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792년 9월 20일 입법의회가 종료되고 국민공회가 시작되었다. 국민공회는 앞의 입법의회와는 달리 보통투표로 뽑혔다. 입법의회가 전쟁을 비롯한 뻘짓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보통투표 요구를 도저히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입법의회가 보통투표를 거절하고 유산자에게만 투표권을 준 것에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비밀투표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보통투표를 하면 옛 귀족이나 대부르주아들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용주에게 투표를 하게 되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투표자들에게도 피해가 간다는 것이 보통선거를 거부하게된 논리였다. 즉 대재벌들 때문에 부자들의 올바른(?) 참정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오옷. 그럴싸해!) ......장난하냣!!!!! 부자들 간의 공정한 리그를 위해서 민중을 배제하겠다는 소리다.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이 입법의회였었고, 또 그랬기에 입법의회와 내각이 혁명전쟁을 일으킨 것도, 8월 10일 날 그렇게 행동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부자들만의 리그의 행각에 지긋지긋해진 민중은 강력하게 보통투표를 요구하여 관철시키기에 이른다. 그런다고 반드시 자신들을 위한 대표자들만이 뽑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들을 ‘위하는 척’이라도 하는 대표자들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국민공회는 시작부터 많은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첫 날 있었던 발미 전투로 연합군의 파리 진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결정적인 승리도 아니었고 연합군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3백여 명의 사상자를 낸 패배가 머 그리 큰 패배라고 연합군이 꼬리를 말고 도망가겠는가?
하지만 기세등등해진 우리의 국민공회, 승리한 바로 다음날 전쟁의 원흉(?)인 왕정을 폐지시켜버린다.(어이! 전쟁은 너희가 일으켰잔아!!!) 파리 시민들은 그걸 또 환호한다.(판단 좀 하고 살아라.)
장 폴 마라
죽은 모습인데 엄청 섹시하게 그려놨다. 하지만 죽기전의 그는 심각한 피부병상태였었다고 한다.
잠깐 이야기를 거슬러 8월 10일의 사건을 계기로 파리에선 시민들 사이에서 자생 자치단체인 코뮨이 등장한다. 공식적인 정부기관과는 별개로 시민들의 비공식 자치단체를 만들었는데 러시아의 소비에트, 한국의 집강소도 이거랑 비슷한 거였다.
이 코뮨은 정식 정부는 아니었지만 대중 동원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었다. 보통 같은 동네사람들끼리 만들고 다시 옆 동네들이랑 연계하는 식이었으니 한 군데 잘못 건들면 다른 곳까지 우르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권력자들로썬 겁나 골아픈 집단이 생긴 것이다.
보통투표를 요구할 때 효과적으로 압력을 넣을 수 있었던 것도 코뮨이 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왕정이 폐지되는 데에도 이 코뮨의 압력이 컸다. 왕정폐지에 대한 찬반투표를 한다는 소식을 듣자 코뮨의 시민들이 창칼을 들고 회의장 안으로 난입해 들어와서는 의원들의 투표장면을 참관(?)했던 것이다.(이게 투표야?ㅡㅡ;;;) 이 후에도 국민공회시대 내내 코뮨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사실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입법의회가 벌인 일이었지만 후임인 국민공회는 전쟁의 책임을 국왕에게 돌리며 왕정을 폐지해버렸다. 또 다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전에는 아직 판결도 나지 않은 반혁명혐의자들을, 이번엔 국왕을...
10월에는 보안위원회가 생겼다. 보안위원회는 이미 운영되고 있는 혁명재판소, 다음해에 설립될 공안위원회와 같이 공포정치의 중심이 되는 기관이다.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이 이러한 기관이 생긴다는 것은 사회적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져감을 알려준다. 알아서 기어라. 이 X신들아.(ㅎㄷㄷ)
한편 발미에서 쥐꼬리만한 승리를 거두었던 프랑스는 그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 질에서 떨어지니 닥치고 물량전이다. 10만도 채 안 되는 연합군을 상대로 30만의 물량을 퍼부었다. 결국 적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프랑스가 다시 공격 측이 되었다.(물량의 힘은 위대하다.)
승세를 타자 우쭐해진 프랑스 여기저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혁명을 전파하겠답시고 난데없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공격해서 점령해버렸다.(민주주의를 전파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깡패국가랑 닮았다고 생각한다면 독자들의 착각일 것이다. 아마도...)
