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스압) 인생돌아 보고 나서 오유에서 하고싶은 이야기.
게시물ID : freeboard_10096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J1bulls
추천 : 1
조회수 : 3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8/01 22:47:12
길지 않지만 짧지 않다고 느낀 27년 삶을 돌아봤어요.
술먹어서 그런지 뭔가 격양되어 있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싶고 그래요...
중간에 다소 격한 단어가 들어 갈지도 몰라요...불편하시면 넘어가주세요.
거의 눈팅만 하지만 좋아하는 즐기는 오유 친구들 형누나들 동생들한테 얘기 하고 싶은게 있어요  ...


나는 흔하고 평범한 빌어처먹을 대한민국의 서민 ㄱ끝자락에 매달려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죠...
집이라는 것에 대한 첫 기억은 지금 내 자취방 보다도 작은 방에서 부모님 형과 나 네가족이 화장실없는 작은 방이었고 그때가 다섯살 이었죠. 그러다 아버지 공장이 상황이 좋아지 시작하면서 집안에는 없지만 공용이 아닌 화장실이 있는 단칸방이 되었고 10살이 되는 해에 방이 두개가 되었고 화장실에 샤워기라는것도 생겼고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엔 거실이란거 컴퓨터라는걸 알게됬고 중학교 입학할때는 우리 집 이라는... 크지는 않지만 마당이 있는 강아지를 키울 수 있는 방 세개 부엌이 있고 거실이 있는 단독 주책에서 살게 됬죠.
그와중에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분식 식당 공장 등등 일을 하셨어요. 형은 단기지만 호주로 어학연수도 갔죠... 
그러다가 중3때 어릴땐 알지 못했던 imf여파와 믿어서는 안되는 수억의 어음이란 종이쪼가리에 밀려 다시 화장실 없는 단칸방으로 돌아왔죠... 월세라는.개념도 이때 처음 알았고 아...내가 미술 하고 싶다고 말할때가 아니구나... 느꼈어요. 사실 중학교때 공부는 잘하는 편이어서 민사고 준비해보자 갈데 모르겠으면 외고를 가라고 했던,  구청장 상을 받기도 했던 성적우수한 모범생이었던  그냥 부모의 관심과 사랑과 칭찬이 좋은 그게 전부였던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학원을 못가고 친구들과.놀고 매점에서 간식을 먹을려고 아르바이트를 해야되는 상황이 된거에요. 어렸지만 집이 어렵다는걸 느끼게 됬죠... 

할아버지가 좀 야속 하기는 했어요. 할아버지가 작지만 내실있던 파이프공장의 공장장이기도 했었고 아파트 두채 임대를 하기도 하셨던 상황이라 도와 주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런 건 없더라구요...  다만 그와중에 형은 학원이나 가고 싶은곳 하고 싶은거 비교적 다 하고 다녔고 졸업식이나 입학식때 꽤나 신경응 써줬어요. 부모님도 형에게는 많은 관심을 주었죠.
나는 전교등수 한자리를 하던 구청장 상을 받던 잘하니까 잘해낼거야 잘했네 이정도 였어요. 형은 평균 80점받아도 잘했다하면서...칭찬해주고 얘기도 많이 해주고...
사실 그럴게 공부 했던거도 이쁨받고 싶어서ㅜ였는데ㅠ
맘대로 안되더라구요... 

집이 힘들어지고 그러니 어머니가 일하능 시간이 더 늘었고 아버지는  알콜 의존이 강해지고 의처증이 생기시면서 힘들게 지냈죠... 제나이 18에 아버지 멱살을 잡고 가정법원도 가보고... 지금은.많이 좋아지셨지만 알콜의존증은 여전히 힘드네요.
뭐 이런저런 이유로 공부에 흥미를 잃고 고1겨울 방학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제 개인적인 용돈 10만 정도만 빼고는 생활비를 보태며 지내다가 고3때 여름때 처음으로 떼를 쓰면서 미술 하고 싶다고 꿈이라고 하며 미술입시를 했네요... 미친듯이 비쌌어요. 그 돈.... 총 200정도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태기는 했지만 철이 없었죠. 집에 그럴 돈 없다는걸 알았지만... 그래도 방이2개 되고해서 어릴적 기억에 좀 좋아졌다 싶어 고 3 추석때부터 너무 늦은 입시를 시작했고 실패를 했어요.
원래 그림그리기 글쓰기를 좋아하고 상도 받았지만 입시와는 다르더라구요... 
결국 재수해서 미대는 갔지만 학비 문제등으로 한학기만 다니고 장기휴학 하다가 제적이 되어버렸네요.. 그래도 미련 가지고 계속 창작활동을 하며 계약도 해보고 활동을 했지만.. 재작년쯤 다 놓았어요.  생활이 힘들고 재능이 없다는걸 알게 됬고 인정하게 되니까 편하더라구요...

