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5. 12.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희○이랑 규○이랑
지인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본인이 읽던 많은 책을 택배로 받았다. 곶감 빼어 먹듯 한 권 한 권 틈날 때 읽어 보는 중이다. 질서없이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그 책들 사이에 오늘 문득 연둣빛 표지와 제목이 눈에 띄어 냉큼 뽑아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제목 한 번 당돌하다. 겉장을 들추니 첫 속지에 초록색 볼펜으로 저렇게 적혀 있다. 생각컨대 저 때 저들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리라. 서점에서 다정히 데이트를 즐기는 중에 제목도 어여쁜 책을 골라잡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장 예쁜 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 책을 통해 나도 추억을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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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지하철역 입구에서부터 집까지 가는 길.
내 어깨를 살짝 치고 가는 한 사내가 있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너른 길을 휘젓는 걸로 보아 술을 꽤나 마신 모양이다.
얼핏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며 점잖게 양복을 입었다.
나를 치고 간 것도 모자랐는지 깜빡이를 켜고 정차중인 승용차의 옆거울도 몸으로 들이받는다.
고개를 휙 돌려 거울을 진하게 노려보고는 이내 가던길을 재촉한다.
시비를 염려해서인지 차주인도 내리지 않는다.
큰 길을 지나 좁은 길로 들어서자 야채를 파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할머니는 평소 금은방 앞에 조그만 좌판을 펼치고 주로 나물거리의 야채들을 판다.
금은방과 주위 가게들은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라 골목길은 은근히 어둡다.
몇 발짝 건너 코딱지만한 24시 편의점 불빛만이 할머니의 쪼그리고 앉은 자세와 나물 바구니들의 실루엣을 만들어 주고 있다.
오늘도 다 팔지 못하셨나보다.
할머니는 다시금 들릴듯 말듯 "떨이~"란 말을 연발한다.
차가운 밤기운과 졸음을 조금이라도 견뎌내려는 듯 앉은 자리에서 상체를 앞뒤로 흔드신다.
술에 취한 아저씨는 저멀리 가다가 대뜸 뒤돌아 멈칫하고는 발길을 꺾어 돌아온다.
그리고 나또한 이미 지나친 할머니에게로 가서 손가락으로 바구니 하나를 가르킨다.
여전히 비틀거리는 채다.
깊은 밤 술에 취한 한 사내와 좌판의 할머니 사이에 거래가 시작된다.
코끝을 애이는 가을 찬바람 때문에 아저씨는 술기운에도 어머니 생각이 났을까.
할머니와 아저씨를 보며 안타까움에 잠시 멍했었던 그 추웠던 동네 골목에 서서.
-2010.10.24. 서울. 상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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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세월호를 잊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