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해로우니 마셔서 없애야 한다." 이 말을 삼강오륜과 같이 여기고 이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믿는 선비 마냥 하루가 멀다시피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나는 가끔은 햇빛의 온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아스팔트 바닥을 이부자리삼아 희미한 달무리의 밤하늘을 천장삼아 밤을 지새는 날도 적지 않았다.
내 초록빛 청춘에서 술은 마치 엽록체와 같이 수 없이 많다고 장담할 수 있지만, 낭만이라고는 가뭄에 콩 나듯 보이던 이런 나에게도 술기운에 몸이 적당히 들뜸에도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는 한번 씩 꺼내어 보곤 하는 작은 추억의 조각이 하나 있다.
흔한 비유라 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기억을 놋쇠 철제 서류안에 든 빽빽한 종이인 셈으로 치자면 그 추억의 조각은 마치 은은하게 빛나는 작고 알록달록한 학종이와 같다할 수 있겠다.
학종이의 울긋불긋한 색중 가장 밝은 색이라 치면 그 이야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로 올라간다. 당시의 나는 학교 우유 급식을 받고 우유곽 밑면의 숫자가 제일 큰 날이면 그것이 그렇게 좋아서 속으로 싱글벙글 하곤 하였다.
그 당시 나의 반에는 까만 반곱슬의 단발 머리에 진한 눈썹의 여자 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 아이를 갑순이라 하겠다. 갑순이를 꽃에 비유하자면 우아하면서도 깍쟁이같은 백합보다는 새파란 에너지를 주위에 뻗치는 싱그러운 제비꽃과 같은 아이였다.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말을 할 때에는 커다란 눈망울로 얘기를 들어주다가 곧잘 그 아이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나는 삼형제 집안에 속한 막내의 생존 패시브 스킬인 특유의 남다른 눈치로 그걸 알아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심사는 항상 방과후 깡통차기나 특기적성으로 듣고 있는 컴퓨터 수업에서 포켓몬스터 골드 CD를 받고 싶어하는 사사로운 욕망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수업시간이었다. 나의 담임선생님께서는 흔하디 흔한 질문을 반 아이들 전체에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자신 있는 몇몇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갑순이는 그렇게 발표를 좋아하는 아이중 하나였고, 나는 왼쪽 줄의 앞쪽에서 손을 들고 있는 갑순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 컴퓨터 특기적성 시간에도 게임CD를 곧잘 얻어가더니 꽤나 영리한 아이구나 싶은 생각에 갑순이를 보았을 때 어쩐 일로 얼굴에 생채기가 났는지 그 아이의 뺨에 하얀 밴드가 하나 붙어있었다. 나는 그냥 밴드가 있네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 때, 손을 들고 있던 갑순이가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운듯 배시시 웃더니 손을 들고 있는 팔을 뺨쪽에 대어 내가 보지 못하도록 감추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갑순이가 나를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인지 내가 갑순이가 서툴게나마 내게 숨기고 있던 마음을 작은 틈 사이로 들여다본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틈속에서 나는 따스함을 느꼈다. 짧은 순간에 내 눈 속의 갑순이가 예뻤다. 수줍은 듯 웃으며 나에게 자기의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그 아이의 마음이 나에게 너무 소중할 정도로 예뻤다.
나에게 이렇게 예쁜 그때의 추억은 색이 바래짐에도 불구하고 학종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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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그 친구는 말야. 같은 쿼티 출신임에도 컴씨와 달리 아랫사람 열 중 유독 왼쪽 엄지와 오른쪽 엄지에게 일을 몰아 혹사시킬 뿐이니 어디 우스울 따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