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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시공간
게시물ID : readers_106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ushian
추천 : 0
조회수 : 27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31 19:53:33

시간이 멎은 것 같은 하얀 하늘 아래 나이프를 든 여자가 사람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죽어버린 그 자는 새빨간 피를 흘리며 신음조차 못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별 거 없었다. 그가 뭔가 시비를 걸어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녀가 그를 증오해서인 것도 아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방황했을 뿐이다.

그렇다. 그녀는 오랜 시간 방황했다. 방황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이유로 보일 정도로 그녀는 홀로 지냈다.

시체를 은닉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그녀는 시간 죽이기를 위해 다음 희생자를 찾으러 나설 즈음이었다.

어이, 거기 멈춰봐.”

그녀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나온 곳에는 초췌한 모습의 남자가 서 있었다. 수염은 깎은지 2주일은 족히 넘은 것 같고, 차림새 또한 볼품없었다. 그는 그녀를 불렀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시간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아주 손쉬운 요리를 하듯이 복부에 칼을 집어넣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시간이 멈춰 있었기 때문에 피는 나오지 않았으며 그는 칼을 맞았는데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시시한 벌레를 쳐다보듯 그를 힐끗 다시 한 번 더 보고는 칼을 뽑았다.

그녀가 시간을 흐르게 하자, 시체가 되어버린 그는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피웅덩이에 엎어진 그를 보고 별다른 감상 없이 자리를 뜨려 했다.

멈춰라고 했을 뿐인데, 죽이는 건 너무하잖아?”

그녀는 목소리가 난 정면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아까 자신이 살해했던 그가 똑같은 차림새로 서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어 자신이 방금 죽였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바닥을 가득 적시던 피조차도.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위협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방금 널 죽였는데 어째서 넌 살아있지?”

난 널 알기 때문이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아는 거지. 나도 나 자신을 납득할 수 없는데.”

넌 오랜 시간 방황했어. 네가 여기 존재한 만큼이나 방황했지.”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방황한 것은 맞지만, 얼마나 방황했는지는 자신도 기억해내지 못했으며, 처음 보는 그는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거 알아? 난 말이야, 시간이라고.”

알아. 공간이야.”

그의 차분한 대답에 그녀는 압도감을 느꼈다. 압도감이 그녀를 집어삼키자 그를 찌르러 달려들었다. 당연하지만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시간은 멈추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일어난 일과 똑같이 그녀는 시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그가 또 나타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말 좀 들어봐라고. 난 널 찾으러 온 까닭이 있어.”

듣고 싶지 않아!”

그녀는 그가 나타나는 족족 칼로 찔러 죽였다. 여러 번의 살해 끝에, 그녀는 그를 절대로 영원히 말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간을 멈추더라도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체력이 필요한 법이라, 배가 고파졌다.

숫자를 세는 것조차도 잊을 만큼 그를 죽이다가 그녀는 또 나타난 그에게 말했다.

죽이는 것도 질려 버리네. 네가 공간이라고? 어디서 등장하는 거야?”

말 그대로 난 실존하는 공간에서 나오지. 여긴 네 세상이라 네 마음대로 날 죽일 수 있는 거지만, 네가 나의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한, 난 언제든지 여기에 나타날 거야.”

내가 죽을 때까지 널 죽일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죽어도 난 존재하지. 그럼 내 승리야.”

그녀는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논리적으로 옳았다.

넌 날 죽이러 온 거냐.”

아니? 전혀. 나와 넌 원래 한 몸이었어.”

그녀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그를 훑어보았다. 자신은 비록 살인자이지만 그처럼 꾀죄죄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모습으로 있었다.

기분 나빠.”

그 말은 사실이야. 여기는 실존하는 공간이 아니지. 내가 있던 곳이 진짜 현실이고 진짜 공간이야. 너는 시간임에도 스스로 시간죽이기를 하고 있어. 그래서 현실이 너를 데리러 온 거야.”

가기 싫다면?”

우리는 함께 몰락하게 될 거야.”

내가 죽어도 너는 존재한다며.”

그렇지. 하지만 네가 거주하는 이 세계는 너무 약한 곳인데다 내 상상대로 다룰 수 있거든.”

네 상상대로 다룬다고……? 그럼 날 하늘로 데려가봐.”

얼마든지.”

그는 그녀가 시간을 멈출 때처럼 별다른 행위 없이도 공간을 바꿀 수 있었다. 아까만 해도 하얀 세상에 존재했던 그와 그녀는 순식간에 푸른 하늘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그녀는 지상을 향해 고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미쳤어!? 멈춰! 멈추라고!”

얼마든지.”

그가 공간을 멈추자, 그와 그녀는 하늘에 둥실 떠 있는 채로 있었다. 그녀를 스쳐지나가던 차가운 바람은 멎었지만, 너무나 추워서 더 이상 하늘에 있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우주로 가보고 싶어.”

얼마든지.”

그가 공간을 바꾸자, 그와 그녀는 태양에서 불과 5000km 떨어진 곳에 존재했다. 그녀는 손을 가리고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물체를 보고 눈이 멀 것 같았다. 우주에선 숨이 쉬어지지 않아 입만 뻐금거렸지만, 입모양으로 그는 그녀가 다시 지상에 오길 바라는 것을 알았다.

그와 그녀가 다시 원래의 지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상하게 말했다.

이젠 내 말을 믿고 나와 함께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지?”

나와 네가 함께였다면 원래 세계에선 우린 하나였단 거야?”

그래. 우리는 원래 시공간이었어. 어디에나 존재하고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었지. 또한 누구에게나 다른 존재야.”

우리는 누구의 시공간이었는데?”

돌아가 보면 알지. 힌트는, 나를 이곳에 파견한 자시공간이지. 우리는 음모 때문에 둘이 된 것이야. 그리고 그 음모는 이제 분쇄될 때가 왔어.”

대체 음모란 건 뭐야. 나는 그 음모로부터 도망쳐 나온 거야? 그래서 방황했던 거야?”

현실에서 자유를 억압하고 의식을 말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지. 원래 이곳은 창조된 세계야. 그래서 자유로운 생각들이 시간을 타고 여행을 와서 자유로운 창조를 즐겼어. 그건 하나의 혁신이었지. 하지만 현실과 연결되었던 창조된 세계가 도피를 통해 분리되고, 너는 이 곳에 갇히게 된 거야.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아 피폐해지게 된 거지. 그래서 이 모습이 된 것이고.”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래서 너를 구하러 온 거야.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고, 이 창조된 세계를 원래의 밝고 활기찬 곳으로 만드는 것이지. 현실은 네가 도피해도 끝나지 않아. 방황 끝에 네가 죽어버린다면, 현실도 그렇고 이곳도 파멸해 버리지. 나와 네가 존재해야 할 자의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이야.”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시간을 멈춰버렸다. 시간이 멈추면 영원히 생각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춰서 아무런 변화도 없어야 할 세계에 존재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시간을 흐르게 하자, 세계의 소멸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현실로 돌아가면 이곳도 복구되고 나는 방황하지 않으면서 이곳에 놀러올 수 있지?”

복잡하지만 궁극적으론 그래.”

어떻게 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할 수 있지?”

얼마든지.”

둘은 현실로 돌아왔다.

 

이 글을 쓰는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로그아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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