엉뚱하게도(?) 벨기에(1792년 11월)와 네덜란드(1793년 2월)를 점령해버린 프랑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혁명가들은 처음에는 기뻐하며 해방 때의 한국 사람들이 미군을 반기듯 프랑스군을 반겼다. 프랑스군이 왕의 압제를 몰아내고 자유, 평등. 우애를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걸. 프랑스의 속셈은 따로 있었으니 프랑스군은 이 두 나라를 먹잇감 삼아 엉망이된 자국의 경제상황을 조금이나마 해소해보려 했다. 방위비분담금(?)이란 명목으로 전쟁비용을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떠넘겨 버렸던 것이다. 30만 명을 먹고 재우는 일을 떠맡은 두 나라는 죽을 맛이었다. 덤으로 혁명에 대한 지원금이랍시고 이래저래 삥뜯기다 보니 등골이 부서질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혁명에 대한 회의감을 넘어 분노가 일어난다. 결국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반혁명으로 돌아서서 프랑스에 대해 반기를 들게 된다. 이때 발미 전투의 영웅이었던 뒤무리에 장군이 네덜란드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진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자, 책임 추궁이 겁나서 쿠데타 시도, 그 역시 실패. 결국 적국인 오스트리아로 도망가서는 왕당파로 변절한다.(머 저런 놈이 다 있어? ㅡㅡ;;;) 사람들은 영웅을 바라지만 영웅은 그저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 뿐 현실은 시궁창이다.
샤를 뒤무리에
발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네덜란드 원정실패, 쿠데타 시도,
왕당파로의 변절 등등 온갖 추태를 다보여 주었다. 영웅이란 이런 거다.
11.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자. 연합군을 국경밖으로 밀어내고 벨기에를 합병할 즈음 루이 16세에겐 시쳇말로 정말로 'X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루이 16세가 8월 10일까지 파리에서 살던 곳은 튈르리 궁전이다. 11월 20일 그 튈르리 궁전에서 비밀금고가 발견된다.
비밀금고 속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이 아니라 비밀문서와 편지들이 숨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들은 왕당파들이 반혁명을 기도했음을 증명해주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루이 16세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루이 16세 역시 반혁명을 지지했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되었다.
이른바 '철제장롱사건'이었다. 왕당파들은 대거 외국으로 달아나고 루이 16세만 혼자 남아 혁명의 적이 되어 그 처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이런...정말 X 됐군.)
어느새 부터인가 ‘혁명’이라는 말은 무슨 신주단지라도 되는 마냥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혁명을 위해서 국민의 희생을 당연한 듯이 요구하게 되었고 혁명에 대한 반대는 반역과 동일시되었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명시한 프랑스 인권선언 제 11조의 정신은 실종되고 편협한 반공, 아니 혁명 이데올로기만 남았다. 혁명은 인간을 위해 하는 것이지 인간을 옭아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닐진대 말이다.
어쨌든 혁명의 반대자들은 자신의 고국에서 쫓겨났다. 뿐만 아니라 혁명에 대한 건전한 비판 또한 점점 설자리를 잃어갔다. 온건파들 역시 반혁명파로 매도되어갔으며, 비판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점차 공포정치의 시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도 그렇지 않았던가? 독재와 반공의 시대에 건전한 비판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고 지금도 권력은 우리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말이다.
사상의 통제는 강력해져가고 철제장롱사건으로 왕당파는 대거 숙청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루이 16세의 책임을 어떻게 묻느냐를 두고 의회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미 왕정이 폐지된 상황에서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지롱드파와 국가반역죄로 사형을 시켜야한다는 자코뱅당이 맞섰다.
하지만 분위기와 명분에서 지롱드가 압도적으로 밀렸다. 특히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를 죽이지 않는 것은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며 루이 16세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철제장롱사건에도 불구 많은 의원들이 여전히 왕을 죽인다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는데 특히 시골출신 지역구 의원들이 그랬다. 시골출신 지역구 의원들 중엔 파리의 정치적 격변은 그다지 실감하지 못하는 구닥다리(?) 혁명가들이 꽤 많았다.
안되겠다 싶었던 자코뱅당은 특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투표를 간신히 가결시켰는데(721표중 378표) 왕정폐지 때처럼 코뮨의 시민들을 투표에 참관시켰던 것이다. 점점 의회가 대화를 통한 논쟁의 마당이 아니라 무력에 의한 협박의 마당으로 변하고 있었다.
