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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단호박수프
게시물ID : freeboard_10162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닉언
추천 : 0
조회수 : 1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8/09 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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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박수프

짝-

 "실망이야. 네가 이정도로 쓰레기일 줄은 몰랐어. 이제 우린 끝이야."

 볼의 얼얼한 통증도 잊어버린채,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였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어떻게 해야 되돌릴 수 있을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부질없는 생각들이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녀는 '나'를 떠나갔다. 그거로 끝인 것이다. 사랑? 글쎄. 그녀를 사랑하긴 한 것일까?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돌린다.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볍다. 아마 남들이 봤을때 여자와 헤어졌다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시장에 들렀다. 사람냄새가 풍기는 재래시장. '나'는 예전부터 재래시장을 좋아했다. 딱히 마트보다 싼것도, 품질이 좋은것도 아니지만, 이곳에는 '낭만'이 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왠지 사람이 많다. 한 구석에 채소를 팔고 있는 곳이 보인다. 초록색의 못생긴 단호박이 싸다. 저 속에는 밝은 주황빛의 살이 있겠지. 그러고 보니 오늘 '그녀'도 주황색 옷을 입고 왔었다. 호박을 두 통 사기로 했다.

 "잘 산거야 총각. 날이 가물어서 그런지, 호박이 아주 달어."

 "하하. 그런가요?"

 호박을 들고 집으로 간다. 혼자밖에 없는 집. 왠지 더욱 아늑하게 느껴진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훌쩍 넘어있다. 왠지 담박하고 달큰한것을 먹고 싶어졌다. 마침 호박도 있겠다, 호박죽을 끓일까 생각한다. 쌀가루가 있던가. 부엌을 뒤져보니 쌀가루는 커녕 레토르트 밥조차도 없다. 냉장고를 열어본다. 우유와 감자, 양파가 있다. 이거면 충분하다. 슬쩍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잘 지어지지 않았다. 

 요리를 할 시간이다. 오늘의 주 재료는 호박. 그래. 그렇게 정했다. 사온 단호박중 하나를 깨끗이 씻고 반으로 자른 후, 씨앗을 빼낸다. 속이 비어있다. 멍하게 바라본다. 비어있는 속. 그래. 호박은 씨앗을 빼내야지. 속을 비워야지. 속을 빼낸 씨앗을 몇번 더 칼질해서 8등분으로 만든다. 그리고 찜통에 넣고 찌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속이 비어있는 호박을 생각하고 있었다.

 양파를 다지고, 버터에 볶는다. 양파를 볶을때는 갈색 카라멜처럼 될때까지 볶아줘야 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 충분히 볶아줘야 그 깊고 오묘한 맛이 살아난다. 양파를 볶는 냄새가 집안에 퍼진다. 그러고보니, '그녀'에게 해주었던 첫번째 요리가 양파수프였지... '그녀'는 분명히 감기때문에 골골거리고 있었고, '그녀'의 집에서 병간호를 하며 해주었던 음식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양파를 볶았었지. 상념에 잠긴채 양파를 계속 볶았다. 어느새 양파는 갈색으로 변해있었고, 볶아진 양파는 냄비속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호박이 다 쪄졌다. 감자를 씼고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호박의 껍질을 숟가락으로 파내고, 노란 속살만을 감자와 우유를 넣고 믹서기에 갈아버린다. 흰색 우유와 감자, 노란 호박이 섞이며 걸쭉하게 변했다. 냄비에 붓고, 우유를 더 넣는다. 불을 올린다. 약한 불에 뭉근히. 그래. 그렇게. 뜨겁고 열정적으로 불태워 봐야 남는것은 냄비 가에 달라붙은 찌꺼기 뿐일거야. 천천히, 꾸준하게 수프를 저어준다.
 
 약한 불이라도 불은 불인것인지 얼굴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온 얼굴에 흐르는 땀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진다. 소금은 넣고 싶지 않아. 실없는 생각을 하고 손등으로 땀을 닦아낸다. 여전히 땀은 흐른다. 쉬이익 하는 가스레인지 소리만이 집안에 울리고 있었다.

 단호박 수프가 다 끓었다. 담박하고 달콤하다. 설탕도, 소금도 넣지 않았다. 오로지 양파와 우유, 호박, 버터만을 넣었을 뿐. 국자로 수프를 퍼 담는다. 내 자리에 한그릇, 내 자리 앞에 한 그릇. 숫가락을 들고 단호박 수프를 떠 먹는다. 따뜻하고, 달콤하고, 포근하다. 여전히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시야가 흐릿하다. 정신없이 수프를 퍼먹는다. 그릇에 담긴 수프가 바닥을 보였다. 내 자리 앞에 있는 그릇의 수프는 전혀 줄지 않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턱에서 수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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