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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후 물이 차서 임금이 머물게 될 것 원효대사의 예언
게시물ID : mystery_65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스트댓
추천 : 6
조회수 : 565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7/25 03: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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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후 물이 차서 임금이 머물게 될 것 원효대사의 예언 대청호와 ‘청남대’로 맞아 떨어져
 
충청리뷰l 2003.06.12l
 
청원군 문의면 문의객사(文義客舍)동남쪽에 있던 다리로 순돌로 만들어진 청원 미천리 석교(石橋)는 물가운데 돌받침을 세우고 큰 돌2개를 반듯하고 길게 깍아 각(角)을 내고 긴 직사각형을 만들어 5줄로 10개의 돌을 합쳐 만들었다.
 
4119.jpg
 
문의(文義)지방 최초의 석교(石橋)로 길이 5.4m, 폭 2.9m, 두께 18m이며 설립연대(設立年代)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교각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있다.
 
문의읍지(文義邑誌)에 『홍전외 석교이간(紅箭外 石橋二間)』이라고 기록돼 있으며 1979년 대청댐 준공으로 인한 수몰(水沒)로 1980년 2월에 문산관(文山館)내 연못에 이전하였다가 또다시 2003년 3월에 이전해 현재는 문의문화재단지내에 안치(安置)돼 있다.
 
문의면의 하천은 대부분 규모가 적고 사용범위도 그리 크게 작용하지 못하지만 농경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금강수계에 포함되고 있다. 면소재지 미천리(米川里)에는 옛날 큰부자가 살았다고 하며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을 때 쌀뜬물이 내에 흘렀다해서 『米川』이라 했다하며 아름다운 내라 『美川』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米川』은 부락의 형상이 행주형(돛단배)으로 덕은이 계곡과 샛더말 계곡의 물이 새미실 양쪽으로 둥글게 흐르고 있는바. 그 모양이 마치 돛단배 같이 생겼다하여 행주형이라 했다. 양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합치는 곳을『합수골』이라 하고 부락 맨 위터에 오래된 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를 돛대라 하였다.(현재는 없음)옛날에 부락내에는 샘을 파지 못하게 했는데 그 이유는 배에 물이 들어오면 배가 침몰한다해서 부락이 망한다고 금지되어 오다가 해방후에 샘을 파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米川里는 대청댐 최상류지역으로 호수와 맞닿는곳 『합수골』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물위에 떠있는 돛단배모양이라 배가 물을 만났으니 제철을 만났다 하겠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소재지가 원 미천리로 이주하여 앞으로 많은 발전이 예상됨으로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더욱 뜻이 깊게 생각된다.
 
4273-1-2518.jpg
물이 차고 임금이 머물게 될 것이라는 예언대로 이곳은 대청댐과 청남대가 들어섰다.(위)
문의 문화재단지로 옮겨진 미천리 석교(아래)

  문의 지역과 석교에는 내려오는 전설이 몇가지 있다.
 
첫째.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께서 당나라 유학길에 남양주군 봉림사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고 도중 복귀하시다 현암사에서 명상후 “천년후 상 아래에 물이차서 세 호수가 생기고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듯이 지역이 국토의 중심이 되며 蓮花浮水(연꽃이 물위에 떠있는)의 성지가 이룩되어 임금 王字지형으로 國王이 머물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둘째, 고려 초엽 일륜대사가 절을 세울만한 곳을 찾아다니던 중 양성산에 올라서 주변을 둘러보다 산아래 마을에서 놀라운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일륜대사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사방의 정기가 이토록 영명하니 장차 문(文)과 의(義)가 크게 일어나 숭상될 것이다. 육로와 수로가 사통팔달 했으니 부락과 인물이 번성하리라. 그러나 어이하랴! 향후 천년뒤에는 물아래 잠길 것을. 그때 이르러 새 터전을 마련케 되리라”하고 예언하였다. 이때부터 이 지역을 문의 또는 문산(文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셋째, 고려 광종때 정진선사가 불당창건의 적지를 찾기위해 돌아다니던 중 이 마을에서 적지를 발견하고 하룻밤 자게 되었다. 그날 밤 대사는 물난리가 나는 꿈을 꾸었는데, 온천지가 모두 물난리인데 마을 앞 언덕고개에 물이 갇혀 넘실대고 있었다. 대사는 삽을 들고 나가 언덕고개를 파서 물길을 터놓았더니 갇힌 물이 흘러 수해를 면할 수 있었다. 대사가 흡족해서 마을로 돌아와 보니 마을은 커다란 강으로 변해 짐을 실은 돛단배가 지나고 있었다. 대사가 꿈에서 깨어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 지형이 꿈에서 본 바와 같았다. 이에 대사는 “앞으로 천년후에 이 언덕고개에 물이 넘어갈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불당창건을 포기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을 무너미고개라고 불렀는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난 대사가 묵었던 마을에는 대청호가 생겼고, 고개로는 대청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쓰기위한 관개시설이 만들어져 실제로 물이 넘고 있다.
 
