 백성들이 죽습니다. 양파혈에는 구멍이 세 개 있고 창과 도끼로 막아서 들어가지 못 했는데, 풀에 불을 질러 구멍 안으로 던져 질식해 죽거나 밖으로 나와서 죽었다고 하네요. 

민심의 이반은 계속돼서, 9월에는 광복산성(미상)이 항복했고, 12월이 되자 동계에서도 배반이 일어납니다. 당시 동북면 병마사 신집평은 저도(함남 영흥 쪽 섬)에 있었는데, 근처 15개 고을에서 피난한 사람들이 모두 들어갔다고 합니다. 헌데 그가 저도가 섬이 크다는 이유로 죽도(미상)으로 옮겼는데, 섬도 좁고 식수도 적어서 원망을 들었죠. 신집평이 이를 강제하고, 마침 몽고군이 동계에 들어온데다 식량도 떨어집니다. 신집평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육지로 나눠 보내니, 조휘와 탁청은 이를 노려 몽고군을 끌어들입니다. 

이 때 그들이 항복한 장수가 동진 출신으로 보이는 산길대왕, 조선의 목조 이안사가 항복한 이 역시 그였습니다. 그는 여진족 수군을 이끌고 강원도 고성의 송도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보면 섬에 있어 봐야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나왔을 반란이었겠죠. 이 때 화주, 현 함남 영흥에 설치된 것이 쌍성총관부입니다. 조휘는 여기의 총관이 되고, 탁청은 천호, 다루가치가 되었죠. 이후 백 년 동안 고려는 이 지역을 잃게 됩니다. 한편 달보성(미상)도 항복합니다. 방호별감은 몽고에 주는 선물이었죠.

그렇다고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휘가 항복할 무렵, 충주 박달재를 넘던 몽고군이 충주의 병력에게 기습 당해서 돌아갑니다. -_-;; 이쯤 되면 차라대에게는 악몽이죠. 충주는 이제까지의 전쟁 기간 동안 항쟁 3번, 우회하는 것을 기습 2번, 그 외 우회 허용 1번이라는 어마어마한 전공을 올립니다. 임진왜란의 주인공을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본다면, 대몽항쟁의 주인공은 충청도와 경기도로 봐도 될 정도죠.

하지만 재미를 본 몽고군은 그냥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사료에 기록된 것 이상의 많은 항복 지역이 나왔던 것 같고, 다른 지역 역시 섬과 성에 틀어박혀 있을 수준이었습니다. 1258년 마지막 기사에는 "이해에 여러 도의 벼는 모두 몽고병에게 수확되었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렇게 밝은 1259년, 말려죽이고 항복 받는 재미를 아주 톡톡히 본 몽고군은 다시 들어옵니다. 결국, 아끼고 아꼈던 야별초가 투입됩니다.

1월에 몽고군이 기암성(평북 성천)을 공격하자 야별초가 성으로 들어가 함께 싸워서 이깁니다. 평북이라는 위치에서 볼 수 있듯 기암성은 그간의 침략에도 끝까지 살아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군량도 다 바닥나서 서로 잡아먹는 수준에 이르렀고 -_- 그것을 감안해서인지 승천부에 새로 쌓은 성으로 모두 이주시켜 양식과 농토를 줬다고 합니다. 숨겨진 항쟁의 일면이죠.

같은 달에는 금강성, 금강산 쪽을 동진군이 공격하니 역시 삼별초를 투입하는데, 이 때 보낸 병력이 3000이었다고 합니다. 그간 있었던 투입 중 가장 대규모였죠. 이들 역시 끝까지 싸우고 있었던 모양이고, 여기 투입된 방호별감 왕중선은 다음 달 사람들 500명을 모두 데리고 승천부로 갑니다. 고종은 그들에게 쌀 30곡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 때 승천부까지 가다가 죽은 사람이 200명이나 됐다고 합니다.

