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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김무성에 대한 기사..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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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하이롱
추천 : 0
조회수 : 92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7/24 00: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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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해제 MB5년]<9>무대와 공주

기사수정 | 2013-08-03 08:06:0626글자축소글자확대


이재오 의원이 ‘왕의 남자’였다면, 김무성 의원은 ‘공주의 남자’였다. 

그런데 공주의 남자는 왕의 남자와 달랐다.

친박(親朴·친박근혜)인 손범규 전 의원(18대·경기 고양 덕양갑)은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다.

“박근혜 대표를 대할 때 ‘나는 머슴이다’라고 생각하면 가장 편하다. ‘아씨와 머슴’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마음이 편하고, 박 대표도 편하게 받아들인다. 김무성 의원이 박 대표와 안 된 것은 ‘아씨와 장수’ ‘공주와 왕자’로 가려고 하니까 그런 거다.”

정치 초년병인 손범규는 그렇게 박근혜를 대했다. 2005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가 ‘김대업 병풍(兵風)’ 재판 과정에서 고생한 손범규에게 공로패를 주는 날. 손범규는 박근혜를 빤히 쳐다보며 “매번 공로패만 주시지 말고 공천장을 주시면 안 됩니까?”라고 떼를 썼다. 마치 머슴이 아씨한테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곁에 서 있던 당직자들이 모두 웃었다.

그러나 손범규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박근혜는 당시 김무성 사무총장을 가까이 부른 뒤 “당에 공로하신 분을 인정해 주셔야죠”라고 했다. 이 말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1년 뒤 이성헌 사무부총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 은평갑이나 경기 고양 덕양 중 하나를 골라보라”고. 손범규가 아마 대가를 요구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면 박근혜는 싸늘하게 외면했을 것이다.

그런 손범규의 눈에 박근혜와 김무성, 김무성과 박근혜의 관계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김무성의 표현대로라면 두 사람은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만 해도 수십 번을 더 싸웠다. 그럴 때마다 김무성은 소폭(소주폭탄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런 식이다. 2007년 경선 당시 경남지역 언론사 편집국장·보도국장 초청 저녁 모임. 박근혜가 한 시간쯤 늦었다. 김무성은 이미 술이 올랐고….

김무성=“대표님,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박근혜=“….”

김무성=“(박 대표의) 삼성동 집을 부동산에 알아보니까 한 20억 원쯤 간다고 합디다. 그거 팔고 아버지하고 살던 예전 신당동 집으로 들어가십시오. 일주일이면 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니…. 신당동 들어가면 (박 대표의) 이미지에도 좋습니다. 당선되면 (집 문제는) 어떻게든 풀릴 겁니다. 떨어지면 내가 전셋돈 마련해주겠습니다.”

박근혜=“(점점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제가 언제 돈 쓰라고 했어요? 돈 쓰지 마세요!”

박근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멀찌감치 앉아 술을 마시던 김학송 의원(경남 진해)이 깜짝 놀라 “무슨 일입니까?”라며 달려왔다. 얘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무성도 “그래, 됐습니다. 고마 치아 삐리소!”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왕의 남자’ 이재오는 MB(이명박)보다 네 살 아래였지만, ‘공주의 남자’ 김무성은 박근혜보다 한 살 많았다. 김무성이 1951년 9월생이고, 박근혜가 1952년 2월생이니 실제로는 5개월 차이밖에 안 나지만 그래도 김무성은 ‘공주의 오라비’ 같은 마음으로 박근혜를 대했다. 

역시 경선 때. YS(김영삼)가 김무성을 불렀다. YS는 김무성을 아들처럼 아꼈다.

김영삼=“박근혜는 안 된다. …이번 선거는 이명박이 된다.”

김무성=“각하, 제가 친박에서 넘버원입니다. 제가 나가면 배신자 됩니다. 각하 수하(手下)가 어디 가서 배신자 소리나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김영삼=“니가 넘버원이었나? 몰랐다….”

YS가 왜 몰랐겠는가. 김무성은 또 왜 몰랐겠는가. 넘버원이라는 것도 알고, 박근혜가 안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이다.

김무성은 이런 얘기를 자주 했다. “참, 나는 박근혜와 무슨 인연인지….”