혁명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 루이 16세를 죽여야한다고 했던 로베스피에르는 개인적으로 루이 16세에게 유감을 좀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의 대관식 때 왕을 위한 축시를 낭독하는 학생이었는데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기다렸다. 그렇게 읽은 시가 마음에 안들었던지 루이 16세 격려 한 마디 없이 생까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상처받은 어린 영혼(?) 로베스피에르. 기분이 많이 더러웠던 모양이다. 이래서 사람은 어디서 원한사지 않게 조심해야한다. 언제 어디서 뒤통수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공포정치의 대명사이며 얄궃게도 이성주의를 열렬히 추종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국왕의 사형투표 가결로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3일 단두대에서 저승행을 한다. 루이 16세는 왕으로써는 뻘짓을 많이 했지만 멍청이도 아니었고 인격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는데도 왕당파들이 남아있었으며 바렌느사건 때에도 앙트와네트의 애인들은 도망갔지만 자신의 신하들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대부분 단두대행을 한다. 사형투표 때에도 코뮨의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위협하는 공포 분위기에도 불구 절반에 가까운 의원들이 그를 위해 반대표를 던졌다. 결론만 말하자면 왕으로썬 실패했지만 인간으로썬 나름 성공한 사람이었다.
왕이 사형되자 그 파장은 엄청났다. 설마설마 했는데 결국 사형시켰으니 얼마나 쇼킹했겠는가? 국민공회도 이를 알고 있었고 그 상황을 전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또 전쟁이야?) 공세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기 위해 국민공회는 루이 16세를 죽이기도 전에 일찌감치 새해맞이(?) 기념으로 군사위원회를 발족(1793년 1월 1일)시켜 전쟁을 독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점점 막가는 프랑스의 행보에 유럽각국은 대동단결하였다. 지금까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같은 몇몇 나라만이 프랑스와 싸웠지만 이젠 달랐다. 프랑스 혁명에 우호적이던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대(對)프랑스 동맹에 참가하지 않던 영국이 프랑스 대사를 추방해버리고는 전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눈치만 보던 이탈리아의 샤르데냐, 양 시칠리아 왕국도 참가했다. 에스파냐도 참가하여 프랑스는 말 그대로 포위당했다.
심지어 혈맹이라 믿었던 미국도 중립으로 한 발 내뺐다. 이때 미국의 배신은 실질적인 타격은 별로 없었지만 정신적인 크리티컬(?)이 컸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정작 그 크리티컬 대미지를 입은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미국인들이었다는 점이다. 혈맹을 배신했다며 정부규탄시위가 열렸고 결국 외교관들이 해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작 프랑스인들은 별로 신경도 안 쓰는데 말이다.(ㅡㅡ;;;) 머랄까 먼 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가 않아서 기분이 묘하다.
외부로부터만 위기가 닥쳐온 것이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의 지방에선 아직도 반(反)혁명용의자 학살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 전이었다. 반혁명용의자 중 많은 이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했던 성직자들이었음은 지난화에서 이야기하였다. 지방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존경하는 신부님들이 파리에 반혁명용의자라는 명목으로 잡혀갔다가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쇼크를 받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지 불과 석달만에 이번엔 자신들의 어버이와도 같은 존재인 임금님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골사람들에겐 바렌느사건은 뭔지 철제장롱사건은 무엇인지 자기들이 알 바 아니었다. 애당초 무식쟁이였던 그들은 혁명이 먼지도 잘 몰랐다. 신부님이 하자고 하길래 했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이 파리에 갔다가 살해당하고 임금님까지 시해당했다. 그들에 입장에선 이쪽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곳곳에서 반혁명반란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방데(3월)와 툴롱(7월)의 반란이다. 정부는 방데에서 진압을 위해 반란군이든 민간인이든 무차별학살을 하였다.(또 학살이야?ㅜㅜ) 20만 명을 학살했다고 집계하는 사람도 있고 40만 명을 학살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후 정부군은 다른 곳에서도 반란을 진압하며 무차별 학살을 계속 감행하였다. 학살 때문에 일어난 일을 학살로 해결한 것이다.(대책없는 인간들...ㅡㅡ)
툴롱의 반란은 더욱 골치 아팠다. 방데에서 무차별 학살을 하자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반란군이 영국군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판사판이 된 것이다. 영국군까지 가세한 반란군에게 정부군은 오랫동안 고전한 뒤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1793년 12월) 피로 피를 씻은 악순환의 결과였다.
툴롱항 전투의 승리로 전국적인 반혁명반란은 일단락되었으나 동존상잔의 비극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프랑스는 겉으로는 재통합된 것 같았지만 혁명파와 반혁명파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였다. 우리가 6.25를 겪으면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툴롱항 전투는 한 명의 영웅을 탄생시켰으니 미래의 독재자 나폴레옹이었다. 소령에서 한 방에 장군이 된다. 당시 프랑스는 내우외환으로 떨어져버린 국민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다. 장군되기 참 쉽죠?(ㅡㅡ;;;)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의 화려한 전적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M자형 탈모가...
