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충분히 음미할 수 있고 곱씹을 수 있는 글을 창작하고 싶습니다.
책게시판이 흥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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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저마다 종이에 무언가를 끼적이며 느릿느릿한 노교수의 말을 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노교수의 말을 받아 적느라 그렇게 열심히 무언가를 끼적였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의실은 딸칵거리는 볼펜소리와 노교수의 말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뭘 적는지도 모른 채 행여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숨까지 참아가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우리가 열심히 필기하고 있는 모습을 본 교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노교수의 말이 끊기자 조용했던 강의실은 이젠 개미 발자국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갑작스럽게 말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고개를 들거나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자네는 왜 공부하나?”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에게 노교수가 물었다.
노교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나는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지만 내 입은 생각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군수나 경찰서장이 되고 싶습니다.”
교수는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지만 이내 다른 학생들에게도 질문했다.
공무원, 군수, 경찰서장....
학생들은 저마다 되고 싶은 직업들을 말하며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많은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말했지만 그중에서 독립운동이나 일제에 저항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사람은 없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군수나 경찰서장 같은 직업을 가지고 싶어 했다.
나는 아닐지라도 이 지식인들 사이에선 적어도 한명쯤은 나올 줄 알았다.
나와 똑같이 생각했던 것 이였는지 학생들의 대답을 듣는 내내 교수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만 걸려 있었다.
강연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우리의 확고하고 솔직한 대답을 들은 노교수는 힘없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노교수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긴 눈동자는 우리 전체를 쓸어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들, 공부해왔던 것들을 대체 무엇 이였을까.
나는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군수나 경찰서장이 되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일이였다. 그것만을 위해서 나는 계속 공부했다.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보이는 일제의 부당함과 사회의 모순을 나는 외면하고 외면했다. 이런 세상에 독립운동이니 일제에 저항하는 일은 자살하는 일과 똑같았다.
우리는 똑같이 정의를 외면하며 살아왔다,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지식인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나는 내 부와 삶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학문의 욕구가 넘치는 사람 이였지만 그 외에는 비겁하고 무식한 겁쟁이였다.
나는 지금쯤 집에 돌아오셨을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경찰서장이 되라고 거듭 강조하셨던 할아버지의 손가락에는 두꺼운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신고 있는 가죽구두와 은시계, 두꺼운 코트 끝자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독립운동은 집안을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며 덜 떨어진 놈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역정을 내셨던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문득 내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불편해졌다.
나는 내 손목을 갑갑하게 옥죄고 있던 시계를 던졌다.
입고 있던 코트도 벗어던져버렸다.
광이 나던 가죽구두도 그동안 열심히 사용했던 만연필도 던져버렸다.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에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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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