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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백일장]똥과 가시 - *주의:이 글은 분량이 깁니다
게시물ID : readers_212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갈색낙엽
추천 : 4
조회수 : 23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8/13 18: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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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과 스마트폰 때문에 책이 더 멀어지셨다고요?

그렇다면 오세요! 오유 책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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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과 가시

-*주의:이 글은 분량이 깁니다.


 

    네가 승도이구나. 선생님 기억나니? 네가 요만했을 때 너희 할아버님 장례식장에서 한 번 만났었는데. 생각보다 키가 별로 안 컸구나. 중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 졸업한다고 해도 믿겠어, 하하.”


    마중 나와 있던 교감선생님이 나를 알은체를 하며 말을 걸어왔다. 벌써 1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장례식을 들먹이는 그가, 나에게는 이 학교만큼이나 낯설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오늘 시험을 보러온 상포외고라는 곳은 우리 중학교와는 뭔가 달랐다.


  참나무향이라도 날 것 같은 목재 바닥의 복도와, 미국 영화에서나 본 거대한 개인 사물함들, 실내화부터 창문까지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풍경들. 똑같이 지은 지 오래되어 보이지만, 우리 학교가 삭혀서 비료로 쓸 것 같이 낡았다면, 이 학교는 와인이라도 되는지 세월이 흐른 만큼 더 고급스러워진 것 같았다. 이런 게 어른들이 말하는 소위 서울대 기운이라는 건가. 나는 괜히 다 떨어져가는 삼선슬리퍼를 꼼지락댔다.


    교감선생님이 나를 시험을 치르게 될 교실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그 교실의 모든 의자와 책상들은 뒤로 밀려있었다. 딱 하나의 의자와 책상만이 휑하니 교실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오늘 시험은 나 혼자 보는 일종의 특별입학시험이었다. 서울대를 보내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 학교는 외국어고등학교라는 이름답게 성적이 아니라 특정 언어 특기생들도 뽑기는 했다. 그렇다고 매해 몇 명을 정해두고 뽑는다기보다, 오늘처럼 알음알음 잘 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하면 방학 중이라도 특별시험을 해주는 것 같았다.


    너한테는 쉬울지도 모르겠지만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풀어보아라. 내년에도 선생님이랑 만나야지?”


    교감선생님이 내게 시험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꼬박꼬박 네 라고 대답했다. 내가 시험지에 이름을 적자, 교감은 신문지를 펼쳤다. 그는 여유롭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신문을 읽었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시험지에 있는 중국어 문제들은 정말로 쉬웠다.


  우리 집은 화교가 아니지만, 나는 화교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나왔다. 중국말로 6년을 대화하며 살았으니, 아무리 외국어 고등학교의 문제라도 중고등학교 수준은 장난이었다. 한국말을 하며 살다가 중국말들 사이에 내던져진 것에 비교하면, 이 고급 빈티지 같은 고등학교에서의 생활도 만만할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좋은 고등학교를 갈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어제 본 TV강의에서는 자신의 특기를 살리라고 했다. 중국어를 하지 않는 대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이제는 딱히 중국어가 무섭지는 않았다.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실력도 올라갈 것 같았다. 더 생각하려면 더 생각날 것 같지만 그 정도 선에서 납득하고 문제를 풀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문들은 딱히 함정으로 꼬아놓은 부분 없이 읽고 해석할 수만 있다면 어려울 것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앞장의 문제를 모두 풀고 시험지를 뒷면으로 넘겼다. 펄럭이는 소리에 교감이 나를 쳐다보더니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시험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았지만 남은 문제들을 대충 훑어보니 금방 풀고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늦게 끝난 척 PC방이나 갈까. 학원을 빼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다. 하지만 왠지 저 교감선생님이 부모님한테 내가 몇 시에 끝나고 갔다고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아랫배가 꿀렁 거리기 시작했다. 괄약근이 수축하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연필을 꽉 움켜진 손이 떨려왔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교감에게 다가갔다. 교감은 시험을 보다말고 갑자기 다가온 내가 당황스러웠는지 말을 더듬었다.


    , 뭐니? 말할 게 있으면 자리에 앉아서 말해야지.”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교실 밖 복도로 나갔다. 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죽을 맛이었다. 복도의 나무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 때문에 배도 진동하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입고 온 중학교 교복이 오늘따라 더욱 몸에 맞지 않고 거슬렸다. 몇 초만 지나면 김문석이라는 만만해 보이는 이름이 적힌 사물함에 내 안의 것을 쏟아낼 뻔 했다.


    복도 끝 화장실 입구에서 어떻게 변기까지 들어가 앉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물을 내리고 있었다. 변기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변기 칸은 좁았다. 한 명만 간신히 앉았다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똥만큼 더러운 낙서들이 사방에 적혀있었다. 문석이 병신이라는 낙서도 있었다. 녀석은 진짜로 만만한 것 같았다. 밑을 닦으려고 뽑은 휴지에는 누군가가 묻혀둔 코딱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수압 때문에 물을 두 번 내리고 칸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 바닥은 맨들맨들한 작은 타일들이 붙어있었다. 낡은 학교라는 티가 났다. 두 개의 세면대 중 하나는 거울이 없었다. 손을 씻으며 확인한 내 얼굴은 연분홍의 핏기가 돌고 있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바깥에는 어느새 눈이 오고 있었다. 주변 건물들과 마주보는 4층이다 보니 창문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이상 눈이 쌓이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었다. 창문 밑에 놓인 문석이의 사물함 너머, 바깥의 땅바닥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 때 내 삼선슬리퍼가 마저 떨어져나갔다. 나는 발가락 앞부분으로 나무 바닥을 쓸어버렸다. 중지발가락이 따가웠다. 양말을 벗어 확인해보니 까만 점 같은 가시가 박혀있었다. 나는 뽑으려다 그만두고 맨발로 시험을 치르던 교실 안까지 저벅저벅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가시가 따가웠지만 나는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신발주머니에서 내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그리고 시험지를 내버려둔 채 내 필기구들을 챙기고 가방을 쌌다. 당황한 교감에게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시험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라는 말 밖에 못하는 교감에게 다섯 번 정도 차분히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매서운 추위에, 내리는 눈들이 운동장 가득 쌓여있었다. 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오른발을 눈더미 속에 집어넣었다. 따금따금하게 발이 얼었다. 더 이상 가시가 아프지 않았다.


   *


 

    그 뒤, 나는 소위 뺑뺑이라는 것으로 동네 인문고를 갔다. 그곳은 외고 다음으로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곳이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다. 때로는 시키는 공부를 하지 않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네 번 수능을 더 보았다. 어떤 대학은 합격하고, 어떤 대학은 떨어졌지만, 나는 아무 곳도 가지 않았다. 다섯 번째 수능에서 나는 지망을 바꿨다. 중국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배우고자 마음먹은 전공은 동양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1년 뒤 지금 나는 기약 없는 휴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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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세월호를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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