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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기쁨>
게시물ID : panic_822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도둑맞은마음
추천 : 21
조회수 : 2230회
댓글수 : 25개
등록시간 : 2015/08/05 1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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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결혼식은 이제 세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녀는 이대로 인생의 무덤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무언가 특별한 기억이라든지 추억 따위를 고대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녀의 삶은 단조로웠고, 떠올릴만한 것도 없이 건조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출을 결심했다. 그녀 나이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어쨌든 분명한 가출이었다. 오늘은 다행히도(!) 그녀의 고모님의 금혼식이었고, 그녀는 조금 늦게 출발한다는 핑계로 집안에 혼자 남아있었다. 그녀는 편지라고도 할 수 없는 -오히려 메모에 가까운- 짤막한 서문을 주방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도망치듯 집밖으로 빠져나왔다. 제법 커다란 보스턴백에 몇 개의 속옷과 몇 개의 겉옷을 쑤셔 넣었을 때에도 목적지는 정하지 못한 때였다. 그녀는 현관을 나서자마자 습관처럼 자동차로 갔다. 운전석의 문을 여는 순간, 그녀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괜히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가방을 그만 놓쳐버렸다. 가방은 지퍼도 제대로 닫혀있지 않았고, 화장품과 향수 따위는 언제 넣었는지 여기저기 울퉁불퉁하게 돌출 되어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의 소리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즉시 전원을 꺼버리고 운전석에 던져 둔 채로 차 문을 닫았다. 그녀는 손에 남은 차 키를 어떡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신발장에 스페어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넘어져 있는 가방을 집어 그 안에 넣었다. 티셔츠에 걸쳐둔 선그라스를 코와 두 귀에 걸치고, 그녀는 서둘러 큰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택시에 타자마자 그녀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짧게 뱉어낸 후, 선그라스를 벗었다. 곧, 기사가 목적지를 물었고 그녀는 준비된 사람처럼 수원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목적지를 수원으로 정한 이유는, 때마침 창 밖으로 <수원성>이라는 음식점의 간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 거울로 본 운전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이며, 아무래도 장거리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대신, 이 근처 잠실로 가면 그곳에 수원으로 가는 버스가 많으니 그곳까지는 갈 수 있다고 했다. 기사는, 물론 지금까지의 요금은 받지 않을 테니 다른 택시를 타도 좋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왜 버스를 탈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까...' 라고 잠깐 생각했다. 어쨌든, 기사의 기분 좋은 배려에 그녀는 잠실로 가겠다고 했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처럼, 가출에 대한 그녀의 불안감은 이미 날아가 버린 뒤였다. 


겨우, 도망친 곳이 수원이라니...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그녀는 솔직히 만족했다. 서울을 벗어났다는 것조차도 그녀에겐 충분한 흥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원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왠지 모를 짜증을 느꼈다. 근처의 기다란 성문마저 그녀를 더욱 갑갑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제야 그녀가 원했던 곳이 한적한 곳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로 가야하나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낯익은 패스트푸드점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커피와 후렌치후라이를 먹으며, 눈으로는 유리창 밖에 있는 건물들을 탐색했다. 거리는 번화했고, 그녀는 역시 실망을 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복잡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발걸음은 다시 수원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몇 번쯤은 들어왔을 지명들을 더듬으며, 벌써 반시간 동안이나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택시를 집어타고 용인시로 가자고 했다. 십 여분을 달리고 나니, 조금은 한적한 거리가 보였다. 그제야 그녀는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신축 다가구주택이 즐비하게 있었고, 곳곳에 보이는 상가들도 일부로 정리라도 해 논듯이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었다. 날은 조금 어둑해져 있었고, 가방하나만 달랑 들은 그녀는 궁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래저래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얼마간 걸었다. 주변을 대충 살피자, <고시원오픈>이라는 전봇대사이에 걸려있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오래 전에 걸었던 모양인지 현수막은 때가 잔뜩 묻어있었다. 망설임 없이 그녀의 눈은 고시원이라는 간판을 찾고 있었다. 


