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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일기
게시물ID : sports_258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ASIS]
추천 : 0
조회수 : 99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0/06/27 10:52:43
여긴 넬슨 만델라베이 경기장 라커룸. "주영아 오늘 니가 원톱이다" 허정무 감독이 주영이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차례로 선발 오더를 부른다. 내 이름은 오늘도 없다. 범석이를 잠깐 처다보니 상심한듯하다. 기훈이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던지 차라리 홀가분한 표정이다. 재성이와 두리가 웃고있다. 나이지리아 경기때 선발출장을 기대했지만 무산됐고 오늘도 역시 후보다. 기회가 과연 올까? 주영이와 기훈이보다 내가 못한게 무엇이란말인가?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6강에 진출했지 않은가?

경기전 그라운드에 나와 몸을 풀었다. 주전들은 라커룸에서 작전지시를 받고있다. 그리스 경기때보다 잔디상태가 형편없다. 날씨는 생각보다 쌀쌀하지 않았지만 왠지 비가 쏟아질듯하다. 관중석에 붉은악마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내와 두딸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경기 시작시간이 다 되어간다. 벤치로 들어와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경기가 시작됐다. 지성이가 중앙선부근에서 볼을 커트해서 페널티에어리어 앞까지 달렸지만 패스가 이뤄지지 않았다. 잠시후 얻어낸 프리킥 찬스에서 주영이의 프리킥슛이 골대를 강타했다. 안타깝다. 제대로 감아들어갔는데... 설마 골대의 저주따위때문에 지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우루과이의 초반 패스가 날카롭다. 그래도 요주의 선수인 포를란을 제대로 막고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우리 수비 조직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부부젤라 소리가 귓가를 스쳐지나간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사이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커졌다. 경기장을 보니 우리 오른쪽 수비진영에서 포를란이 낮은 크로스를 날렸다. 공이 수비수와 성룡이 사이를 통과한다. 그자리에 수아레스가 있었다. 성룡이가 후방의 수아레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듯했다. 처낼수 있었던 공을 그냥 흘려보냈다. 수아레즈가 사각에서 침착하게 우리골대로 골을 성공시킨다. 벤치 분위기가 조용해 진다. 시계를 보니 8분이 지났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킥오프를 하고 우리 선수들의 점유율이 점차 올라간다. 경기를 지배하고있다. 우루과이 벤치를 보니 수비수들이 몸을 풀기 시작한다. 겨우 1골로 잠그려는 것인가? 우루과이가 조별예선에서 무실점의 수비를 해냈지만 우리 미드필더가 강하게 압박하면 1번정도의 결정적인 찬스가 올것이라 믿었다. 지성이가 열심히 달린다. 두리가 2번의 중거리슛을 날려보지만 정확하지 않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전반적이 끝나버렸다. 주전들이 라커룸에 들어가는 동안 다시 그라운드로 나왔다. 기훈이랑 패스를 맞췄봤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컨트롤이 쉽게 되지않는다. 자불라니가 발끝에서 미끄러진다. 

후반이 시작됐다. 갑자기 감독님이 나를 불렀다. "몸을 풀고 후반 초반에 들어간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경기 후반 정원이 형과 교체해 월드컵 무대에 섰던 기억이 났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12년만의 월드컵이다. 그것도 16강. 다리를 풀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몸에 열이 나기시작한다. 생각보다 이른시간인 후반 15분 감독님이 교체지시를 내리셨다. 재성이가 나오고 내가 들어갔다. 그라운드로 들어서려는데 부부젤라의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인상이 나도모르게 굳어진다. 이것이 월드컵이고 부담감이란 것인가? 10년넘게 프로선수로 잔디밭을 뛰었지만 지금같은 기분은 첨이다. 내가 해결해낼수 있을까? 주영이에게 자리를 지정해주고 내 위치를 잡았다. 생각보다 우루과이의 수비진이 키도크고 피지컬 능력도 뛰어나단 생각이든다. 몇차례 패스를 받았지만 심판이 자꾸 내가 공을 잡으면 휘슬을 분다. 헤딩경합도, 어느정도의 몸싸움도 용인해주지 않는다. '심판 개새끼...' 지성이와 주영이가 슈팅을 날려보지만 골로 연결되지 않았다. 후반 28분 드뎌 지성이가 파울을 유도해냈다. 저 자리라면 성용이가 센터링을 올릴것이다. 뒤에 정수가 보인다. 내가 그앞에 섰다. 수비사이로 헤딩경합을 했다. '공은 공은 어디로 간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청룡이가 뛰어올라 골문을 향해 헤딩하고 있었다... 공이 땅에 튕기고... 다시 골문..그리고 철렁...동점이다... 분위기를 탔다 우리가 이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시작이다. 

다시 킥오프. 2002년 정환이형처럼 내가 우리팀을 8강으로 올리고 싶었다. 열심히 뛰었다. 다시 청용이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슛! 아... 키퍼 정면으로 가버렸다. 나에게 기회가 오지않는것인가? 비때문에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우루과이의 공격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수아레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코너킥이다. 또 포를란이 올린다. 또 뒤쪽의 수아레스가 공을 받았다. 오른발로 앞에 있는 정우를 제친다. 어..어....악! 제대로 감아찬 수아레스의 슛이 골대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시계를보니 38분을 지나고 있다. '시간이 없다!' 성용이가 나가고 기훈이가 들어왔다. 내 자리는 어디인가? 내 역할은 무엇인가?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몇분 뛰지않았는데 질척거리는 그라운드때문에 호흡이 가빠진다. 그때 지성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에게 들어오는 스루패스다. 내자리가 오프사이드일까? 공은 그대로 내 오른발로 날아들어왔다. 옆에 수비수들도 없다. 프리찬스다. 첫 트래핑이 나쁘지 않았다. 골문을 향해 한걸음 더 내딛었다. 선심의 기는 올라가지 않았다. 기회다. 지난 2006년 재활하던 때가 생각났다. 키퍼가 앞으로 전진했다. 생각보다 각이 없다. 골문이 좁아보인다. 인사이드로 찰까? 칩샷? 골키퍼 다리사이로? 뇌에서 전달된 지시가 근육을 타고 다리에 전달되는 느낌이 든다. 무릎과 발에 힘이 들어간다. 공이 떠버리진않을까? 키퍼의 오른쪽을 노렸다. '슛!' 발끝에 자불라니의 물렁함이 느껴진다. 아..하지만 느낌이 좋지않다. 발등이 아니다. 엄지 발가락 밑쪽으로 공이 감긴다. 공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미끄럽다! 내 발끝을 스친 공은 골키퍼의 팔 사이로 사라졌다. 들어간것인가가? 들어갈수 있을까? 젠장 공이 멈춰서버린다. 하늘이 하얗다. 수비가 사이드라인으로 차버린 공이 내 영혼처럼 느껴진다. 몸이 뜨거워졌다가 차갑게 식는다. 아무 생각도 들지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찬스 상황이 계속 머리속을 맴돈다. 갑자기 우루과이 선수들이 뛰쳐나간다. 지성이 주영이 청용이가 땅에 주저앉는다. 난 왜 여기 있는 것인가? 져버린것인가? 심판이 공을 잡는다. 끝이다. 끝나버렸다. 

하늘을 바라보니 비가 계속 내린다. 춥지도 덥지도 않다. 심장만 쿵쾅거린다. 눈에서 뜨거운 비가 내린다. 눈물이 빗방울과 섞여 내 발등에 떨어진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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