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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9금) 조선시대 트렌스젠더 사방지
게시물ID : history_223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0
조회수 : 6982회
댓글수 : 25개
등록시간 : 2015/08/07 20:20:02

 반음양인(半陰陽人) 사방지(舍方知, 謝方知)의 간통 사건

(외모는 여성인데 고추가 달린 사람 이야기)


□ 세조 8년(1462년 임오) 4월 27일.

세조 임금 시대. 평화로운 어느날.

장령(掌令, 사헌부 감찰 담당의 4품 관리. 요즘의 특수부 검사 정도) 신송주(申松舟, 신숙주의 동생 되시겠다.)가 한양 서부 여경방(餘慶坊)이라는 동네에서 발생한 사대부 집안의 엽기적인 간통 비스므리한 사건에 대해 세조 임금에게 아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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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생 지점인 여경방(餘慶坊, 붉은 원안. 여경방 정도의 위치면 지금으로 보면 강남 최고의 역세권임. 집주인이 돈이 아주 많다는 이야기가 됨.)

 

임금에게 보고된 내용은,
한양 서부(西部, 지금의 구청 정도)의 보고에 의거하여 여경방(餘慶坊)에 사는 고(故) 학생(學生, 평생 벼슬 없이 사망한 사람에게 붙이는 관작명) 김구석(金龜石, 혹은 김귀석)의 처(妻) 이씨(李氏)의 가인(家人, 몸종 혹은 청지기) 사방지(舍方知)가 여복(女服)을 하며 종적(蹤跡)이 괴이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본부(本部, 서부)에서 사방지를 잡아다가 옷을 벗겨봄. 사방지의 노비 호적에는 남자로 등록되어 있음.
사방지의 옷을 벗겨 보니 음경(陰莖)과 음낭(陰囊)이 제대로 달린 남자라는 것이 밝혀짐.
※ 사방지에 대한 이야기 중 사방지가 자웅동체-雌雄同體, 남성과 여성 성기를 모두 가진-라고 알려져 있으나 잘못된 사실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인용한 패관잡기(稗官雜記)의 기록에는,
(사방지는) 어릴 때부터 여복을 입고, 나이 40세가 되도록 사대부 집에 출입하다가 사실이 탄로되어 대간(臺諫)이 법대로 논죄하기를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기록에 "사방지는 불알이 항상 살속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을 검토해 보면 사방지는 이쁘게  생긴 남자인데 요즘으로 보면 트렌스젠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열하일기(熱河日記) 피서록(避暑錄)에는,
사방지라는 자는 사천(私賤) 계층의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여복(女服)을 가장하여 얼굴에 분과 기름을 단장하며 재봉을 배웠더니, 자라나서 조사(朝士)들의 집에 드나들곤 했다. 천순(天順) 7년(1463년) 봄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일을 풍문으로 듣고 체포하여 그가 평소에 간통하던 여보살에게 취조한즉, 보살은,
“그의 양도(陽道)가 유달리 큽니다.”한다. 이에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서 만져 보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도 번차례로 실험하며 보고는 모두 혀를 뽑으면서,
“에이, 대단하더구만.”
하였다.고 전한다. 여의 반덕이는 무슨 죄인가...

아무튼 당연히 남자 노비가 여장을 하고 양반집에 과부가 된 부인과 함께 있으니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을만한 사건이었음.
그런데 그냥 양반집도 아니라 상황이 좀 복잡하게 진행됨.
김구석(金龜石)의 처(妻) 이씨쪽 집안을 보면 벼슬도 못한 몰락한 양반가의 딸 정도로 보면 되는데 이 김구석의 아들 김유악이 하동군 정인지의 딸과 결혼한 상태임.  정인지의 아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세조 임금의 딸인 의숙공주와 혼인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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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건들면 세조 임금의 집권을 도운 공신뿐 아니라 세조 임금에게까지 아주 불명예스러운 느낌적인 느낌의 일이 발생하게 됨.
그런데 일단 사건 보고는 올라온 상태이고 또 세조 임금도 뭐 이런 인간이 있나? 정도의 호기심도 생겼으리라.
그리고 전날 세조 임금은 변방의 야인들과 술을 많이 마셔서 아직도 멜랑꼴랑하게 숙취가 남은 상태.
정인지의 아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에게 사돈집의 일이니 네가 조용조용 하게 조사 한번 해보라고 명함.