커다란 책상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줄 알았지만, 조그만 침대도 있었고 헹거도 있었다. 그녀는 의자 위에 앉아 방안을 흡족하게 둘러보고, 사무실로 가서 한 달 동안의 계산을 치렀다. 주인인 듯한 노인은 그녀에 대해서 신경조차 쓰지 않는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단지, 열쇠를 건네어 줄 때 그녀의 손가락에 끼어진 약혼반지를 잠깐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나서, 침대에 누워 가출이 성공했다는 생각에 잠깐 낄낄거리며 웃었다. 가방을 열어 옷들을 대충 헹거 위에 걸쳐놓고, 일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생필품 몇 가지를 사 가지고 다시 올라왔다.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 그녀의 가족들은 기막혀하며, 그녀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단, 신랑 될 사람에게는 제법 그럴듯한 거짓말을 계획하겠지... 


푸드득~ 프드덕~~ 그녀는 몇 번인가 거친 날개 짓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새가 방안으로 날아든 것일까...'
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방문 위에 있는 조그만 창문으로, 햇살이 반쯤 들어와 있었다. 방안엔 그녀 혼자뿐이었고, 날개 짓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체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가 확 걷어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방이 아닌, 아직은 낯선 방안을 둘러보았다. 낯선 곳에서 낯선 아침을 맞으며, 정말로 가출이 성공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그녀의 기분을 들뜨게 해주었다. 
"나는 이제 이 낯선 곳에서 자유할 것이리라..." 
그녀는 웃음이 쏟아졌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자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더 웃었다. 


공동으로 쓰는 주방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정수기의 시계바늘이 11시를 가리키고 있는걸 보고 잠깐 깜짝 놀랐다. 그렇게 잠을 많이 잤던가... 그런데도 하품이 나왔다. 그때, 노인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냉장고의 반찬과 밥통의 밥을 설명한 후, 먹은 후에 설거지는 꼭 해놓으라며 곧바로 나갔다. 그녀는 잠을 많이 잔 탓인지 밥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물이나 마시려고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곧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천장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천장도, 벽도, 책상도 자신을 환영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다시 킥킥거렸다. 