석교에서는 다른 지방과 같이 정월 14일 저녁에 해가지기전 일찍 오곡밥을 먹은후, 사람들은 내(川)에 놓은 다리위를 왔다갔다하며 다리밥기를 하였다.
다리 밟기는 자기 나이와 같은 회수를 내왕하면 가장 좋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일년내 다리병이 나지 않고 튼튼하며, 액을 막을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14일 밤은 양반들이 하였으므로 보통사람들은 16일밤에도 하였다고 하지만, 14일 밤에는 누구나 다리 밟기를 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남자들만이 다리밟기를 하였으나 차차 부녀자들도 하게 되었고 평소 나들이를 못하던 부녀자들이 이날밤에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마음놓고 나와 남자들과 어울려 다리를 밟았다.
 
다리밟기는 한밤중까지도 하였다는데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초저녁에는 북을 치고 통소를 불기도 하는가 하면 노래를 부르기도 하여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웠으며 젊은 사람들은 다리위에서 뛰놀며 풍각도 치고 무동을 서기도 하여 한바탕 놀기도 하였으며 다리양옆에는 술을 팔기도 하였다 한다. 3.1운동 당시 미천석교에 미천리주민이 다수모여 만세를 불렀던 장소이기도 하며 문의지역 주민은 이들다리는 상장.산덕.구룡마을 주민들과 초등학생들의 통학로로 유용하게 이용되었으며 가을이면 볏단을 한가득 실은 달구지가 거뜬히 통과할 만큼 튼튼하게 축조된 석교라고 회생했다.
또 일설에는 이지역에 경관이 빼어난 큰 바위와 정자가 있어 시골원님이 유람왔다가 하인등에 업혀 개천을 건너는 불편을 겪자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와같은 부락의 유래와 다리의 전설에 감탄할 뿐이다.

청원군 문의면 문의객사(文義客舍)동남쪽에 있던 다리로 순돌로 만들어진 청원 미천리 석교(石橋)는 물가운데 돌받침을 세우고 큰 돌2개를 반듯하고 길게 깍아 각(角)을 내고 긴 직사각형을 만들어 5줄로 10개의 돌을 합쳐 만들었다.
 
문의(文義)지방 최초의 석교(石橋)로 길이 5.4m, 폭 2.9m, 두께 18m이며 설립연대(設立年代)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교각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있다.
 
문의읍지(文義邑誌)에 『홍전외 석교이간(紅箭外 石橋二間)』이라고 기록돼 있으며 1979년 대청댐 준공으로 인한 수몰(水沒)로 1980년 2월에 문산관(文山館)내 연못에 이전하였다가 또다시 2003년 3월에 이전해 현재는 문의문화재단지내에 안치(安置)돼 있다.
문의면의 하천은 대부분 규모가 적고 사용범위도 그리 크게 작용하지 못하지만 농경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금강수계에 포함되고 있다. 면소재지 미천리(米川里)에는 옛날 큰부자가 살았다고 하며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을 때 쌀뜬물이 내에 흘렀다해서 『米川』이라 했다하며 아름다운 내라 『美川』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米川』은 부락의 형상이 행주형(돛단배)으로 덕은이 계곡과 샛더말 계곡의 물이 새미실 양쪽으로 둥글게 흐르고 있는바. 그 모양이 마치 돛단배 같이 생겼다하여 행주형이라 했다. 양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합치는 곳을『합수골』이라 하고 부락 맨 위터에 오래된 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를 돛대라 하였다.(현재는 없음)옛날에 부락내에는 샘을 파지 못하게 했는데 그 이유는 배에 물이 들어오면 배가 침몰한다해서 부락이 망한다고 금지되어 오다가 해방후에 샘을 파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米川里는 대청댐 최상류지역으로 호수와 맞닿는곳 『합수골』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물위에 떠있는 돛단배모양이라 배가 물을 만났으니 제철을 만났다 하겠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소재지가 원 미천리로 이주하여 앞으로 많은 발전이 예상됨으로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더욱 뜻이 깊게 생각된다.