물론 사안의 중대성과 임금의 집안이 엮인 사건이므로 종친중에서 세종 대왕의 손자이며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 당시 19세)와 승지(承旨) 등도 함께 가서 살펴 보라고 함.
하성위 정현조가 사방지의 아랫도리를 벗겨보니 뜨!~~~~!악. 엄청나게 대물이었음.
실록 기록에는 "하성위가 역시 혀를 내두르며 ‘어쩌면 그렇게 장대하냐.’ 하였다"고 서술됨.

정현조가 사방지를 살펴 보니 처음 사건 보고가 올라온 서부의 조사내용과 동일함.
“이것은 이의(二儀)의 사람인데, 남자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 이의(二儀)라 함은 음양을 뜻한는 한자다. 외모는 여성인데 음경이 달려 있는 것이 확실한 모양이다.

세조 임금은 이씨(李氏)의 가비(家婢)이며 사방지의 어미인 소근 소사(小斤召史) 체포하여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사방지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집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곤장도 치고 그러면서 물어 봤는데 별소득은 없음.
여기서 또 한가지, 사방지와 추문을 만든 당사자인 김구석의 처 이씨(李氏)의 아버지는 지중추원사에 인수부 윤을 하고 있는 이순지(李純之)였음. 무슨 대역죄도 아니고 자꾸 들추어 내니까 세조가 아끼던 사람들이 자꾸 다칠것 같음.
※ 이순지(李純之) : 세종대왕 시절. 이공계 투톱 중에 한명은 장영실, 다른 한명은 이순지. 세종 대왕 시절 수학과 천문학 등에 뛰어난 공헌을 한 인물이다.

눈치 없게 사헌부의 관리들이 자꾸 사실을 끄집어 내고 여러 공신들과 고급 관료들 이름이 자꾸 나오자 성질난 임금이 조사 담당 관리들을 파직 시켜 버림. 조사관들이 무슨죄라고...
아무튼 저녁때가 되자 숙취가 좀 깨인 세조 임금이 승지(承旨) 등에게 묻기를 사방지(舍方知)를 가두어 국문(鞫問)이나 할까? 하고 은근슬쩍 화해의 메세지를 보냄.
아울러 과부가 된 딸을 제대로 간수 못한 이순지(李純之)는 조사는 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두라고 명함.


□ 4월 29일
의금부(義禁府)에서 어저께 임금이 약속한데로 사방지를 국문하자고 청함.
세조 임금, "어 그건 술이 좀 덜깨서 그랬던거고 내가 말한 국문 대상자는 사방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이씨(李氏) 집의 종인 소근 소사(小斤召史)를 지목한 것임. 사방지는 병자(病者)이니 건들지 말라." 라고 아몰랑 말을 바꿈.
신하들은 일제히 황당해 하지만 어제 파직된 사헌부 관리꼴이 되기 싫어서 일단은 아무말도 안함.


□ 5월 1일
사정전(思政殿)에서 여러 장수들과 승지(承旨)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품.
술이 몇 잔 들어간 세조 임금은 괜히 기분이 좋은가 봄. 도승지 홍응(洪應)을 불러 사헌부(司憲府)에서 사방지(舍方知)를 추국하려는 것을 막은 이유는 신하들이 너무 급하게 일을 진행 하기 때문에 그랬다고 함. 
좀 있다가 사방지를 국문하자고 약속해줌.


□ 5월 2일
일단 파직된 사헌부(司憲府)의 관리(官吏)를 국문(鞫問)하여 사방지의 간통사건을 어떤 경로로 알았는지 조사함.
지금 사방지 조사를 해야지 사헌부 관리는 왜 조사함? 뭐 여기서도 관원들 끼리 말이 맞지 않거나 하면 임금은 또 이 사람들만 처벌하고 사건 자체를 덮어 버리려고 한듯함.
일단 사건 인지 경위는 지평(持平) 성율(成慄) 김석손(金石孫)에게 들었고, 김석손 윤우(尹遇)에게서 들었으며, 윤우(尹遇) 중비(仲非)에게 들었다고 함. 
여기서 지평(持平) 성율(成慄)은 정5품으로 사헌부의 실무 조사요원임. 지금의 대검찰청 검사 정도. 김석손(金石孫)은 뭐 하던 인물인지는 안나옴. 윤우(尹遇)는 직급은 말단이나 좌익원종3등공신(佐翼原從三等功臣)이었음.
중비(仲非)는 김중렴(金仲廉)이란 하급관리의 계집종이었는데 어떤 연유로 해서 비구니가 되었 있음.
아무튼 사건인지 단계에서는 하자가 없음. 그러나 신체구조가 정말 특이한 여장남자 + 대가집 과부딸의 간통 + 비구니까지...
이렇게 되니까 요즘이라고 해도 구미가 당기는 기삿거리가 됨. 