군대는 형 전역하고 자리 잡을 동안 돈 벌다가 23의 나이로 가서 힘들게 보냈어요. 부대가 힘든부대는 아니었지만 어린 동생들에게 말도 안되는 이유로 아무 근거 없이 뺨맞고 갈굼 당하는 스트레스가 커서 탈모와 스트레스성 위경련  과한 작업과 근무로 디스크가 생기고 하지정맥류가 생겨 전역후 수술도 하게됬네요...우울증이 생겨 전역후에도 상담도 받았고 매  휴가마다 2~4일씩 노가다를 나가 휴가동안 쓸 돈 벌었고   말년 휴가때 면접을 보러 다니고 다시 일을 했어요. 투잡 쓰리잡도 뛰고 휴일 없이 7주 동안 일을 하다가 몸이 망가지기도 했지만 그와중에 관심있던 칵테일을 배우고 싶어 시작한 바텐더일을 지금 4년째하고 있습니다.
딱히 타이틀이나 내세울 경력은 없지만 그래도 하이네켄 스타서브? 그 대회도 나가고 부상도 받고 나름 즐기며 살고 있어요. 개인 레시피도 30개 정도 만들었고 절 가르려준 형님에게 칭찬도 듣고 부족한 나를 사부라고 부르고 따르는 내가 최고의 바텐더라 해주는 제자같은 학생도 있어요. 좋네요...

내 나이 27... 이젠 제 명의로 된 모든 빚을 청산했어요.
고등학교 때 부터 벌었던 돈 다 합해보니 9천 정도 되네요...
지금 수중에는 자취방 보증금 500이 전부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거 정도는 먹고 정말 좋아하는 신발 조던 일년에 한번 지를만 하고 여자친구랑 같이 한이불 덮고 살만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 존나 짧은거 같아요... 
남이 보면  별거 아닌 고생이지만... 나름대로 힘들었어요...
25살에 생일 처음으로 생일 파티라는거도 해봤고 항상 남에게 해주기만 하던 케익 촛불도 꺼봤고... 아직은 생일에 쉬어본적 없지만...그래도 좋아하는 일 하며 보내니까 좋네요. 얼마전 생일땐 단골분들이 케잌과 향수 등등 선물도 주고 직원이 손수 아구찜도 해주고 퇴근하구 여자친구가 차려준 술상도 받고...
많은것을 잃어 왔던거 같은데   웃고 살만해요...


뭔가 의식의 흐름이 이상한 글이 되버렸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거에요...
인생 뭐같고 힘들어도 쥭지않은 이상 살만하다고...
우울증에 괴로울때 알콜의존증이 심할때 간경화가 왔을때 금전적으로 힘들때 친구가 먼저 갔을때 믿었던 이가 배신했을때 작품 계약 사기당했을때  등등 힘든일 죽으면 편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이렇게 술을 먹고 안주를 뭐로 더 먹을까 생각하고  오유를 하고  웃고 울고 살아있어요...

나라꼬라지가 지랄 맞고 사는게 퍽퍽하고 재미없고 희망이 없어 보여도 살아봐요 우리. 힘내봐요.
Bibamus, moriendum est. Vivamus, moriendum est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에요.
마시자 언제가 죽을테니. 살자 언제가 죽을테니.

오유 형 누나 친구들 동생들 나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분들도 있을거에요. 그래도 이렇게 못난 놈도 연애도 하면서 웃고 살아요. 우리 행복해요. 아프지말고...

쓸데 없이 긴 뻘글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출처 뭐 없는 내 인생. 내 기억.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