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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변호사
게시물ID : lovestory_303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페티트
추천 : 4
조회수 : 106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0/06/25 02:22:15
얼마전 그분에 대한 글을 보고 느낀 바 있어 그에 더해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실록민주화운동] (71)인권변호사 조영래




더부룩한 머리와 윗단추 하나를 채우지 않은 헐렁한 와이셔츠 차림, 높낮이도 없이 단조롭게 흐르는 듯한 어조, 그리고 형사 콜롬보처럼 수수한 바바리 코트에 줄담배를 즐기던 사람.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변론서를 비롯해 1980년대를 가로지른 굵직한 사건마다 명문의 기록을 남긴 문장가. 사람들은 이 수수한 면모의 변호사를 흔히 ‘천재’라고 불렀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두루 갖춘 ‘보석같이 빛나는 이’라고도 했다. 

 

1947년 대구 출생, 경기고 졸업, 서울대 수석 입학, 사법시험 합격. 사시에 합격한 해인 71년 8월 소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8개월간 복역, 곧이어 민청학련 관련자로 6년의 수배생활, 80년 서울의 봄 때 복권돼 사법연수원 수료 후 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 개설. 이력으로 보면 그는 분명 천재였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이 거덜난 후 7남매를 데리고 대책없이 상경해 서울의 달동네를 떠돌며 지독한 가난에 허덕였다. 방에는 늘 형제들로 빼곡했기에 그는 달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공부해야 했다. 어학에 유달리 뛰어났으며 ‘적벽부’ ‘출사표’ 등 명문에 심취하고 불교 경전을 독학으로 완독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벌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시위 당시 고교 3학년인 그는 처녀작 ‘선언문’을 작성하고 국회 앞까지 진출했다. 이 시위 이후 그는 정학당한다. 자전거 한 대만 있다면 땅끝까지 주유하고픈 것이 소망이었지만, 영혼을 좀먹는 가난 속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투신한다.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 6·7 부정선거, 박정희의 3선 개헌, 학내 교련 실시 등 주요 사태 때마다 그는 시위를 주도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학생운동 리더로서는 뜻밖에 ‘신분 상승의 세속적 욕구’로 의심받을 사법시험 준비에 착수한다. ‘사회활동의 기반을 다지고 영속적인 운동을 위해’ 파격을 선택한 그였지만, 그는 이때 그의 생애를 규정짓게 되는 운명적인 사건과 만난다. 70년 11월13일의 전태일 분신은 그의 양심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요란한 산업화의 후미진 뒤안길에서 스스로 불타죽는 극한적 수단 이외에는 신문의 1단 기사로도 관심을 끌 수 없었던 노동 현실은 그를 주저없이 고시방으로부터 내몰았다. 


장기표가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을 지키는 동안 그는 대학가와 종교계, 지식인 사회를 선동하며 누비고 다녔다. 마침내 ‘대학생 친구 한 사람’을 그토록 아쉬워했던 전태일의 장례식은 서울대 법대에서 거행됐다. 80년대를 관통한 노학(勞學)연대의 맹아가 이 땅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이 씨앗은 이후 전국의 반독재운동이 광범위하게 연대케 하는 눈부신 꽃으로 발화한다. 이렇게 고시 준비생답지 않게 분주하게 보낸 몇 달 후 그는 사시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한다. 


71년 4월 대선에서 온갖 부정을 총동원하고도 김대중에게 가까스로 이긴 박정희는 이때 이미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그의 최대 난적인 학생운동권을 격파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10월15일 전국 대학 서클 해체, 문제 학생 1,800명 연행, 300여명에 대한 강제 입영 등으로 온 사회가 어수선한 가운데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있던 조영래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장기표·심재권·이신범 등과 함께 관제재판을 받고 18개월간 투옥된다. 


출옥후 그는 바로 유신 통치의 서슬 푸른 긴급조치와 만난다. 민청학련 주모자로 분류된 그는 기나긴 잠행생활을 시작한다. 수사기관에서 당한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옥독(獄毒)이 가라앉지도 않은 채 ‘겨울공화국’의 날선 바람과 맞서야 했던 그는 도망자의 신분으로 이후 6년을 보낸다. 