2월에는 동계의 등주와 화주(영흥 -_-a)에서 조휘가 몽고군을 인도해 한계성(인제)을 치자 방호별감 안홍민이 투입된 야별초를 거느리고 섬멸하기도 합니다. 끝이냐 끝이냐 했던 상황은 이제 정말 끝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동계의 반란세력은 확실히 몽고에 들어갔고, 북계에서도 섬들이 계속 투입된 야별초들을 죽이고 항복했으며, 몽고군과 동진군이 계속 오고 가니 조정에서는 섬으로 들어가라 다시 나와라를 반복합니다. 

김인준과 유경 등 집권한 세력은 투입된 야별초들을 보면 최씨와는 다르게 몽고에 확실히 싸우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보면 그냥 "최씨와는 다르다!"를 강조하고 싶었거나, 정말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여서 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죠. 

아무튼, 그들은 마침내 백기를 듭니다.

3. 태자는 북으로
그 동안 강화도의 사정도 막장이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최온 유배 후에는 소경 문황 등을 숙청합니다. 문황과 그의 아들 문수균 등이 김인준 등을 죽이고 최의의 원수를 갚자는 모의를 했는데, 이 때 중부녹사 유종식이라는 이가 이를 발설해 버립니다. 무슨 뒷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사실을 들은 김인준은 유종식을 고문해서 그 말을 듣지만 "원래 미친 놈인데 뭐 ㅡㅡa"라면서 풀어주죠. 어쨌든 발설된 거니 여기에 참가할까 말까 했던 교위 현군수는 모든 걸 털어놓게 되고, 여기에 가담한 자들을 죽이거나 섬으로 보냅니다. 희한하게 유종식은 이 때도 섬으로 귀양가는 것 정도에 그쳤네요.

한편 몽고에서는 살짝 통쾌하다 할 일도 있는데, 홍복원이 처형됩니다. 동경총관이라는 직책으로 꽤나 대우 받았지만, 몽고에 인질로 간 영녕공 왕준과 다툼이 있었던 것이죠. 문제는 왕준이 몽케의 신임 하에 있었고, 몽고의 황족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는 것, 몽케는 홍복원을 죽이고 아들에게도 벌을 줬습니다.

헌데 이 아들은 후에 풀려나와서 아버지처럼 권력을 휘두르니... 네, 홍다구예요. -_-; 이 사건 때문에 고려 본국을 혐오하게 됐다고 합니다. 전에는 안 그랬나. 홍복원은 말년이라도 안 좋았지 그는 말년도 참 편하게 갑니다. 

그 외에 최씨 정권에 올린 시호 등을 모두 삭제하고 역적으로 규정한 것도 있지만 이쯤 되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1258년 말에는 김인준의 동생 김승준과 측근 임연이 장군 우득규와 지유 김득룡, 별장 양화를 참소해 죽입니다. 그 동안 육지는 불타고 항복하고 있었죠. 

그리고 이 때 김인준은 일인자로 우뚝 섭니다. 그 때까지는 유경과 김인준의 공동 정권으로, 문관에다 벼슬도 높았던 유경이 정방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자기의 벼슬에 불만을 품은(유경이 그에게 면박해서 사이가 더 나빠졌는데, 이 때 김승준은 한순간에 4등이나 승진한 상태였습니다 -_-;) 그의 동생 김승준은 유경과 사이가 나빠졌고, 김인준을 꼬득이게 되죠. 김인준 역시 원래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직접 고종에게 보고하고 유경을 파직시킵니다. 이 후일담이 또 재밌습니다.

"그대가 처음 나와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의거해서 정권을 왕실로 돌려주었으니, 골육지친과 같아서 비록 참소를 잘하는 자라도 이간할 수 없는데, 어찌 오늘에 이와 같은 짓을 할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 말에 김인준은 부끄러워 사과하했지만, 권력을 돌려주지는 않았죠. 그래도 유경은 어느 정도 명망을 유지하다가 89년까지 살다 죽습니다. 이전을 생각하면 참 평화로운 광경이었죠.