그녀가 소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일주일인가 지나고 나서였다. 그녀는 이제 눈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몇 명되었고, 식사 때마다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고시원이라고 해서 대부분 학생이거나 정말로 고시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공부를 목적으로 있는 사람은 몇 명이 체 안 되는 듯 했다. 대부분이 직장인인 듯 고시원의 낮은 항상 조용했다. 
어느 날, 어느 때처럼 그녀는 아침 겸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있었다. 몇 번 안면이 있는 아줌마가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에겐 전부 학생이라고 부르는) 그녀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학생, 그 방에서 지내기 괜찮아?" 
하고 묻더니, "신기하네..."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의아하게 보자, 
"아니, 글쎄 내가 여기서 세 달이 조금 넘게 있었는데 그 방에서 일주일을 넘긴 사람은 처음이라 그래."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혹시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들은 적 없어?" 
"네?" 
"아니, 물론 모르는 게 약이겠지만,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 걱정스럽기도 해서 말야." 
아줌마는 갑자기 누가 있나 확인이라도 하듯 그녀와 둘밖에 없는 주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건 나도 들은 얘기지만, 그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하던데... 암튼 거의가 그 소리에 겁을 먹고, 다른 곳으로 갔더랬어." 
아줌마는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더더욱 낮추었다. 
"그 옆방을 통해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지금 학생 옆방 말야. 어쨌든, 사람들이 그 방에서 며칠을 못 버티더라구."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혹시, 제 옆방에 있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본 적 있어요?" 
"보긴 봤지... 뭐, 공부하러 온 것 같지는 않던데, 근데 학생은 여태 그 학생을 한번도 못 본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그제야 생각해보니 정말 그녀는 옆방에 누가 사는 지도, 누가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이는 얼마나 되어 보여요?" 
"글쎄,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던걸... 말하는 건 한번도 못보았는데, 왜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 " 
갑자기 그녀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줌마는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이 시계를 보더니,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암튼 다음에 더 얘기하자구." 
하며 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나가버렸다. 
그녀는 어떤 호기심으로 잠시 멍하니 있었다. 
라면은 이미 식어버린 듯 연약한 김도 내뿜지 않았고, 시뻘건 국물을 머금은 퉁퉁 불은 면은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까진 이 곳 생활이 그다지 무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갑자기 책이 그리웠다. 그녀는 그저 아무 거라도 닥치는 데로 읽고 싶었다. 하지만 고시원의 근처엔 서점이라곤 없었고, 그나마 노인이 일러준 이 곳으로 들어왔다. 문구만으로는 타산이 맞지 않았던지 가게의 한쪽 벽은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나마, 이렇게 책이라도 있다는 게, 그녀로선 너무도 반가웠다. 책을 고르고 계산을 치르려 하는데, 한쪽에 있는 미술용품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갑자기 집 생각과 가족들 생각에 목이 따끔거렸다.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지낼 줄은 상상조차 못하겠지...'
'어쨌든, 난 지금 너무 만족하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녀는 무거운 머리를 털어 내기라도 하듯,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내렸다. 
벌써 한 달의 이주정도를 보냈다는 생각에 그녀는 우울함을 떨어내고, 다시 뿌듯해짐을 느꼈다. 그녀가 고대했던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이곳에서의 낯선 삶에 그녀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이방인처럼 낯선 곳에서 낯선 모습으로 자유롭게 버티고 있는 자신을 다시 확인했다. 그때, 곱게 빗은 듯한 긴 머리의 뒷모습이 거울을 통해 그녀의 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긴 머리는 곧 4절지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괜히 흐뭇한 표정으로 긴 머리를 지켜보았다. 
'저 하얀 종이 위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무엇을 담아낼까?'
그녀는, 여자라는 표현보다는 소녀라는 표현이 어울릴 긴 머리의 그림이 갑자기 못 견디게 궁금해졌다. 그때, 긴 머리가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긴 머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응시했다. 두 시선의 맞닿음의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는 조금은 무안한 기분으로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제야, 긴 머리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곧, 긴 머리는 천천히 카운터 앞으로 갔다. 
"이번엔 오래 그렸나보네. 이렇게 오랜만에 오구 말야."
그녀는, '주인여자가 저렇게 말을 걸만큼 긴 머리가 이곳에 자주 오나보다.' 라고 생각을 했다. 
긴 머리는 주인여자에게 고개를 짧게 숙인 후, 그녀에게 도망이라도 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왜인지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긴 머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자고 홀리기라도 한 듯이 긴 머리를 쫓아 나왔는지는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괜한 호기심에 괜히 허탈해져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이나 한 권 더 고르려고, 다시 발길을 돌리는 순간, 그녀는 살짝 놀랐다. 긴 머리가 스케치북을 꼬옥 안은 채로 문구점의 문 옆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설마 나를 기다린 걸까?'라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며, 그녀는 긴 머리를 지나쳐서 문구점으로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책보다 밖에 있는 긴 머리에게 신경이 쓰였던 것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긴 머리의 그 소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끼쳐왔다. 역시나, 소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두 시선이 다시 만났다. 막상 소녀를 확인하자, 그녀는 소녀에게 할 말이 없음을 깨닫고, 무안해진 기분으로 발길을 돌려 고시원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는데, 소녀가 그녀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멈춘 발걸음처럼 소녀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기분 탓일까... 갑자기 소녀의 어깨 죽지에서 날개라도 튀어나와 소녀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기다려볼까... 정말, 그럴 것만 같은데...' 
정신을 차리자, 그녀는 방금 전의 망상이 괜히 부끄러웠고, 이상하게도 한편으론 두근거렸다.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을 소녀에게 들킬까봐서, 그녀는 몸을 돌려 발걸음에 속력을 가했다. 


