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남편과 결혼한 지 8년차, 임신 21주차 여자사람입니다.
입덧은 거의 사라지고, 태동이 느껴지지만 몸은 아직 그리 무겁지는 않아 살만한, 임신기간 중 가장 편하다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앞서 아이 낳은 친구들도 모두 지금이 딱 편할 때니 즐기라고들 하네요. ㅎㅎ
임신 관련 서적 보면 이쯤부터 아이가 바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태담을 해주면 좋다는데, 아직 어색해서 각잡고 태담을 해 준적은 없습니다.
남편도 사근사근 조근조근 태담을 할만한 성격이 아니라 기대도 안했구요.
근데. 오늘 남편이 갑자기 제 배쪽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더니 아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기야, 오늘부터 아이스하키 시즌이 시작된다. 네가 태어날 때 쯤이면 아이스하키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야. 좋을 때지. 기대해.
우리(!)가 응원하는 컬럼버스 블루재킷은 모레 시즌 첫시합을 가진단다.
AAA선수가 블랙호크 팀으로 가버린 건 아쉽지만, 새로 들어온 BBB선수도 기대할만 해. 올해 블루재킷은 수비가 강화되어서 괜찮을 거야.
작년에 부상으로 막판에 못 뛴 CCC선수는 부상에서 완전 회복했다니 더 다행이지. 걱정 마, 꼭 플레이오프에서 블루 재킷을 볼 수 있을테니까.
고! 블루재킷!"
목소리에 폰트를 입힐 수 있다면 궁서체로 들릴 듯 한 진지한 목소리로 저렇게 얘기를 하는데,
몇 주 전에 "이 아이가 아들일 지 딸일 지는 알수 없지만, 블루재킷 팬이 될 것이라는 것만큼은 알수 있다"던
남편의 말의 무게가 제 예상을 훨씬 벗어나는 수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위해 주문한 첫 책이 "아이스하키로 배우는 동물"과 "아이스하키로 배우는 색깔"이었을 때도 그냥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아기 태명을 "블루재킷"이라고 짓고싶다고 할 때,
"그건 너무 기니까 블루재킷의 상징인 캐넌(대포)으로 하자"고 맞춰준 게 과연 잘 한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좀 전에 남편이 다시 와서 뱃속의 아이에게 또 말을 걸었습니다.
"야구는, 뭐, 꼭 좋아할 필요는 없는데, 네가 관심이 있을까봐 알려줄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와일드카드로 올라온 뉴욕 양키즈와 8강에서 싸우게 된단다.
걱정하지마, 정규시즌 때 붙어본 적 있는데, 걔들 이번에 별거 아님. 클리블랜드가 4강 간다! 같이 응원하자!"
지금까지 하키든 야구든 같이 보자고 한 적 없었는데, 아이 태교를 위해서라며 임신 중에는 꼭 같이 봐야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차피 화면은 못보니까, 해설이라도 잘 들을 수 있게 배를 스피커쪽으로 향하게 하고 봐야한다는데...
대포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그냥 받아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