전남방직 설립자인 부친 김용주 씨(1985년 작고)는 1960년 제5대 총선 때 야당인 민주당 참의원으로 출마해 잠시 정치에 몸을 담았다. YS가 이승만의 자유당을 나와 부산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입신(立身)하던 때였다. 그러나 곧 5·16군사정변. 부친은 다시 사업으로 돌아갔지만 고초가 없을 수 없었다. 

김무성의 기억. “아버지는 나에게 ‘정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래도 YS를 따라다녔다. 우리 가족이 박정희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그런데 (2005년) 박 대표가 당이 어렵다고 (사무총장을) 맡아달라고 하는데 ‘이게 인연인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두 사람은 정치적 성장환경이 다른 데다 DNA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상도동의 정치문화는 같은 목표를 향해 모두가 함께 간다는 동지의식이 강했다. 흔히 양김 정치를 보스정치라고 하지만 민주화 투쟁의 사선(死線)을 함께 넘은 동지의식 때문인지 봉건적 주종관계와는 좀 달랐다.

박근혜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에 이어 2007년 경선 캠프 좌장까지 맡았지만 김무성은 박근혜의 ‘공주 의식’을 견딜 수 없었다. 

기자들과 술을 마시다가도 박근혜 얘기만 나오면 “너거도 나를 박근혜의 종속변수로 보고 있는 것 아니냐. 박근혜 좋지…. 옳은 사람이지. 그런데 70은 옳지만 30은 틀렸다. 그걸 고쳐야 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렇게 공주처럼 행동하고, 또 주변에서도 공주 모시듯 하고 그게 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이런 질문도 했다.

김무성=“너거, 박근혜가 제일 잘 쓰는 말이 뭔지 아나?”

기자들=“원칙, 신뢰, 약속 아닌가요?”

김무성=“하극상이다, 하극상! 박근혜가 초선으로 당 부총재를 했는데 선수(選數)도 많고 나이도 많은 의원들이 자기를 비판하니까 ‘하극상 아니냐’고 화를 내더라. 그만큼 서열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그 다음으로 잘 쓰는 말이 ‘색출하세요!’다, 색출…. 언론에 자기 얘기가 나가면 누가 발설했는지 색출하라는 말이다. 그 다음이 근절이고…. 하여간 영애(令愛) 의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박근혜의 ‘영애 의식’, 그게 바로 김무성이 생각하는 박근혜의 ‘시(是) 7, 비(非) 3’ 중 비3의 뿌리였다. 그러나 박근혜는 김무성에게 원칙과 신뢰, 약속을 주문했다. MB가 김무성에게 정무장관과 원내대표를 제의했을 때도 그랬다.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2009년의 세종시 수정안 파동이었다. 

그해 10월 22일. 김무성은 케이블방송에 출연해 MB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사실상 지지했다. 한겨레신문이 바로 전날 1면 머리기사로 ‘세종시는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게 박근혜 전 대표의 확고한 생각’이라고 보도했지만, 김무성은 ‘원안 변경’을 주장한 것이다. 정치권은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근혜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세종시법(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은 국민과의 약속”이라고 못 박았다. 김무성의 케이블방송 인터뷰 바로 다음 날이었다. 누가 봐도 수하 장수의 반란을 진압하려는 친정(親征)이었다.

김무성은 침묵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박근혜 담당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내가 딴 맘을 가질 이유도 없고, 그럴 사람도 아니다. 세종시 문제는 나의 소신이었다. 그런데 전달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케이블방송 인터뷰) 당일 아침까지도 한겨레 보도를 몰랐다. 박 대표가 그런 말을 한 줄 알았으면 나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을 거다. 애초에 그 법을 통과시킬 때 내가 사무총장이었고 당 대표는 박근혜, 원내대표는 김덕룡이었다. 노무현이 청와대와 국회만 빼고 (정부 부처를) 전부 다 가져가서 괴물을 만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나. 하지만 총선 직전이라 충청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청 출신 의원들은 의원총회에서 거의 울다시피 했다. 인정에 끌려 찬성 버튼을 눌러줬다. (케이블방송 인터뷰는) 그때 내가 부끄러운 선택을 했다는 뜻이고, 그래서 사죄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박 대표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기분 나빠하니….”

세종시 파동은 결국 ‘시(是) 7’의 승리로 끝나고, ‘아씨와 머슴’이 싫었던 ‘무대(무성 대장)’는 끝내 박근혜와 갈라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종시 파동은 MB 5년의 국정 운영에도 깊은 주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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