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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햇살이 쨍쨍하더니 낮 내도록 비가 부스스 내린다. 오후 2시다.
어제 낮에 돌려놨던 빨래는 새벽에 가져왔다. 빨래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다시 세제와 함께 세탁기에 빨래를 넣었다. 가만히 응시하다 손을 버튼에 가져다 대어 세탁기를 동작시켰다. 삑- 삑-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해진 절차에 따라 세탁기가 움직인다. 세탁기는 그렇게 정해진 명령을 받아 정해진 세탁을 반복한다. 슬리퍼를 찍- 찍- 끌고 방으로 들어온다. 환기시켜놓은 방에선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쓰는 향수의 향기가 났다. ok-one. 친구의 추천으로 면세점에서 산 향수다. 나를 위해 산 향수냄새는 나의 행복을 상징한다. 뿌린 후의 향기가 나의 코를 자극한다.
털석- 하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는다. 친구들과의 인터넷전화는 오늘도 나만 고요히 들어와 있다. 게임을 켠다. RPG를 하면 공부에 지장이 생긴다며 하기를 기피했던 게임. 내 의지력은 겨우 이정도였다. 게임에서만은 하려고 계획한 일에 추가로 붙여 더욱 많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현실의 다른 일들과는 달리 게임은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게임을 한지 몇시간인지, 어느샌가 시간이 많이 지난것 같아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인 시간을 표시한다. 시간은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길어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러 가야겠다. 차일피일 미루어 왔지만, 오늘은 마침 금요일 시간상으로도 좋다. 주간엔 바빠서 자르러 오기 힘들었다는 핑계도 준비되었다. 가자.
씻고, 옷을 입고, 가져갈 짐을 챙긴다. 구름은 여전히 끼어있었지만 비는 그쳐있었다. 비가 올지도 모르지만 우산은 가지고 가지 말자. 가방엔 책이 들어있다. 질문을 받으면 이런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증거를 대면 될 것이다. 가는 길에 학교 도서관에 들려 자격증 관련 책을 빌려오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온다는 계획을 짠다. 현관문을 나선다. 깔린 아스팔트길을 따라 도서관을 향한다. 같은 과의 세형이 형을 만난다. 세형이형은 대학원생이다. 전과를 통해 새로 우리 학과에 들어왔었다. 붙임성이 많은 형이라 붙임성이 없는 나와도 면식이 있다.
“오랜만이다 경식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보니 바로 인사를 해주신다. 혹시나 무시당하면 어쩌지? 하며 모른척하고 넘어가려 했었던 내가 바보같다.
"뭐하고 지냈어?"
세형이형은 역시나 대화화제를 먼저 제시해준다. 그에 나는 오늘 신청한 자격증이라는 핑계를 제시하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도서관에 간다는 것으로 공부한다는 착각이 이루어져, 그 후 자격증에 대해 여러 얘기를 나눈다. 자격증은 기출문제가 최고다, 실기시험은 이렇게 공부해라 등 자신이 겪은 자격증 시험에 대한 얘기를 해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와 달리 형은 착실하게 살고 계셨다. 그렇게 형은 연구실로 들어갔고,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향한다.
터벅터벅 걸어 도서관에 도착했다. 새로 지어진 도서관은 새로운 건물로서의 위용을 한껏 뽐낸다. 광채나는 대리석 바닥, 높은 천장,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내 눈에 비친다.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도 눈에 띈다. 책을 들고 서로 얘기하는 학생들은 공부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오래된 가방을 맨 정체된 나로서는 들어가기 꺼려지는 분위기다. 도서관에 들어가 책이 있는 2층으로 가본다.
2층의 불은 꺼져있었다.
'아- 공사한다고 했지.'
학교측에서는 2층에 새로운 시설을 만든다며 공사를 한다 했다. 도서관이 바뀌어나간다. 공사한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잊어버린 바보 같은 나에 대해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3층으로 올라간다.
3층의 불은 꺼져있었다.
바보 같은 나에 대해 큰 실망을 느낀다. 도서관 책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오후 6시까지였다. 정해진 규칙을 잊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바보 같은 나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며 다시 터벅터벅 내려온다. 저녁때가 되니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책을 빌린다는 계획이 깨졌다. 계획의 원래의 목적인 머리카락 정돈을 위해 미용실로 가자. 도서관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즐거운 화제를 꺼내며 히히-호호 웃으며 지나다닌다. 난 혼자다. 하지만 혼자이길 원하는 혼자다. 다른 사람을 신경쓰며 있으면 힘드니까. 애써 부러움 이라는 생각을 털어내며 터벅터벅 미용실로 향한다.
미용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한다. 미용실은 2층이다. 계단을 오르는것에 힘에 부치며 2층 미용실로 올라간다. 미용실의 투명한 문을 통해 미용실의 내부가 보인다. 미용실은 자신을 꾸미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공간인 것만 같다. 그렇기 때문에 미용실에서는 왠지 꾸미고 들어가야 할 것만 같다. 변함을 추구하지 않는 나와는 격차를 느끼기 때문에 부담스럽다.
"어서와요~."
평소 보던 주인이 날 반겨준다.
"커트하러 왔죠? 앉아요. 무슨 일이 있었나봐요? 오랜만에 보는것 같네."