이렇게 전권을 얻은 김인준, 하지만 그에게 능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최씨 정권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몽고군은 쳐들어왔고 그가 내분을 다스릴 정도의 능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절대권력이 무너지면 내분 일어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그나마 이런 숙청들이 끝난 1259년 1월이 돼서야 야별초들이 전국에 투입됩니다. 여기서 뭘 해 봐야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좀 한 것 같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씨 정권에 비해서죠.

민심의 이반은 더욱 심해져서 1월에는 사신으로 보낸 낭장 김기성과 별장 곽정유를 동계에서 반역한 조휘가 죽이고 선물을 노략질해 가기에 이릅니다. 육지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은 것이죠. 내부 사정도 안 좋아서 이 달 창고도 아예 비어 버립니다. 다만 최의의 창고를 또 터니까 쌀 1만 5천 석이 나와서 유용하게 썼죠. 무슨 화수분인지, 대체 얼마나 해 먹은 걸까요 -_-

+) 이 떄 또 흥미로운 게, 하필 이 때 김윤후가 동북면 병마사가 됩니다. 부임하지는 못 했지만, 김윤후는 막기 어려운 곳이나 문제되는 곳에만 투입됐나 봅니다. -_- 

사실상 결론은 내려졌습니다. 고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최자와 개코 아니 김보정이 항복하자는 것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그러려면 태자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제 고종이 이를 언제 허락하느냐만 달렸을 뿐이죠.

이 때 좋게 보기 힘든 게 고종의 행동입니다. 그가 봉은사에서 연등회를 열 때 갑자기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무릇 잔치에 참여한 자는 박수로써 나의 즐거움을 도우라."

술 취한 왕은 이 모습을 보며 기뻐했고, 신하들도 손뼉을 취며 뛰 놀다가 온 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였습니다. 해가 저물어서야 끝난 잔치, 이를 보면 -_-; 좋게 말 하기 힘들죠?

고려사에서는 이 때다 싶어 두 가지 평가를 내립니다. 간단히 줄이자면 이렇죠.

"나라 꼴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데 저러냐? 왕이야 이미 노망 났으니 그렇다 쳐도 이거 뭐라 하는 충신이 한 명도 없어?"
"옛 말에 근심할 일에 즐거워하고 즐거워할 일에 근심하면 모두 근심을 가져온다고 했는데, 점마 곧 죽는 거 보니까 딱 맞는 말이네"

참고로 역시 왕인데다 무신정권에 당한 것이 불쌍해서인지 고종을 옹호하는 부분이 많은 게 고려사입니다. 헌데 이 부분에서는 이렇게 미친 듯이 까고 있죠. 본심이 나온 걸지도요.

다만 임용한 교수는 그가 살아온 상황과 그 때의 마음을 생각하면 이해해 주자는 쪽으로 서술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고종이 죽는 부분에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1259년 3월, 몽고에서 사신이 옵니다. 그 전에 박희실을 차라대에게 보내 최의가 죽었다는 것과 환도하겠다는 것, 태자의 입조를 약속하니 차라대는 그 날짜를 4월 1일로 잡습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한 사신일 겁니다. 고종은 더 늦추고 싶어 5월로 했지만, 결국 4월로 잡게 되죠. 이 때 몽고는 서경 주변에 둔전하며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다가온 4월, 태자 왕정은 바다를 건너 육지로 갑니다. 그를 보좌하는 이는 이세제와 김보정 등 40명, 백관들에게 재물을 거두어 예물을 마련했고, 길 가는 사람들의 말을 뺏어 수행원의 말을 충당했습니다. 

이렇게 태자가 입조하며 공식적인 대몽항쟁은 끝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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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1259년의 남은 상황과 대몽항쟁 전체에 대한 평가를 하겠습니다.

무신정권 전체에 대한 편을 따로 쓰려고 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못 가겠네요. 그래도 최씨 정권과 고종, 그 동안의 항쟁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뭐 사실 아래 무신 글에서 좀 많이 얘기했지만요 ^^;

고생 많으셨습니다.

물론 아직도 끝은 아닙니다.
출처 pgr21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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