지금까지의 사방지 사건에 대한의 조사 결과
사방지는 턱수염[鬚]이 없어 모양이 여자와 같은데다가 재봉(裁縫)을 잘하여 여자 옷을 입고 다녔는데 원래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사노비였는데 어릴때 부터 행색이 괴이한ㄴ 것을 눈치챈 안맹담이 문제의 근원인 사방지를 절로 보내 버렸나 봄. 
※ 안맹담은 세종 임금이 총애하던 딸인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남편임. 세조 임금과는 처남매부 지간 되겠음.

이후 사방지는 절에 놀러 온 내시 김연(金衍)의 처(妻)와 간통하였고 또 여승[尼僧] 중비(仲非)와 지원(智遠), 소녀(小女) 등과도 간통함. 절에 놀러 온 사족(士族)이든 비구니든 닥치는데로 부녀자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으니 당연히 건수도 많았을터. 
여자 중 중비와 김구남의 처 이씨(李氏)는 이웃에 살았는데 사방지(舍方知)는 또 이런 인연으로 이씨(李氏)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마침내 사방지의 본색이 들어나고 또 일찍 과부가 된 이씨와 눈이 맞게 되었다고 함.
과부 이씨는 사방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가까이 하여 항상 사방지를 곁에 두고 음식도 그릇을 같이 하고, 앉고 눕는데도 자리를 같이 하며 의복(衣服)도 빛깔을 같이하니 모두 사치스럽고 화려하기가 극도에 달하였다고 함.
과부 이씨 집안의 노비(奴婢)가 사방지 섬기기를 집 주인과 같이 하였고여, 이웃 마을에서 비록 알더라도 이씨(李氏)는 달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추잡한 소리가 퍼지어 결국 수사첩보망에 걸려 사건이 벌어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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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작 영화 사방지임.)

세조 임금은 최대한 빨리 사건을 덮어야 더이상 불명예스러운 정권이 되지 않는것을 알고 있음.
임금이 중비(仲非)도 아울러 국문(鞫問)하고 이순지(李純之)를 파직(罷職)하게 함. 
다만 사방지 사노비이므로 이순지에게 도로 돌려 주라고 명함. 엥?
원래 조선시대에 이런 사건에 연루된 부녀자의 경우 가장 빨리 사건이 수습되는 방법은 그 부녀자가 없어지면 됨.
자살 하거나 아니면 명예살인 같은 방법으로 입을 닫게 되면 그걸로 전부 수습이 되는게 관례임.
세조 임금이 사방지를 더 이상 신문하다 보면 연루된 사람이 더 많이 나올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순지에게 사방지를 넘겨 버림. 자기 딸과 간통을 한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이상한 천한 노비이므로 이순지가 마음만 먹었다면 영원히 입을 닫게 하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또 세조 임금도 그걸 바라는 거였음.

 
□ 많은 탄핵기관에서 지속적으로 수사해서 관련자들을 다 잡아 들여야 한다고 난리남.
또 사건의 핵심인 사방지는 공식적으로 이순지 집으로 석방? 된 것이니 난리가 날수 밖에...
체면 구긴 세조 임금은 자기 사위인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를 붙잡고 간통 현장을 잡은 것도 아닌데 함부로 국문하는게 어딨냐고? 또 사방지 어미가 사방지가 그런짓 하고 다닐줄 알고 여자옷 입혔냐고... 또 저번에 내가 공신 책봉하면서 중죄 말고는 사면 했는데 왜 그전의 일을 끄집어 내서 지랄들을 하는지... 하고 넋두리를 해댐.


□ 5월 12일
시간은 조금 흘렀고 대간들의 탄핵은 좀 수그러 들었을 때 세조 임금은 정난공신인 이순지를 딸자식 단속 잘못했다고 계속 버려두기가 미안했던 모양임. 이순지의 복직(復職)을 명함.