  문의 지역과 석교에는 내려오는 전설이 몇가지 있다.
 
첫째.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께서 당나라 유학길에 남양주군 봉림사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고 도중 복귀하시다 현암사에서 명상후 “천년후 상 아래에 물이차서 세 호수가 생기고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듯이 지역이 국토의 중심이 되며 蓮花浮水(연꽃이 물위에 떠있는)의 성지가 이룩되어 임금 王字지형으로 國王이 머물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둘째, 고려 초엽 일륜대사가 절을 세울만한 곳을 찾아다니던 중 양성산에 올라서 주변을 둘러보다 산아래 마을에서 놀라운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일륜대사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사방의 정기가 이토록 영명하니 장차 문(文)과 의(義)가 크게 일어나 숭상될 것이다. 육로와 수로가 사통팔달 했으니 부락과 인물이 번성하리라. 그러나 어이하랴! 향후 천년뒤에는 물아래 잠길 것을. 그때 이르러 새 터전을 마련케 되리라”하고 예언하였다. 이때부터 이 지역을 문의 또는 문산(文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셋째, 고려 광종때 정진선사가 불당창건의 적지를 찾기위해 돌아다니던 중 이 마을에서 적지를 발견하고 하룻밤 자게 되었다. 그날 밤 대사는 물난리가 나는 꿈을 꾸었는데, 온천지가 모두 물난리인데 마을 앞 언덕고개에 물이 갇혀 넘실대고 있었다. 대사는 삽을 들고 나가 언덕고개를 파서 물길을 터놓았더니 갇힌 물이 흘러 수해를 면할 수 있었다. 대사가 흡족해서 마을로 돌아와 보니 마을은 커다란 강으로 변해 짐을 실은 돛단배가 지나고 있었다. 대사가 꿈에서 깨어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 지형이 꿈에서 본 바와 같았다. 이에 대사는 “앞으로 천년후에 이 언덕고개에 물이 넘어갈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불당창건을 포기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을 무너미고개라고 불렀는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난 대사가 묵었던 마을에는 대청호가 생겼고, 고개로는 대청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쓰기위한 관개시설이 만들어져 실제로 물이 넘고 있다.
 
석교에서는 다른 지방과 같이 정월 14일 저녁에 해가지기전 일찍 오곡밥을 먹은후, 사람들은 내(川)에 놓은 다리위를 왔다갔다하며 다리밥기를 하였다.
다리 밟기는 자기 나이와 같은 회수를 내왕하면 가장 좋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일년내 다리병이 나지 않고 튼튼하며, 액을 막을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14일 밤은 양반들이 하였으므로 보통사람들은 16일밤에도 하였다고 하지만, 14일 밤에는 누구나 다리 밟기를 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남자들만이 다리밟기를 하였으나 차차 부녀자들도 하게 되었고 평소 나들이를 못하던 부녀자들이 이날밤에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마음놓고 나와 남자들과 어울려 다리를 밟았다.
 
다리밟기는 한밤중까지도 하였다는데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초저녁에는 북을 치고 통소를 불기도 하는가 하면 노래를 부르기도 하여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웠으며 젊은 사람들은 다리위에서 뛰놀며 풍각도 치고 무동을 서기도 하여 한바탕 놀기도 하였으며 다리양옆에는 술을 팔기도 하였다 한다. 3.1운동 당시 미천석교에 미천리주민이 다수모여 만세를 불렀던 장소이기도 하며 문의지역 주민은 이들다리는 상장.산덕.구룡마을 주민들과 초등학생들의 통학로로 유용하게 이용되었으며 가을이면 볏단을 한가득 실은 달구지가 거뜬히 통과할 만큼 튼튼하게 축조된 석교라고 회생했다.
또 일설에는 이지역에 경관이 빼어난 큰 바위와 정자가 있어 시골원님이 유람왔다가 하인등에 업혀 개천을 건너는 불편을 겪자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와같은 부락의 유래와 다리의 전설에 감탄할 뿐이다.

출처 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73&sa=X&ved=0CB0Q9QEwBDgoahUKEwj0m4uQtvTGAhVk5qYKHefF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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