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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써야 할 것만 같아서
게시물ID : freeboard_10218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술관소녀
추천 : 2
조회수 : 29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8/14 05:49:56
왠지....써야 할 것만 같아서.

요새 항상,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한번씩 깬다.


며칠 전에는, 예전 남자친구 꿈을 꾸었어.

뭔가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어.

나는 깨진 플라스틱 그릇 조각을 들고 있었고, 그사람 곁에 있는 쓰레기통에, 그 그릇 조각들을 버렸어.

내가 아무리 불러도, 그사람은 대답을 안 했어.

그렇게 꿈에서 깨었어.



이상하지? 그 이후로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자꾸만 없어져가.

예전 남자친구가 생각이 난다고,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종종 이야기를 하곤 해. 

지금 남자친구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



성신여대의 개인이 운영하는 닭갈비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또 어떤 날은, 지금의 남자친구가 소홀히 할 때, 내가 괴롭고 힘들어 할 때 혼자서 견뎌내야 할 때,

그럴때면 항상 예전 남자친구가 떠올랐어. 그리고 떠오른다고,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말을 했지.

자신이 아무것도 못해준다는 것때문에 자책감을 많이 가졌어, 지금의 남자친구는.



그러면서도, 내가 종종 예전 남자친구가 생각이 난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잘 들어주었어.

나한테 이러이러하게 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해줬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등등...

에피소드가 좋은 이야기도 있고 나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많이.... 아쉬웠던 부분, 내가 더 못해주지 않았나, 헤어질 때 너무 미안하다, 잘 살고 있나 걱정된다, 이런 이야기들.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나는 돈을 아끼고자 에어컨을 달지 않았고, 그사람은 에어컨을 달자고 했었어.

그리고, 빨리 돈을 모아서 번듯한 집 하나 구하자고 했었지.

그런데, 헤어지고 나니까 짜잔- 하고 내 집이 생겼지뭐야? 아주 넓고, 부엌도 분리되어 있고, 베란다 창문도 넓은,

에어컨, 세탁기, 모든 게 갖춰진, 

변태가 와서 창문을 넘보지도 않고, 아침에 남자친구가 출근한 사이 누군가가 침입해 문을 열려고 시도할 수도 없는,

건물 현관에 비밀번호가 있는 안전한, 

그런 오피스텔에서, 나 혼자 살게 되었어.



이런 집, 그사람이 원했던 그런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약속 했던 것 같은데 -

헤어지고 나서야 가질 수 있게 되었어. 나 혼자 여기서 사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사람은 잘 지낼 수 있을까?

그사람도 물론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지만, 나보다 비싼 월세로 살고 있어서, 잘 지내나 걱정도 되고,


또 웃기게도,
내가 여행을 그렇게 많이 좋아해서, 많이 졸랐을 때에는, 이제 우리 돈 아끼자고 여행 귀찮다고 했었는데,
나랑 헤어지고 나니 카톡에 여행 사진 자주 올라오고, 또 자꾸 마음 아프게,
우리 같이 갔었던 유럽 사진이 자꾸 올라오는걸 보게 되었어.

그 사진들, 전부 내가 찍어준건데.
내 카메라로, 내 렌즈 앞에서 자연스럽게 유럽 거리를 다니던 그 사람의 모습들을 내가 다 찍고 있었거든.


가끔씩 생각해, 사실, 내가 힘들 때 그사람이 했던 조언들이나 따뜻한 생각들이 떠올라. 솔직히 뭐라고 조언했는지 잘 기억 안 나지만,
따뜻한 그 느낌이 기억에 남아. 나에게 언제나 커다란 산 같았고, 세상의 모든 풍파를 피해서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거든.
그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아마 그래서, 지금 남자친구에게, 내가 힘들 때마다, 또 그때마다 따뜻하게 대하지 못하는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많이 실망도 했던 것 같아.
내가 지쳐 쓰러졌을때, 그만하면 수고했다고 열심히 했다고 다독여줬으면 좋겠는데,
지금의 남자친구는, (지금은 안 그러지만) 처음에는, 그럴수록 일어나라고 채찍질해서, 내가 더 심하게 울었거든.
내일도 어차피 나는 힘내서 일어날테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는 이미 나도 알고 있는데,
너한테서까지 내가 편히 쉴 수도 없냐고 했던 것 같아.

물론 지금은, 남자친구는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편안함을 주려고 해. 아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자신이 언제나 나의 편에 서서 다독여줄거라고
믿음을 심어주고 있지.


지금 남자친구의 얘기는 적게 쓸래.

지금 나는, 다시 잠들기 전에,

잊혀져가는 그사람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기록해두고 싶어서 그래. 언젠가 지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록해두려고.

내가 힘들때 위로해주고, 때로는 재롱부려서 나를 더 웃게 만들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잘 웃던 그 사람,
정신력이 나보다 더 뛰어났어. 나는 강하지만 부러질 수 있는 타입이라면, 그사람은 쓰러지지 않는 나무와 같았지.
유연하면서도 똑부러지게 사회생활에 잘 대처할 줄 알았고, 순진해보여도 할 말은 잘 하고 마음을 다치는 일이 없었어. 나와는 달랐지.
뭔가 나보다 한참 정신력이 더 강한 사람이었어. 말도 잘 했고, 사회생활을 간파하고 마음 다치지 않으면서 맞서서 비난할 줄도 알았어.

힘들 때 다독여주고, 웃겨서 기분 좋게 해주고,
배고프다하면 자다가도 눈 번쩍 떠서 밥 차려주고, 반찬 해주고, 제육볶음이든 닭발이든 뚝딱뚝딱 레시피 없이도 잘 만들었어.
그 조그만 손으로 나를 참 잘 달래줬지.
참, 그동안은 세상 무서운 것 없이, 항상 그사람에게서 사랑 받고, 자신감 받으면서 잘 지냈어.