□ 5월 13일
사방지가 석방된 지 열흘이 더 지났는데 이순지는 복직되었고 사방지의 자살 소식은 들려오지 않음.
정말 세조 임금 체면 안 세워 주는구나...
사헌부 장령(掌令) 이문환(李文煥)이 이 상황을 임금에게 따지고 든다.
"아니 사방지를 석방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시면 결국 서로가 원하던 모양이 아니되지 않습니까? 사방지를 죽이지 않을 거면 멀리 외방에 유배라도 보냅시다.!!!"
세조 임금, 이를 갈았을 것 같음. " 이순지 이 생퀴, 참 눈치도 없구나..." 역시 공대출신 남자라 그런지 이런 분위기에서 눈치가 없는듯함.
세조 임금은 석방했는데 뭘 또 외방으로 유배냐고 얼버무리고 이야기는 일단 끝이 남.


□ 5월 14일
지속적으로 사방지를 조사하자던 정언(正言) 이길보(李吉甫)는 다시 세조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어 이를 무슨죄, 무슨죄로 국문하도록 하라고 명함.(그런데 이럴때 죄목은 뭔지?)
빡친 세조 임금이 말 끝에 "그러나 김구석의 처는 중추(中樞) 이순지(李純之)의 딸이고,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와는 사돈집이다.” 좀 알고나 떠들어라 (시발~). 이순지 못잃어. 정인지 못잃어를 시전하시는 세조 임금.
 

□ 5월 22일
시간이 또 흘렀음. 임금이나 신하들이나 다시 화해하려는데 명분은 없고 서로 눈치만 까는 중.
하는 수 없이 아침 조회 후 임금이 술상을 봐오라고 명함.
먼저 세조의 잠저(임금이 되기전 젊은 시절) 시절부터 그의 심복이었던 좌의정(左議政) 권남(權擥)이 술을 얼큰하게 취한 임금을 좋은 말로 살살 어르고 달리니 임금이 노여움이 많이 풀렸음. 다음날 갇혀 있던 신하들 전부 석방하라고 명함.
물론 이 술자리에서도 임금은 이순지가 사방지를 처단해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고 다른 신하들은 이순지가 착해서 그런 일은 벌이지 못하리라고 단언함.

사건은 일단락되었는데 결국 이순지는 사방지의 입을 다물게 하지 못하고 세조 11년(1465년 을유)에 죽음.
그의 졸기(卒記)에 보면 "만년(晩年)에 그의 딸 김귀석(金龜石)의 아내는 사노(私奴) 사방지(舍方知)와 간통하고, 항상 여복(女服)을 입혀 여러 비녀(婢女) 속에 나란히 있게 하였다가 함께 동침(同寢)하여 대관(臺官)이 탄핵하게 되었으나, 임금이 추구하여 치죄하지 않고 드디어 사방지(舍方知) 이순지에게 부쳤는데, 이순지는 잘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일을 송사하니, 사람이 모두 비루하게 여기었다."로 기록되어 버림.
 

□ 세조 13년(1467년 정해) 4월 5일
세조 8년. 사방지는 이순지에게로 보내졌음. 
이순지가 "엄호(掩護)하여 징치(懲治)하지 아니하고" 시골집[村莊]에 그냥 풀어둠.
이 소식을 들은 김구남의 처 이씨(李氏)는 친척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온천(溫泉)에 목욕하러 가다고는 사방지를 만나러 가기도 함.
마침내 이순지가 죽자 뭐라 그럴 사람도 없으니 사방지는 다시 이씨(李氏)의 집으로 복귀.
이제 명예살인권을 가지고 있던 이순지도 없으니 다시 한번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을 예감한 한명회(韓明澮)가 먼저 임금에게 알려줌. 
사방지(舍方知)는 다시 이씨(李氏)의 집에 날뛰기 시작하니 이제 진짜로 먼 지방으로 유배(流配) 좀 보냅시다.”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어봄.
신숙주(申叔舟) 심회(沈澮), 홍윤성(洪允成), 서거정(徐居正) 등이 강력하게 사방지의 처벌, 혹은 그냥 죽이자고 청함.
여론을 인식한 세조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윤필상(尹弼商)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인류(人類)가 아니다. 마땅히 모든 원예(遠裔)와 떨어지고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외방(外方)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
 

□ 4월 6일
자. 의견이 모아졌으니 이런 입에 담기도 힘든 더러운 사건은 빨리 종결 지어야 하는 것이 조선의 사대부임.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사방지(舍方知) 신창현(新昌縣, 충남 아산 근방)의 관노비로 소속시키게 하고 또 그 고을의 수령 이하 모든 사람들이 잘 감시하지 않으면 고을을 싹 뭉게버리겠다고 어름장을 놓음.
또한 사노(私奴) 사방지(舍方知)를 이제 관노비로 바꿨으니 주인인 이순지 가족에게 노비 한 명을 바꿔주는 섬세함도 잊지 않는 세조 임금.