12.
파리의 국민공회 이야기로 돌아가자. 루이 16세의 사형이 논의되는 동안 의회에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당통을 우두머리로한 군사위원회가 설립되어 1월 1일부터 발족되었다. 군사위원회는 공안위원회의 전신으로 사실상 국가최고통치기구였지만 뻘짓을 많이 하여 설립 4달 만에 공안위원회로 개편(?)당한다.(ㅉㅉ) 전국 곳곳이 반혁명반란 이예요. 무리하게 추진된 네덜란드 원정은 실패했어요. 예전 발미의 영웅이었던 뒤무리에 장군은 의회를 위협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해서는 적국으로 도망가 변절해버리기까지 하니 개편당할 만도 했다.
새로이 등장한 공안위원회도 처음에는 영 신통치 않았다.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일부 생필품에 물가상한선을 정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래도 별로 효과가 없자. 6월 당통은 또 다시 비겁한 수단을 쓴다.
이번의 희생양은 지롱드파였다. 부유한 자들의 농간 때문에 민중의 삶이 어렵다고 코뮨의 시민들을 선동하여 지롱드파를 체포, 단두대로 보낸다. 이에 그라쿠스 바뵈프는 줄곧 부유한 자들의 모임인 지롱드를 비판해 왔지만 민중을 기만한 자코뱅의 정치적 농간 또한 비난하였다.
지롱드를 제거하고 독재권력을 장악한 자코뱅. 하지만 보복테러를 당하는데 그 다음달인 7월 13일에 당통,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자코뱅당의 지도자였던 마라가 암살된다. 지롱드파 지지자의 복수였다. 거물 정치인의 피살은 프랑스 정치판에 큰 변화를 몰고 왔으니. “당통 너 머하고 있었냐?”, “걍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당통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실각하고 만다. 인사개편이 이루어진 공안위원회의 새로운 우두머리는 루이 16세에게 유감이 많았던 사나이 로베스피에르였다. 테러의 어원이 되는(프랑스어 la Terreur에서 유래하였다.)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로베스피에르라고 하면 공포정치와 함께 덕치(?)로 유명하다. “공포 없는 덕치는 생각할 수 없다.” 라나?(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째서 이런 미친 소리가 나돌게 되었는지 필자는 이해가 안간다. 프랑스어 사전의 vertu의 의미를 보면 또 다른 의미로써 힘을 의미한다. 힘과 공포로 찍어누르는 통치를 하겠다는 소리다.(다카키 장군님이랑 전 장군님 생각나네)
근데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책들을 보면 온갖 괴이한 해석들이 다있다. 공포는 덕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에서부터 그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의견까지... 다 헛소리다. 원래의 뜻은 '국가위기상황(언제는 안그랬나?)이니 닥치고 내 말 들어라. 안 그럼 가만두지 않겠다.' 이 정도 의미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집권하자 모든 걸 전시상황으로 바꾸었다. 물가상한선 품목을 확대하고, 일시적이었던 전국민징병을 아예 법으로 못박아버렸다. 계속 전쟁을 하겠다는 소리다. 툴롱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한 번 더 뜨고 싶었던 차에 이런 권력자의 마음을 재빠르게 캐치했다.
예전부터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트 로베스피에르랑 형님 동생하면서 지내며 기회를 노리다가 이번기회에 이탈리아 원정계획을 찌른다. 덕분에 이탈리아 국가들(당시 이탈리아는 통일되어있지 않았다.)과의 전쟁도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이 좀 더 오래갔다면 나폴레옹은 그 끈을 잡아 출세하다가 로베스피에르랑 같이 저 세상 같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독재자의 싹도 미리미리 잘렸으련만... 쩝;;;
10월에는 앙트와네트도 남편 보러 저 세상 간다.(제발 저 세상에선 막장드라마 찍지는 말기를...) 앙트와네트만 죽은 것이 아니다. 지롱드파의 리더격 브리소(10월), 바렌느 때 루이 16세를 끝까지 따랐던 바르나브(11월), 지롱드파의 마담 롤랑부인(11월), 파리시장이었던 바이이(11월), 화학자 라부아지에(4월) 등등 왕당파들을 비롯해서 지롱드파, 심지어 정치적으로 무관한 사람들까지 줄줄이 저승행을 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말처럼 사람들이 잊을만 하면 목 잘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툴롱포위전
외세까지 끌어들인 내전은 언제나 깊고 잔혹한 상처를 남긴다.