나는 평소에 하던 머리모양대로 평소처럼 잘라달라는 부탁을 한다. 일 때문에 오늘 자르러 왔다는 준비된 핑계를 대자 주인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쩐지, 요즘 좀 머리카락이 길었을 때 오더라~."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나는 쿨한 사람은 될 수 없다. 처음 왔을 때도, 미용실 주인은 여러 화제를 내며 말을 걸었었지만 소극적인 나는 화제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대화 화제 하나하나에 나는 상처를 받았다. 그렇게 대화가 이루어 지지 않자 미용실 주인은 처음에만 잠깐 말을 걸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것이 아쉬웠지만 나의 대화폭은 크지 않아서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머리카락을 자른 후 미용실에서 나와 오락실로 향한다. 오락실에 가서 15년간 짬짬이 해온 격투게임기 앞에 앉는다. 친구들은 이걸 보고 내가 게임을 잘하는줄 안다. 난 그냥 15년간이지만 짬짬이 해온 시간일 뿐인데. 그럼에도 나는 기대를 해본다. 실력이 나아졌을까 하고. 동전을 게임기에 넣는다. 게임 캐릭터들은 나를 반겨준다. 그렇게 평소에 하던 게임 실력을 오락실에서 발휘해본다. 다른 일들과 같이 이런 게임들은 연습한 성과가 바로 나타난다. 그렇게 난 큰 성취감을 느낀다. 그 기쁨도 잠시,
"Here comes a new challenger!!"
오락기에선 도전자가 왔다는 화면을 보여주며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이 캐릭터를 고르기 시작한다. 나는 게임을 하며 익혀온 기술을 날린다. 그러나 상대는 요리조리 피하며 섬세한 손놀림으로 내 공격은 피하고 자신의 공격은 맞춘다. 게임에서 농락당한다. 연거푸 몇 번을 도전해보지만 이길 수 없다. 나는 주눅이 들어 가방을 메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오락실을 나오는 길에 오락실 안에 보이는 사람들은 커플들과 가족, 그리고 게임마저 잘하는 사람들뿐. 나는 그 무리에 들지 못한다.
집을 향해 간다. 계획은 어긋나있어 실망스럽다. 이렇게 된 거 실망스런 나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자. 베스트라빈에 들려 큰 사이즈의 아이스크림을 산다. 4번 정도는 나눠서 먹을 수 있겠지. 아이스크림을 사고 포장을 기다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점원이 질문을 한다.
"숟가락은 몇 개 넣어드릴까요?"
이 질문은 같이 먹을 사람이 있냐는 비꼼으로마저 들려온다. 배배꼬인 심상으로선 기분이 나쁘다. 애써 비꼼이 아니라고 생각을 전환한다. 아이스크림을 4번 나눠먹을 것이니 4명이서 먹는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같이 먹을 사람이 있는것처럼 숟가락을 4개 받아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길을 걸어간다. 학교를 터벅터벅 걸어 지름길을 통해 원룸으로 향한다. 집에 오는 도중 비가 오기 시작한다. 우산은 집에 두고왔다. 진흙길에 신발이 미끄러진다. 어두워진 주변은 발밑이 보이질 않지만, 딱딱한 돌은 보이는듯 싶다. 나름대로 돌을 밟는다 생각하며 걸었지만 기어코 진흙을 밟고 만다. 그렇게 흙이 묻은 신발을 끌고 집으로 들어온다. 4층인 원룸에 올때에는 어쩐지 힘들지가 않다. 2층인 미용실에 올라갈 때에는 참으로 힘든데 어찌된 일일까.
오늘도 자신에게마저 핑계를 대며 잠깐의 외출은 끝을 본다. 날 칭찬하는 의미로 아이스크림을 꺼내며 에어컨을 튼다. 향기가 나던 집엔 에어컨에서의 시원한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시원함도 잠시. 에어컨에서 곰팡이 냄새가 난다. 이젠 향긋했던 집에서마저 냄새가 나는구나. 체념하며 아이스크림을 꺼낸다. 아이스크림은 드라이아이스로 인해 꽁꽁 아직 얼어있다. 수저를 꺼내들기 위해 포장을 뜯고 숟가락을 들자 숟가락에 살색 액체가 묻어있다. 뭐지-? 물감인가? 봉투 안을 살펴보지만 어느곳에도 살색 액체는 묻어있지 않다. 뚝- 뚝- 물방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새나? 천장을 보자 천장에는 물기란 찾아볼 수 없다. 싱크대, 화장실 또한 물에 대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잘못들은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의자에 앉는다. 잠시 시간이 지나며 다시 뚝-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떨어진다. 바닥을 살펴본다. 바닥엔 살색 물감인지 살색 물방울이 보인다. 이상하다. 집에는 물감도 없고, 물도 안 새는데 이렇게 되니 집주인에게 한 소리를 들을것만 같아 불안하다. 아무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에 액체가 묻었을까 내 손을 들여다본다. 아- 나였구나.
내 손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병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가장 크게 생각이 되는 것은 집주인에 대한 미안함이다. 나는 민폐덩어리구나. 다시 아이스크림을 쳐다본다. 아이스크림은 꽝꽝 얼어있어서 손을 가져다 대에도 녹지 않는다. 다시 내 손을 쳐다본다. 내 손은 점점 녹아서 물방울로 바닥에 흐른다. 열정으로라도 뜨거워 지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녹을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내 몸을 차갑게 만들기 위해 에어컨을 강하게 튼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퀴퀴한 공기가 내 몸에 스며든다. 하지만 쿨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차가워질 수 있을까? 차가워지지 못하는 몸은 단단해지지 못하며 그대로 녹아내린다. 스트레스 때문에 자라난 흰머리가 내 머리를 온통 하얗게 물들여 놓는다. 그렇게 향기가 나던 방의 바닥에 살색의 퀴퀴한 액체가, 그 액체 위엔 마치 곰팡이가 핀 것마냥 흰색 머리카락이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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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의 도약을 고치려고 글을 수정해봤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늘여쓴 부분도 있구요
아직 더 고칠 부분이 있나 찾아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