□ 성종 4년(1473년 계사) 11월 8일
김구남의 처 이씨의 아들 김유악(金由岳)이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의 벼슬을 받았는데 관찰사 다음의 자리인 도사 자리에 어미가 간통한 사람을 제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신하들이 반발함.
다음날 현명한 우리의 성종 대왕은 사방지 사건이 어릴때 발생한 일이라 무슨 내용인지 잘 몰라 한명회에게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지 똑바로 이야기해보라고 함.
한명회가 사방지와 이씨의 사건을 감칠맛 나게 이야기해 줌.
영사 김질(金礩)이 옆에서 추임새도 넣어 주면서...
성종 임금은 항상 원인과 결과를 잘 따지는 현명한 스타일임.
이 이야기를 들은 성종 임금은 버럭 하시며,
세조 임금, 즉 자기 할아버지가 사방지를 관노(官奴)로 정속(定屬) 시켰다면, 사방지가 확실하게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거시고 할아버지가 그를 남자로 결론 낸 것이 명확하다고 하며 김유악을 도사 후보에서 제외 시켜버렸음.
 

□ 연산 6년(1500년 경신) 2월 12일
연산군이 부마를 고를 때 더러운 어미의 손자라 하여 김유악(金惟岳)의 아들은 아예 후보 명단에도 없고 얼쩡 거리지도 말라고 함.


※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에도 음양이 다 갖추어진 인괴(人傀) 인아(人痾)이다. 가 있으니, 점필재(佔畢齋)의 문집(文集)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점필재 김공 종직(金公宗直)의 문집 가운데 사방지(舍方知)의 일을 실어 놓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방지는 사천(私賤)이다. 그는 음양(陰陽)을 구비하였으므로, 어릴 때부터 그의 어미가 여아(女兒)의 옷을 만들어 입히고, 따라서 연지 찍고 분 바르는 것과 옷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그가 자라서는 자못 조사(朝士)의 집에 출입(出入)하면서 많은 여시(女侍)들과 정(情)을 통하였다. 사인 (士人) 김구석(金九石)의 아내 이씨(李氏)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순지(李純之)의 딸이다. 그가 과부(寡婦)로 있으면서 사방지를 데려다 놓고는 옷을 깁는 일을 청탁하여 주야로 그와 함께 거처해온 지 거의 10여 년이 되었다.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7년(1463, 세조 9) 봄에 헌사(憲司)가 그 내막을 듣고 국문(鞠問)을 하면서, 사방지가 본래부터 정을 통해 왔던 한 비구니(比丘尼)를 신문한 결과 그 비구니가 말하기를 ‘양물(陽物)이 매우 장대하였습니다.’ 하므로,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 그의 양물을 만져보게 한 결과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자 상(上)이 승정원(承政院) 및 영순군 보(永順君溥)ㆍ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으로 하여금 여러모로 조사하도록 하였다. 하성위의 누이[妹]가 이씨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하성위도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양물(陽物)이 어쩌면 그렇게도 장대한가.’ 하였다. 그러자 상이 웃으면서 특별히 추문(推問)하지 못하게 하고 이르기를 ‘이순지(李純之)의 가문(家門)을 오멸시킬까 염려되니, 사방지와 이순지를 구처(區處 따로따로 처치함)하되, 이순지는 장(杖) 10여 대만 치고 사방지는 기내(畿內)의 노복(奴僕) 집으로 보내라.’ 하였다. 이윽고 이씨가 다시 은밀히 사방지를 불러들였고, 순지가 죽은 뒤에는 더욱 방자하여 마지않았다. 금년 봄에 재신(宰臣)이 연회(宴會)를 인하여 상께 그 내막을 아뢰어, 사방지를 신창현(新昌縣)에 장배(杖配)하였다. -고 전한다.
출처 출전과 출처는 조선왕조실록과 고전번역원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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