이때 그는 전태일의 삶을 복원하고 그 철학적·정치적 의미를 세우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전태일의 수기에 적힌 대로 전태일의 삶을 경험한다. 허리를 펼 수 없는 평화시장 다락방 작업대, 미성년 여성 노동자와의 만남과 대화, 평화시장에서 쌍문동까지의 도보 귀가 등 소년 및 청년 노동자의 궁핍했던 삶과 그는 점차 일체화되어갔다. 


3년 만에 ‘전태일 평전’은 완성됐다. 하지만 이 원고는 출판사를 잡지 못한 채 일본을 떠돌다가 83년에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출간됐다. 지은이를 밝히지 않은 이 책은 변혁을 꿈꾸는 수많은 이들의 지침서가 됐다. 유신을 구국의 통치로 교육받은 새내기 대학생들의 순결한 양심을 뒤흔들었으며 자신의 몸을 낮추어 스스로 노동현장으로 달려간 ‘80년대 현상’의 나침반이 됐다. 조영래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이 이 책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77년 11월 전태일 7주기를 기해 발표된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바친 헌사였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이 구속되고 그들의 활동공간인 ‘노동교실’이 강제 폐쇄되는 등 고난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저기서 노동자의 오랜/억압과 죽음이 탄다/아아,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끝없는 망서림도 마침내 끊겨버린/저기서/노동자의 저항이/노동자의 자유가/불타오른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긴 집체낭독시는 70년대와 80년대에 융융하게 전개된 민중문학사의 첫장으로 장식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역시 작가를 밝히지 않은 채 유통됐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에 대한 당국의 용공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폭로한 김지하가 재수감돼 사형 위기에 빠지자 조영래는 감옥 안의 김지하로 변신, 그의 이름으로 양심선언문을 쓴다. 후에 국제사회의 지식인들이 김지하 구명운동에 나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명문은 조영래 사후에야 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80년 서울의 봄과 동시에 복권된 조영래는 수배생활 내내 그의 곁을 지킨 동지 이옥경과 늦은 결혼식을 올리고 83년부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에 접어든다. 그의 붓은 합법적 공간을 만나 신명을 얻었다. 그의 무기 역시 ‘법’이라는 강력한 전문성을 얻었다. 시민공익법률사무소에 둥지를 튼 그는 5공의 인권 경시풍조를 향해 국제인권규약을 상기시키고, 학원안정법 입법 기도를 향해 위헌적 논리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84년 9월의 대홍수로 서울 망원동 5,000여가구가 침수당한 이른바 망원동 수재사건에 그는 무보수로 참여해 3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판결을 받아낸 것을 비롯해 약자와 소수자의 권익을 지키는 데 힘을 쏟았다. ‘미혼 여직원의 정년은 25세’라는 1심 재판부의 판결에 절망해 항소를 망설이는 이경숙을 설득, 항소심에서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임을 확인받은 이경숙 사건은 우리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주요 판결이었다. 


그러나 조영래의 진면목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부천서 성고문사건 때였다.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도구화한다’는 정권과 관제 언론의 융단 폭격 앞에 그는 우선 고발장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실현할 때에만 그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이 소신은 그를 공권력의 부도덕성에 맞서 맹공 질주하게 만들었다. 그는 경찰과 검찰, 사법부, 관제 언론이 한 순결한 여성에게 가한 온갖 비열한 박해의 부당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 무렵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을 자원한 그는 이 사건의 모든 기록을 모아 변협 최초의 ‘인권보고서’에 담았다. 대한변협의 사무실에도 안기부나 보안사 요원들이 상시로 출입하던 시절이라 그는 보고서조차 은밀히 쓰고 출간해야 했다. 보고서가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그는 보고서의 후기를 이렇게 고쳐쓴다. “우리의 인권보고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치떨리는 분노로 이렇게 외칠 따름이다.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치러진 대선이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귀결되자 그의 왕성한 활동의지는 날개가 꺾이는 듯했다. 단일화에 실패한 민주진영에도 암울한 절망감이 지배했다. 그는 90년 9월 폐암 진단을 받고 석달 뒤 43세의 젊은 나이로 서둘러 세상을 떠나갔다. 천재였으되 전태일이 만들었던 ‘바보회’를 사랑한 바보이기도 했던 조영래. 뛰어난 지략가, 불굴의 사회운동가라기엔 그는 작고 초라한 것들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최종 편집: 2004년 10월 03일 18: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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