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총리, 조선일보 비판의 의미와 효과 유신치하 기자 대량 해고에 입닫은 조선일보 참 궁금했었다. 과연 이해찬 총리의 발언을 조선일보가 어떻게 보도할지 말이다. 틀림없이 헐뜯는 기사로 도배할 것은 뻔했지만 내가 보기에 딱 두가지는 절대 보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배달된 조선일보를 펼쳐본 순간 내 예측이 여지없이 적중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수십페이지에 달하는 조선일보 29일자에서는 어제 있었던 중요한 사실 가운데 딱 두가지가 빠져 있었다. 첫째는 이해찬 총리가 조선일보를 역사의 반역자라고 규정한 이유에 대한 언급이다. 이 총리는 분명하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30년전 1974년 유신치하 긴급조치 때 자유언론을 주장한 수많은 기자들을 집단해고하고, 30년 동안 거의 복직시키고 있지 않다”면서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조선-동아의 행위는) 시대에 반하는 행위이며, 역사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한다”고 얘기했었다. 조선일보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야합하면서 여기에 저항하는 기자들을 대량해고했다. 그때 해고당한 사람들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투)를 결성해 30년이나 복직투쟁을 했었으나 이해찬 총리의 언급대로 거의 복직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이미 백발이 성성해졌다. 조선일보가 왜 역사의 반역자인지 이해찬 총리가 사례로 든 기자들의 대량 해고는 단지 한가지 사례일 뿐이다. 이해찬 총리가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라고 한 언급 속에는 조선일보가 왜 역사의 반역자인지 무수한 사례들이 숨어 있다. 조선일보는 정작 이해찬 총리가 그들을 역사의 반역자라고 규정한 부분은 다시 보도하면서도 이해찬 총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만천하에 밝힌 이유에 대해서는 한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러워서였을까.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의도적인 은폐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하나 은근슬쩍 뭉개고 넘어간 것이 무엇일까. 한나라당이 차떼기당이란 엄연한 사실을 놓고 안택수 의원과 공방을 벌이면서, 대통령 탄핵 얘기가 나왔을 때, 한나라당 소속인 안택수 의원은 논리가 궁색해지자 이렇게 얘기했었다. 대통령 탄핵은 한나라당의 잘못되고 그늘진 부분이라고 말이다. 한나라당 의원 스스로도 인정한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총리가 앞장 서서 의회정치를 파괴하다니…” 어쩌구 너스레를 떨었다. 조선일보가 뻔뻔스럽고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신문이란 건 이미 뉴스가 아니니까 이 정도로 하자. 필요하면 어떤 인간이든 동원하고, 필요 없으면 어느 누구든, 심지어는 자기 신문 기자들마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신문이니까 말이다. 29일자 신문에서 필요해 동원된 열린우리당 인간은 김부겸 의원이다. 김부겸 의원이야 선의로 한 얘기겠지만, 열린우리당 의원들, 제발 자신들의 발언이 어떤 방식으로 악용되는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했으면 좋겠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해찬 총리가 한 발언의 효과이다. 천박한 식견의 신문 입장에서야 이해찬 총리의 구구절절 옳은 말이 의회정치를 파괴하는 것이고, 비판언론을 탄압하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일국의 국무총리가 조선일보를 가리켜 역사의 반역자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그 효과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찬 총리의 언급은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안택수 의원이 그래도 자기 딴에는 뭔가 한수 조선일보를 위해 보여준다고 물어봤기 때문에 대답한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안택수 의원의 입장에서는 혹 떼려다 혹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결과는 국무총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직접 조선일보를 역사의 반역자라고 규정하는 것으로 나왔다.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라 권력집단 이것은 조선일보가 단순한 신문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체이며, 그 권력도 보통 권력이 아니라 대통령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이 나라 기득권력의 집합체이자 사령부란 점을 만천하에 고지했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처럼 자기 할말 못할 것 없는 세상에 무슨 언론탄압이란 말인가. 언론탄압이 가능했던 시대에는 그때 신문 지면에 언론탄압의 탄자도 들어가지 못했었다. 자기 신문의 지면에 언론탄압이란 글을 큼지막하게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언론탄압이 부재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조선일보가 아무리 언론탄압 운운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곧 스스로의 주장 자체가 자가당착임을 만천하가 알게 될 것이다. 또 다른 효과는 무엇일까. 조선일보로서는 두려운 일이겠지만, 국무총리가 조선일보를 역사의 반역자로 규정한다는 배경에는 이해찬 총리가 조선일보라는 신문을 보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해찬 총리는 유럽순방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조선일보를 보지 않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신문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많은 독자? 그것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많은 독자는 여론을 움직이는 힘의 바탕이며, 권력자에게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광고효과의 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신문의 힘은 이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보느냐에 달려 있다. 조선일보가 중앙일보에 밀리면서도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자리를 내놓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 사회의 이른바 먹물연하는 인간들이 조선일보를 더 많이 보고, 조선일보의 시답잖은 사설과 칼럼에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영국의 더 타임스가 적은 부수에도 불구하고 데일리 미러 같은 황색대중지에 비해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도 결국 다우닝가 1번지의 영국 수상을 비롯한 각료, 의원들이 더 타임스를 보고, 참고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가 미국의 일개 지방지에 불과한데도 세계에 영향력을 과시하는 이유는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배달되는 신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사람,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조선일보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해찬 총리의 입에서 밝혀진 것이다. 관료들이 신문을 무서워 하는 것은 자기 조직의 수뇌부가 아침에 배달되는 조간신문을 숙독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공보라인에서 아침 관련 뉴스를 스크랩해 그 수뇌의 책상 위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총리의 집무실 책상 위에 조선일보가 놓여지지 않는다는 이 중요한 사실이 총리의 입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됐다. 조선일보는 최소한 관료사회에서 영향력은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것이 공개되면 과거처럼 관료사회가 조선일보에 절절 매는 풍토도 사라질 것이다. 그들의 기득권 일각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는 이러한 사실을 절대 보도하지 않는다. 스스로 손목을 묶는 일을 왜 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보도를 하건 말건 세상은 돌아가게 돼 있고, 이뤄질 일은 반드시 이뤄지는 것이다. 입맛대로 보도하고, 목적에 따라 재단하는 이러한 보도 태도 역시 조선일보가 역사의 반역자인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사족… 조선일보는 사주의 이익을 위해 기자들을 수십명 해고한 신문이다. 그리고 30년간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거의 복직시키지 않았다. 지금 조선일보 기자들은 어쩌면 신날지도 모르겠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권력과 마치 싸우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 치고 권력과 대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조선일보가 싸우는 것은 스스로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이며, 정부와 여당을 헐뜯는 것이 결코 언론의 정도를 걷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언젠가 깨달을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조선일보는 내가 보기에 이 정권 들어서도 몇번이나 추파를 던졌었다. 같이 잘 먹고, 같이 잘 살자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성공했으면 지금처럼 신나게 정부나 여당을 헐뜯을 수 있었을까. 만에 하나(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권력과 영합에 성공한다면 이런 신나는 일들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아마도 30년전 그들의 선배가 걸었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스로 언론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환상이 깨지고, 결국은 장기판의 졸(卒)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때 권력으로서 조선일보는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권력체로서의 조선일보가 아니라 언론사로서의 조선일보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기자들에게는 더 좋은 일이련만…. 서영석 기자
작성일시 : 2004-10-29 09:09
결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