심지어 헤어지고 나서도, 회사에 대해 조언을 구하면, 나보고 능력있으셔서 잘 하실 수 있을거라고 위로해줬어. 그리고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코치해주고.
참...대단하지.


지금의 나는, 어쩌면 그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해, 그사람을 닮으려고 노력했어. 물론 그사람의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웠어.
나는 지구력이 있었고, 끈기가 있었어. 한 가지를 깊게 탐구해서 정리하는 능력이 있는 반면, 그사람은 순발력이 있었고 행동력이 있었지.
지금의 나는, 그사람의 유연성을 닮아가고 있어. 그래도 참, 든든했어. 무언가 계획에서 틀어지면 불안감을 갖는 나를 달래기 위해서,
순발력있게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능력이 있었어.

그리고 나는 그런 마음가짐을 닮고 있지. 어떤 상황에서도, 코웃음치며 넘길 수 있는 배짱.
예전에 내가 가진 배짱이, 대학 졸업한 신입의 패기였다면,
그사람이 가진 배짱은, 노련함이었어.


아참, 나 승진도 했어. 드디어... 왜 하필 그사람과 헤어지고 나서야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어.
돈 많이 모아서, 함께 있기로 했는데.

아무튼, 이제 모든 게 갖추어져가고 있는데, 왠지 소용없게 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사람은 더운 여름날 잘 지내고 있나 걱정도 되고 그랬었어.

그리고 이제, 웃는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나려고 해.
어떤 상황에서 그사람이 그렇게 웃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근데 항상, 생각이 날 때마다 지금의 남자친구한테 말했던 것 같아.
나보고 케로로 닮았다고, 팔다리는 가늘고 배만 나온다고, 케로로 피규어를 만들어서 나한테 선물해주었다고 했어.

더운 여름이 되니 내 집 한 켠에 있는 구명조끼 두 개를 보며, 워터파크에서 장난을 치던 얄미운 모습도 생각이 나고, (이건 굳이 말하지 않았어)

그 외에도 참, 
많은 이야기들을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해줬던 것 같아.


지금의 남자친구는, 헤어진 지 얼마나 됐는데 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사귄지 얼마 안 되었을 땐 말했는데,
지금은 다 들어주고 있어. 얼마 전에 꾸었던, 깨진 그릇을 버리는데 전남자친구가 아무 말 없이 서있는 꿈을 꾸었다, 는 이야기까지도.
"그분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것 아닐까?" 라는 말까지 해주더라고.

아무래도, 이제 인연은 끝났다고 꿈에서 알려주는 거겠지?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해.
반말을 하고 싶은데, 카톡을 하면 자꾸 존댓말을 하게 돼.
그리고 어느날 남자친구는 나한테 말했지. '내가 자기보다 어린데, 존댓말하는걸 듣고 반말로 대답할 순 없어서 같이 존댓말한다고. 그리고, 전남자친구에게 존댓말 써서 나한테도 존댓말 쓰는거 알고 있다고.' 
라고 말하더라고.

맞아, 버릇이어서 존댓말이 나왔어. 전화할 땐 반말, 카톡할 땐 존댓말...
아직도 고치기가 어려워.


사실은 사진을 많이 지웠는데,
27살 폴더의 사진들은 아직 못 지웠어. 엄청나게 많은 그사람의 사진들을 지우고 지워도, 겨우 29살, 28살 폴더의 사진들만 지우게 되었어.
그리고, 27살 폴더에는 아직 앳되보이는, 더 말라보이는 그사람의 사진들과, 핸드폰 동영상들이 있었어.

굳이 열어보지 않으려고 해. 그러면서 아직 지우지도 않고 있어. 아마 내가 아이 낳을때쯤 지우지 않을까? 아니면 결혼할 때?


아이...
아이 있으면 좋겠다. 귀엽고 작은 아이.

참 이기적인 여자지. 그렇게 잘해주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지금 남자친구도 나에게 잘해줘. 마치 내가 세상을 두 번 구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어쩔땐, 샤워하다가 생각이 나는데,
혹시 전생에 내가 너무 고생해서, 신이 나한테 빚진 게 있나? 싶을 정도로,

지금의 남자친구도 무한한 인내와 기다림으로,
내가 당신을 잊기를 기다리고 있어.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함께 보냈을 터이니,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 같아.
이야기하면, 차분히 잘 들어줘. 그 표정은 뭔가... 보살 같은 표정? 인자하고 차분한 미소.

내가, 헤어지는게 어떻겠냐는 말도 해보고, 힘들다고도 말해보고,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은 절대 나를 놓아버리지 않을 거라는 굳은 다짐을 하고 있어.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기대지 못하고, 예전 남자친구의 큰 산같은 마음에 기대었던 때를 떠올리는데,
지금의 남자친구는 그런 나를 기다려주고 있어. 자신이 더 많이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면서.


깨진 그릇을 버리면서 예전 남자친구가 아무말 없이 서 있던 그 꿈을 꾼 뒤로,
자꾸만 기억이 희미해져간다. 기대었던 그 무엇도,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려고 해.
그사람도 곧 오피스텔 전세로 옮기겠지, 라고 스스로 안심시키기도 하고, 잘 지낼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날들을 보냈어.

그리고 이제 나도 내 삶을,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남자친구를 점점 더 많이 떠올리며 지내게 되겠지.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떠올리지도 않고,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예전 남자친구의 아름다운 기억을 , 

혹은 내가 잘못했던 점들에 대한 후회(헤어졌던 날, 잘해주지 못했던 게 가장 마음에 남았지. 그사람은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받아주지 않았으니까) 
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날이 올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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