그녀는 시나브로 옆방을 의식하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는 한 시간쯤 전에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은 열두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소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괜히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화장실에도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옆방은 조용했고, 어느 순간 그녀는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자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일까... 드디어, 옆방 문이 열리고 곧 다시 닫히고, 희미한 인기척을 느끼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벽에 귀를 바짝 붙였다. 사각거리는 연필심의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등을 벽에 붙이고 나서, 몇 시간 전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몇 시간 전, 그녀는 책을 사 온 후에,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화장실에 갔었다. 고시원안에 흡연실이 있긴 했지만, 그곳보다는 화장실이 그녀에겐 편한 장소였다. 그녀는 화장실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두 개비 째 피우고 있을 때, 소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놀라서,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소녀는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세수를 하더니 나가버렸다. 그녀는 서둘러 담뱃불을 끄고, 화장실을 나가서 소녀를 좇았다. 소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그녀의 방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마 하는 사이에, 소녀는 그녀의 옆방의 문을 열었고, 곧 그녀의 앞에서 문이 닫혔다. 소녀는 바로 그녀가 궁금해했던, 옆방의 주인공이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어떤 호기심으로 소녀와의 가장된 우연을 가져보려 했지만, 그녀의 바램처럼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걷고 싶을 때 걷고, 읽고 싶을 때 읽고, 그렇게 벌써 삼 주일이 흘렀다. 고시원은 언제나 적막했고, 권태로웠으며 아무것도 그녀를 자극시키는 것은 없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더 이상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껏 누군가 두드린 적이 없던 그녀의 방문이 소리를 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차마 놀라지도 못한 체, 두려움으로 누군가에게 두드려지는 문을 보았다. 
'누구일까...'
'가족 중 누군가가 나를 찾아내기라도 한 걸까...'
누군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침대에 걸쳐 앉아서, 그저 문을 노려볼 뿐이었다. 
"흐음!" 하는 헛기침소리와 "어디 갔나?"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녀는 빠르게 안도한 후, 마치 지금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일부러 하품을 하며 노인을 맞이했다. 노인은 그녀의 방을 본 다는 게 무슨 큰 실례라도 되는 것처럼, 방이 보이지 않도록 문 뒤에 서 있었다. 
"아, 있었구만. 잠깐 사무실로 와주게." 
노인은 앞장섰고 그녀는 어미를 놓칠 새라 바짝 뒤를 쫓는 새끼 오리처럼 노인의 발자국을 밟아나갔다. 