여기서 멀리 대서양으로 가보자. 3편에 잠깐 언급한 아이티는 어떻게 되었을까? 8월 아이티의 반란진압상황을 확인하기위해 파견된 국민공회의원 손토냐는 당시 아이티혁명의 상황을 보고 '이거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노예해방을 선언해버렸다.
그리고 귀국해서는 'ㅆㅂ 누구 맘대로? 엉?!' 쌍욕을 얻어 먹었다. 노예가 아닌 유색인종까지는 형제로 대해 줄 생각을 했지만 노예제까지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프랑스인들이었다.
그런데 아이티로 영국과 에스파냐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프랑스인들도 결국 두 손 다 들었다. '적국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노예를 포기하고 말지.' 안 그래도 영국보다 해군이 딸려서 불리한데 반란까지 일어나면 식민지를 도저히 지켜낼 자신이 없었던 프랑스. 속 보이게도 영국군에게 코르시카를 점거당한지 약 보름 후인 1794년 2월 4일 프랑스는 아이티를 비롯한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포기한다.(ㅉㅉ)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 제대로 망신당하고 지지도가 폭락했다. 이에 쿠통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생각해낸다. 그 방법인 즉슨 반혁명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인기정책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지도가 다시 오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789년 2월 26일 방토즈 법이 통과되었다. 그렇게 민중을 우롱하며 권력을 지켰다.
조르주 쿠통
방토즈 법안을 생각해낸 인물이다. 통과만 되고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정책들은 부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프랑스 혁명의 거의 모든 혁명가들은 개혁을 바랬지만 그렇다고 민중의 편은 아니었다. 이들에 의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이었던 '혁명의 적의 재산을 몰수하여 애국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토즈 법은 통과되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역시나...)
도리어 불만을 표하는 자코뱅당 내부의 좌파인 에베르파가 3월에 숙청되었다. 다음달인 4월. 이번에는 우파인 당통의 차례였다. 뻘짓을 많이 했던 당통과 그의 내각은 비리와 적국을 도왔다는 여적죄를 물어 단두대행을 하였다.
당통은 처음에는 억울하다고 펄펄 뛰다가(억울은 개뿔 니가 죽인 사람이 몇 명인지는 아냐?) 권력 앞에서 저항해봐야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가 아니라 로베스피에르를 저주하며 단두대행을 한다. '다음은 네 놈 차례다!'(이놈! 감히 네타를 하다니...)
자크 에베르
자코뱅당 내의 좌파혁명가다. 결국엔 로베스피에르에게 숙청된다.
6월에 이성주의자였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이성의 최고존재(?)를 기리는 제전이 상 드 마르스에서 열렸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파리 시민들은 황당했다. 예전처럼 국뽕 맞는, 아니 프랑스인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축제를 열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이해도 할 수 없는 괴이한 제전을 여는 것인지... 시민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쟤 또라이 아냐?' 로베스피에르의 끝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7월 22일 공포정치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법이 통과된다. 프레리알 22일 법은 반혁명분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체포권한을 모두에게 주었다. 간단히 말해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언제든지 반혁명용의자로 몰아서 혁명재판소로 끌고 갈수 있게 된 것이다. 정적을 제거하는데 최고의 도구다.
이런 무시무시한 법이 통과되자 너도나도 불안에 떨었다. 이젠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불과 닷새 후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고 그 다음날 자살에 실패한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행을 한다. 그리고 공포정치도 이렇게 끝난다.
로베스피에르 정권은 안보를 외치며 대외전쟁을 계속했지만 실제로 본토의 안보를 위협할 정도로 쳐들어오는 외국의 군대는 없었다. 차라리 해외영토가 문제였다. 코르시카를 점거당하고 식민지의 혁명을 진압하려다 백기를 들었다.
실제의 위협은 반혁명반란이었고 그것은 정부가 국민을 대상으로 벌이는 전쟁이었다. 불만을 억누르기 위한 공포정치와 로베스피에르 정권이 민중을 위해하였던 좌파적(?) 정책들은 이후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불만을 달래기 위한 임시변통적인 정책들이었다. 물가상한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나라 역시 철권통치시절 기업을 족쳐서(?) 물가를 강제로 억누르지 않았던가.
로베스피에르의 가진 자와 없는 자들의 갈등을 유발시킴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했다. 좌익과 우익의 효과적인 반발을 무너뜨리기 위해 끝임 없는 숙청을 가했고(북한이 따로 없군. ㅡㅡ;;;) 단두대는 쉴새 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부자와 빈자의 갈등을 유발시키려는 정책은 오히려 더욱 반발을 가져왔다. 그는 가진 자들에게도 적대되었고, 없는 자들에게도 적이었기 때문에 망했다.(이래서 중립은 쉽게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