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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에 고아, 지금은 47세 노숙자
게시물ID : sisa_106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esweek
추천 : 4
조회수 : 31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04/10/26 11:19:28
[오마이뉴스 이승철 기자]“저 사람들 일하기가 싫어서 노숙자가 된 것이니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도, 도와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다.”

“노인들은 참 안 됐다…. 그러나 저 사람들 대개 게으르고 일하기 싫은 사람들 아니겠는가, 당국에선 왜 저 사람들 저렇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어디 수용을 하던지 해야지. 외국인들에게도 부끄럽고….”

지난 22일 여기 저기 노숙자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역 지하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대부분 “좀 안됐다” 라는 짧은 대답을 남기고 애써 외면하며 무덤덤하게 지나친다. 그러나 몇 사람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과 당국을 비난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흐트러진 자세로 세 명의노숙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과자부스러기를 안주로 독한 소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옆에서 잠든 다른 노숙자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깨워보지만 그는 이미 만취상태로 잠이든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 시청 앞 지하도에서 잠든 노숙자  
 
ⓒ2004 이승철 
 
대부분의 노숙자들이 자신의 서글픈 처지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잊기 위하여 술을 마신다고 한다. 그 술이 그들의 기력을 앗아가고 육체와 정신을 점점 더 병들게 하여 보이지 않는 삶의 미궁 속으로 빠뜨리고 있는데도 그들은 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다.

밤이 깊어지면서 지하도에 들어오는 바람의 감촉도 서늘하다. 새벽이 되면 더 추워질 텐데 대부분 덮을 것도 없이 그냥 잠들어 있다. 지하도 계단에 비스듬히 걸치듯 잠이 든 어느 여성 노숙자와 장애인 노숙자, 그리고 신문 가판대에서 잠든 모습은 처절한 느낌마저 준다.

 
 
▲ 서울역 지하도 계단에서 쓰러져 잠든 장애인 노숙자  
 
ⓒ2004 이승철 
 
지하도 중간쯤의 기둥 밑에서 60대로 보이는 한 노숙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드러눕는다. 바닥에 상품 포장박스를 뜯어 깐 것 외에는 덮을 것도 가릴 것도 없는 모습이다. 다가가 말을 붙였다. 

“영감님, 이렇게 그냥 주무시면 추울 텐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그가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주변의 다른 노숙자들과는 달리 술 냄새도 나지 않고 상당히 단정한 모습이다.

“왜 이렇게 노숙을 하십니까?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가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일어섰다. 따라서 일어서자 잠깐 앉아서 기다리란다. 화장실에라도 다녀올려는 것 같아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그가 금방 돌아왔다. 손에는 음료수 캔 두 개가 들려있었다.
“이거 드세요.”

음료수 캔을 따서 내 앞으로 밀어 놓고, 자신도 음료수를 마신다. 날씨도 서늘하여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그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한 모금 마셨다.
“올해 연세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마흔 일곱입니다.”
그랬다. 아직 사십대 중반인 그가 내 눈에는 육십 대 중반으로 보였던 것이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그의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그의 모습에 담겨져 있는 것이리라.

 
 
▲ 시청 앞 지하도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잠든 여성 노숙자  
 
ⓒ2004 이승철 
 
전남 영암이 고향인 박씨는 첫돌이 갓 지난 아기 때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고아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기 때 고아가 된 그는 외갓집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어렵게 자랐다. 외갓집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교육은 전혀 받아보지도 못했다. 겨우 밥이나 얻어먹으며 어렸을 때부터 논밭에 나가 농사일을 거들며 자랐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불쌍하게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의 핏줄이라고 외할머니가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몰래몰래 고구마며 누룽지라도 챙겨주어 그는 배고픈 서러움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완전히 찬밥신세가 되고 말았다. 외삼촌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외숙모의 눈길은 차갑기만 했던 것이다.

결국 10대 후반에 서울로 상경하였지만 서울은 그에게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배운 것이 없는 그에게 좋은 직장에 취직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어서 식당이며 작은 공장에서 막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 서울역 지하도 신문 가판대 위에서 잠든 노숙자  
 
ⓒ2004 이승철 
 
어느 곳에서나 그는 열심히 일을 했다. 작은 월급이나마 모아 장사라도 해보려고 쓰지도 않고 저축을 하였다. 그러나 몇 년간을 열심히 모아 목돈이 된 어느 날, 같은 방을 쓰던 친구가 몽땅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도 공장일이며 건설현장의 인부로 일하며 돈을 모았지만 번번이 주변 사람들의 꾐에 넘어가거나 도둑을 맞아 빈털터리가 되곤 했던 것이다.

“고향에는 다녀오셨습니까?”
“네, 지난 추석에 다녀왔습니다.”
“고향에서 농사일이라도 거들면서 사시면 이렇게 노숙은 안하셔도 될 텐데요?”
“아직도 외삼촌과 외숙모가 농사를 지으며 사는데, 외숙모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그냥 올라왔습니다.”
“다른 가족은 아무도 없습니까? 결혼은?”
“네, 아무도 없습니다. 결혼도 못해봤고요.”
“이제 날씨가 점점 추워질 텐데, 계속 이렇게 떠돌며 노숙을 하시렵니까?”
“아니오, 낼부터 다시 공사장에 일하러 가려고요, 돈 좀 벌어서 쪽방이라도 얻어야지요.”
“일할 곳은 있습니까? 그리고 쪽방은 하루에 얼마씩에 얻습니까?”
“건설공사장에 갈 곳은 있습니다. 쪽방은 하루에 7천원씩이면 얻습니다.”

공사장에 가면 하루 일당 5~6만씩 받는다고 했다. 얼마 전에도 그렇게 번 돈으로 쪽방을 얻어 친구와 같이 살았는데, 며칠 전에 그 친구가 남은 돈을 빼내 도망가 버려서 이렇게 노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노숙자를 위한 공공 쉼터에 가면 노숙을 하지 않고 따뜻하게 밤을 지낼 수 있을 텐데 왜 안가십니까?” 하고 묻자 “몇 년 전에 그곳에 가서 하룻밤 지내보았는데 그곳도 힘센 사람들 때문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고 말한다.

두 살 때 고아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모진 시달림만 당해온 그였지만 그의 눈빛은 아직도 순진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고달픈 세상살이에 20년은 더 겉늙어 보이지만 그는 세상에 대한 원망도 하지 않았다. 

“미운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 없습니다. 희망도 없고,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요, 뭐….”

이날 밤도 착하고 가엾은 한 노숙자가 도심의 지하도에서 추위에 떨며 하룻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사회 최 빈곤 최 약층에 대해서 우리의 최 상위층은 느끼는 걸까??

상위층은 왜 자신들이 욕을 먹는지 아는걸까??

단지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쓴다는 이유??

그것은 아닐거다.. 그들은 벌줄은 알고 사회환원은 코빼기도 하지않는 

것때문에 그들을 불신하는 풍조가 생겼다..

어쩌면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돈을 번만큼 그만큼 사회가 여러분들을 도와준것이다.. 

그러니 일정부분은 꼭 세금등으로 통해 환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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