노인은 그녀에게 열쇠 몇 개를 주면서 이곳 사무실에 잠시만 있어달라고 했다. 며느리가 조금 전에 해산을 했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면서 손주 얼굴을 잠깐 보고 온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손님이 찾아오면 저쪽에 있는 열쇠로 방을 열고 방을 보여주라고 했다. 두어 시간 안으로 돌아올 터이니 잘 좀 부탁한다며, 그녀를 남겨둔 체 나가버렸다. 
그녀는 처음 이곳에 왔었을 때, 그때는 계산을 치르느라 잘 살펴보지 않았던 사무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노인이 형식상으로만 갖춰놓았는지, 모니터는 한쪽 구석에 있었고 먼지로 덮여있었다. 그녀는 별 생각 없이 전원버튼을 눌러보았다. 외부의 카메라와 연결된 그 모니터는 둘씩 짝을 이루며 두 줄로 쌓여져 있었는데, 카메라의 위치는 입구 쪽에 하나, 화장실 앞에 하나, 복도가 갈라지는 쪽에 두개씩 있었다. 카메라를 본적이 없던 그녀는 왠지 모르게 감시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언짢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닌, 단순히 외부인을 감시한다는 생각에 불쾌감은 곧 사라졌다. 
이 고시원은 방이 서른 개쯤 있었고, 방들은 복도 두 개에 나뉘어져 있었다. 여자 전용의 방이 있는 복도는 특이하게도 한쪽이 전부 창으로 되어 있었다. 즉, 방문만 열면 마치 베란다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한 발자국만 걸으면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쐴 수 있었다. 그녀의 방은 복도 맨 끝에서 두 번째 방이었다. 카메라의 성능이나 각도가 좋은 탓인지, 모니터 속의 그녀의 방문도 분명하게 보였다. 달리 할게 없었던 그녀는 모니터만 생각 없이 쳐다보았다. 이 시간엔 고시원에 사람들이 몇 명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모니터 속에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깜빡 졸았던가... 
귀를 뚫는 전화기 소리에 그녀는 허리를 폈다. 왼쪽 팔에 머리를 베고 엎드려 잤기 때문인지, 왼팔이 저려왔다.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언제 울렸냐는 듯이 전화기는 잠잠했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모니터를 보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데, 무언가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모니터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녀의 방이 있는 복도였고, 누군가가 창문을 열어놓고 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곧, 그녀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소녀였다! 
소녀는 무언가를 향해 곧게 뻗은 팔을 흔들어 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창 밖을 보며 소녀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우선은 그냥 이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삼십분 정도를 소녀는 그 자리에서 누구라도 부르는지 계속 팔을 흔들어댔다. 그녀는 그제야 소녀의 손짓에 흥미를 잃었다. 심심한 지루함으로 방에서 책이나 가져오려고 일어서는 순간, 모니터 안에서 무언가가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동그래진 눈을 모니터에 최대한 가깝게 대었다. 소녀는 한 손으로 그것을 받치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것을 어루만지는 듯 했다. 
'무얼까?'
'이 고시원은 분명 오층이다.' 
'분명히, 무언가가 날아들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저게 뭘까?' 
곧 소녀가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소녀의 모습이 정면으로 모니터 안으로 잡히는 순간, 그녀는 드디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새였다! 


그녀는 방금 전에 보았던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저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신기한 마술을 본 것만 같았다. 
'소녀는 분명히 새를 불러내었다.'
'삼십분 가량을 새들에게 손짓하면서...' 
'그런데 왜 새를 방으로 데리고 갔을까?'
'새가 방안에서 소녀와 같이 살고 있었던 걸까?'
'흠...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걸까?' 
'혹시, 내가 이곳에 처음 왔었을 때 들렸던 날개 짓 소리가 저 새의 것은 아니었을까?' 
'솜씨(?)를 보아하니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사연인 걸까?' 
'참새일까? 비둘기일까?' 
'하긴, 근방에 산이 있으니 내가 모르는 산새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그녀가 알고 있는 소녀의 정보, 즉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 연관을 짓기로 했다. 
"새를 부르고, 새를 키우고, 새를 그린다?" 
지금의 그녀로선, 그것밖에는 추리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어느새 그녀는 소녀의 방 앞에 있었다. 방안도 복도도 조용했다. 
'소녀는 새와 함께 잠이라도 든 것일까?' 
'아님, 내 생각대로 새를 그리고 있는 걸까?' 
그녀는 막상 문고리를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그것을 돌릴만한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문이 잠겨있으면 어떡하지?' 
'그래, 그럼 쉽게 포기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문고리를 돌릴 수 있었다. 


소녀가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소녀의 눈빛과 그녀의 눈빛이 허공에서 짧게 부딪혔다. 그녀의 눈이 소녀의 눈을 벗어나는 순간, 그녀의 발은 그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녀의 양손엔 파닥거리는 새 한마리가 들려져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소녀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소녀는 새를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몸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지는 것을 느꼈다. 


