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말씀드리자면 저는 한국 야구를 전혀 모르는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김현수 선수도 이번에 메이저리그 진출 때문에 알게 되었죠.
아시다시피 김현수 선수는 이번 겨울에 FA자격으로 볼티모어와 2년 7백만불에 메이저리그 계약을 했습니다. 볼티모어는 김현수 선수의 능력을 믿었고 마이너리그 거부권까지 주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시범경기(spring training)에서 처참한 성적을 남기면서 볼티모어가 김현수 선수를 벌써부터 버리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선수와 상호해지를 통해 한국으로 유턴시키려는 딜을 고려했다는 기사까지 나왔죠.
1. 본론으로 넘어가기전에 메이저리그 선수관리 규정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팀은 40인 로스터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한마디로 40인 로스터에 들어있으면 다른 팀에 빼앗기지 않고 선수를 데리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최상위 리그인 메이저리그에는 25명의 선수만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를 25인 로스터라고 부릅니다. (9월 확장 로스터는 일단 넘어가죠. 자세한 내용은 메이저리그 관련 기사를 참조.)
따라서 40인 로스터 중 15명은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들 수 없습니다 (물론 시즌중에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있는 선수를 마이너로 내려보내고 마이너에 있는 선수를 대신 올리는 일이 매우 자주 일어납니다.). 이 15명은 보통 (1) 산하 마이너리그팀으로 보내지거나 (2) 부상자 리스트에 등재됩니다. (참고로 장기 부상자를 위한 60일 부상자 리스트를 통해 40인 로스터 이외의 선수를 보호 할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기사를 참조.)
시즌중에는 40인 로스터와 25인 로스터의 구분이 있지만 시즌이 끝나면 이 구분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시범경기에는 오직 40인 로스터만 있으며 각 팀은 개막 이전까지만 25인 로스터를 확정 짓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40인 로스터의 아무나 마이너리그로 내릴 수 있을까요?
정답은 아니오 입니다.
일단 메이저리그 선수를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1) 옵션행사(option)와 2) 지명할당(DFA: designate for assignment)입니다.
1) 옵션행사의 경우 선수를 40인 로스터에 유지시킨채 마이너리그로 보낼 수 있습니다. 대신 조건이 붙는데 그 어느 선수도 3년 이상 옵션될 수는 없습니다. 이건 미국 드래프트를 거친 선수들 뿐만 아니라 국제계약으로 영입한 해외선수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오히려 국제계약으로 영입한 선수들은 김현수 선수처럼 옵션 금지조항을 넣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지명할당의 경우 사실상 방출에 가깝습니다. 이 경우 다른 팀들이 그 선수를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경력이 있는 선수들의 경우 지명할당시 산하 마이너리그 팀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FA를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만약 지명할당한 선수가 연봉이 높은 선수라면 만약 다른팀이 빼앗아가도 연봉을 그대로 지불해야하기 때문에 남좋은 일을 하는 꼴이 될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 팀도 다른 팀들이 탐낼만한 선수를 40인 로스터에 넣어두어 다른 팀으로 이적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선수를 3년이상 마이너리그에 묵혀두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 김현수 선수의 상황
제가 자세한 계약내용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미국 기사를 읽어보면 모든 기자가 김현수가 구단의 옵션행사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말은 곧 김현수는 본인이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한 개막 25인 로스터에 무조건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몇몇 룰을 이해하지 못한 네티즌들이 윤석민 선수의 경우처럼 25인 로스터에 먼저 들어야 마이너 거부권이 생긴다고 주장하고 계신데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윤석민 선수의 경우 3년계약의 첫 해에는 옵션행사 거부권이 없었고 두 번째 해부터 옵션행사 거부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첫해에는 마이너리그로 내려갔죠. 그런데 문제는 윤석민 선수의 마이너리그 성적이 바닥을 치자 8월에 볼티모어가 일치감치 윤석민 선수를 지명할당해버린겁니다. 지명할당해도 다른 팀들이 빼앗아 가지 않을거란 확신이 있었고 실제로 윤석민 선수를 데려간 팀은 없었죠. 따라서 윤석민 선수는 이미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옵션이라는 것이 40인 로스터에 등재된 선수를 보호하는 동시에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는 권한인데 이미 40인 로스터에 있지도 않은 선수에게 옵션을 행사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러기에 윤석민 선수가 "다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재되야 옵션거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겁니다.
그러나 기아와 계약할 당시의 윤석민 선수와 반대로 지금 김현수 선수는 볼티모어의 40인 로스터에 등재되어 있으며 개막 25인 로스터에서 제외하려면 옵션행사가 불가능해 무조건 지명할당을 해야하는 상황입니다.
참고로 김현수 선수는 메이저리그에 있든 마이너리그에 있든 2년간 7백만불은 무조건 받습니다.
3. 볼티모어의 몰상식한 언론플레이
현재 볼티모어는 난감한 상황에 있습니다. 2년간 7백만불이라는 거금을 투자해서 데려온 선수가 아무리 시범경기라지만 처참한 성적을 기록해서 앞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오랜기간 기회를 주기가 곤란해졌습니다. 더군다나 볼티모어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치열하다고 불리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에 위치해 있기에 앞으로 2~3년간 승부를 봐야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문제는 김현수 선수를 옵션행사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지명할당하기엔 다른 팀이 빼앗아갈 것 같으니 꼼수를 부려서 상호해지를 통한 한국 유턴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가장 씁쓸한 점은 상당수의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김현수 선수만을 욕하고 있고 오히려 볼티모어의 무책임한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몰상식한 국뽕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현수 선수에게 2년간 7백만불의 거금을 보장하고 옵션행사 거부권한을 줌으로써 25인 로스터를 보장해준 것은 다름아닌 볼티모어입니다. 이것은 죽이되든 밥이되든 김현수 선수를 일단은 메이저리그에서 끌고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김현수 선수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을때 여러 구단이 영입의사를 밝혔는데 볼티모어를 선택한 이유 중 큰 하나가 바로 이런 신뢰를 보여준게 아니었나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옵션거부행사는 트레이드 거부권한과 함께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선수들에게 주기 싫어하는 권한 중 하나인데 이건 그냥 막 주는 권한이 아닙니다. 분명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볼티모어만큼 혹은 그 이상의 계약을 제시한 메이저리그 구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상호해지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고용계약을 지키지 않겠다는 몰상식한 선언입니다.
이건 김현수 선수를 좋아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김현수 선수가 정말로 쓸데없다는 확신이 있으면 지명할당을 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경우 다른 팀이 빼앗아가서 김현수 선수가 강정호 선수처럼 터져버리는 리스크는 볼티모어가 져야하는 겁니다.
내가 쓰기는 싫은데 다른 팀이 쓰는 것도 혹시 모르니 싫고, 심지어는 보장해준 돈도 주기 싫다? 이거야말로 도둑놈 심보입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입니다.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와 협의한 내용을 구단이 이런식으로 일방적으로 파기하면 안되는 겁니다.
볼티모어의 무책임한 스탠스를 욕하지 않고 오히려 김현수 선수의 부진을 욕하는게 정규직 직원 해고할 때 돈 쓰기 싫어서 책상 빼고 자존감 짓밟아 스스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헬조선의 풍토를 보여주는 것 같아 슬픕니다. 또 메이저리그를 좋아하는 네티즌이라면 20, 30대가 많을텐데, 헬조선을 증오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헬조선의 마인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우리의 모순적인 모습이 드러난게 아닌가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