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노종파 문중인 명재 윤증 고택(충남 논산)에서 치르는 차례상. 상 크기가 작고 차림이 검소하다.
(윤증은 노론과 소론이 분화하는 그 분기점에 있던 인물로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아 백의정승으로 불렸으며, 그의 사상은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의 비판세력으로 자리를 굳힘)
손꼽히는 유학 명문가의 종손이 차리는 차례상이 이런 모양을 갖추게 된 데는 조상의 당부가 크게 작용했다. 조선 중기 학자 명재 윤증은 후손들에게 '제상에 손이 많이 가는 화려한 유과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올리지 마라', '훗날 못사는 후손이 나오면 제사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테니 간단히 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윤증은 지나친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면서 후손들에게 양잠을 금지했다. 이런 태도는 고결한 선비정신의 실천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런 적선(積善)의 결과 그의 집안은 동학과 한국전쟁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차례에는 계절 음식을 올리지만 별다른 게 없으면 떡과 과실 두어 가지면 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