여긴 어디일까... 
두 눈이 떠지는 게 두려운 순간이다. 
조용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두려움은 커져갔다. 천천히 그러나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그녀의 귀로 들렸다. 속눈썹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들거리며 떨림을 느꼈다. 
결국은 눈을 떠야할 순간이 왔다. 막상 뜨려고 하자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그녀는 힘겹게 들어올렸다. 소녀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예상했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았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나를 어떻게, 왜,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일까...' 
그녀는 숲밖에 없는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은 깊은 산속의 별장처럼, 주위가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소녀는 그녀에게 침묵했다. 언제나처럼 소녀는 그저 조심스럽게 창문을 한 뼘 정도만 열고, 그녀가 본데로 손을 뻗어 새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그녀를 개의치 않은 체로, 잡아들인 새를 먹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런 소녀를 지켜볼 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그런 소녀가 두렵지도 않았다. 소녀는 그녀를 감금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이곳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했다. 끔찍한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소녀를 할아버지는 끔찍이 아꼈다. 이 숲속의 집에서, 소녀의 할아버지는 당연하게도 새를 가까이했다. 소녀가 오기 전, 그의 집에 찾아오는 거라곤 새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녀에게도 새들에게 했던 것처럼 많은 애정을 쏟았다. 소녀도 할아버지를 닮아 새를 사랑했다. 새들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했다. 이 집의 정원과 심지어 집안까지도 새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여느 날처럼, 소녀는 모이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녀에게로 다가왔다. 소녀는 모이를 이곳저곳에 골고루 뿌려주었다. 여느 때처럼, 평범한 것 같은 그 날에, 그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마리의 새를 번갈아보았다. 분명히, 어떤 새가 먹을 것이 아닌 다른 새를 쪼고 있었다. 당황한 소녀는 새들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모이를 한 웅큼 쥐어 그들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은 악화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공격은 승리했다. 쪼이기만 했던 가여운 새는 풀밭위로 널브러져 있었다. 끔찍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공격한 새는 확인사살이라도 하듯이, 죽은 새를 다시 쪼기 시작했다. 
소녀는 경악했다. 그 새의 부리에서 죽은 새의 살점을 보았을 때, 그것이 부리 안으로 삼켜지는 것을 보았을 때,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진행되었다. 소녀가 곁에 있는 삽으로 그 새를 내려친 것이었다. 소녀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이 멈출 때까지, 삽으로 수 차례 내려쳤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체로 주저앉았다. 
소녀는 새를 죽인 새도 무서웠지만, 그 새를 죽인 자신 또한 두려웠다. 그제야,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소리쳐 불렀다. 사랑스런 소녀의 비명을 듣고, 할아버지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할아버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새들과, 소녀와, 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녀는 두 뺨 위로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무겁고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아가, 너가 그랬냐..." 
아직까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소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아버지는 떨고 있는 소녀대신, 짓이겨진, 이미 죽어있는 새들을 안았다. 그리고, 소녀를 내버려 둔 채,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날, 할아버지는 날이 어두워 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소녀는 같은 자리에서 그대로 있었다. 많은 새들이 소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지만, 소녀에게 필요한 건 그들이 아니었다. 소녀가 필요한 건, 할아버지의 이해와 용서와 따뜻한 포옹뿐이었다. 마침내,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소녀를 잠깐 내려다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새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손녀의 손에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 소녀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어둠이 더욱 짙어지자 소녀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소녀의 눈물을 대신이라도 하듯,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현관은 열려있었지만, 집안은 불은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드디어, 소녀는 일어섰다. 하지만, 소녀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닫혀있는 대문을 밀었다. 한번도 혼자 다닌 적이 없는 산길을 소녀는 비칠거리며 내려왔다. 마을은 분명 소녀의 집과는 먼 거리였지만, 소녀는 어떤 거리감도 느끼지 못했다. 드디어 마을입구에 도착하자, 거센 비와 두려움에 연약해진 소녀는 구멍가게 앞에서 쓰러졌다. 


소녀와도 안면이 있는 가게주인은 사고를 직감했다. 그는 수첩을 뒤져서, 소녀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러나, 신호음만 계속될 뿐이었다. 탈진한 소녀는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 좋은 그의 아내는 안타까운 얼굴로 소녀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는 추측했다. 소녀의 할아버지가 어떤 사고를 당했고, 그것을 알리려한 소녀가 험한 밤길을 달려왔을 거라는... 
그의 상식대로, 이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즉시 112에 신고했다. 하지만, 불행을 막기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소녀의 할아버지는 그의 추측대로 사고를 당했던 것이었다. 경찰들과 구급요원들이 산 속에서 할아버지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그들은 소녀의 할아버지를 어떤 골짜기에서 발견했다. 비에 젖은 숲길은 미끄럽기 마련이었고, 사인의 추정은 당연하게도 발목 골절에 의한 추락사였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소녀에 대한 자신의 무정함을 깨닫고, 정신 없이 소녀를 찾아 숲 속을 헤매었을 것이리라... 


소녀는 새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모든 불행이 새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녀는 많은 새를 먹었다. 
심지어, 새들이 보는 앞에서도, 소녀는 그 조그만 입술로 다른 새를 질근질근 씹어댔다. 
소녀는 그렇게라도 하면, 웃을 수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소녀는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한 사람에게라도 용서받고 싶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언니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보아주었을 때, 그때 결심했는지도 몰라요." 
소녀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날 용서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차분한 손으로, 떨고 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소녀에게 새들과 소녀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해주었다. 
소녀는 조금 울었다. 
"할아버지는 새들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어요..." 
소녀는 그녀의 가슴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내가 이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녀는 소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그녀에게 떨어지며, 몸을 돌렸다. 
그녀를 뒤돌아선 소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이 집에서 나가주세요." 


그녀는 대문을 나섰다. 소녀가 이층 창문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수많은 새들과 함께 소녀를 잠시 지켜보았다. 곧, 소녀는 창문을 열었다. 소녀는 그녀가 이제껏 본 것과는 다르게, 한 뼘만 열지 않고 그 커다란 창문을 전부 열어두었다. 그녀는 얼핏 소녀가 희미하게 미소짓는걸 본 듯 했다. 그러나, 방금 전 그녀가 보았던 것처럼, 소녀가 정말 그랬었다는 것은 확신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가 소녀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새들은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새들은 소녀에게 희생되었던 가족과 연인과 동지들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새들은 곧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소녀는 그런 새들을 향해 깊게 포옹이라도 하듯 양팔을 활짝 벌렸다. 새들은 빠르게 소녀를 덮었고, 소녀는 깃털처럼 가볍게 스러졌다. 그녀는 수 십 마리의 새들에 의해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며칠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가족들은 집요하게 그녀를 닦달했지만, 결국은 그녀가 무사히 온 것만으로 안도했다. 가족들에겐 그녀의 사건보다, 조만간 다가올 그녀의 예식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던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녀의 주먹만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녀의 가슴위로 손을 갖다대었다. 손바닥 밑으로 소녀의 맥박이 느껴졌다. 그녀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젠 이곳에서 쉬렴..." 


그녀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했고, 예정대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녀와 그녀의 동반자가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유럽일주였다. 여행 내내 그녀는 우울하지도 않았지만, 즐겁지도 않았다. 그저 어떤 권태로움과 이유없는 두근거림만이 계속 엄습해올 뿐이었다. 
유럽 곳곳을 다닌 지 9일째 된 어느 날, 그녀는 어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동반자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녀는 이곳에 혼자 와야 했다. 그녀는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어떤 그림 앞에서 한동안 서있었다. 그녀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뛰었고,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짧은 탄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녀를 발견한 큐레이터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큐레이터가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켰을 때에도, 그녀는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 그림은 마그리뜨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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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daum.net/suttle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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