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언제 찾아올까요?
중환자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숨을 쉬는 행위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갓난아기나 장애우가 아닌 이상 우리는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는데 성공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벌써 감을 잡으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계속해 보겠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니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흔히 고가 (7-8만원짜리) 장난감이나, 수십만원이 훌쩍 넘는 망원경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그러나 100만원짜리 게임기를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어른은 본 적이 거의 없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100만원은 보통의 어린아이가 용돈으로 모으기에는 2-3년도 부족하지만
어른이라면 서너달만 지나면 모을 수 있는 액수거든요.
간절한 희망이라는 이야기는 앞뒤가 바뀐 이야깁니다.
희망이 간절한게 아니라, 상황이 간절하기 때문에 희망을 바랄 수 밖에 없게 된 겁니다.
42.195km 마라톤을 완주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는 사람은 있어도, 100m 달리기를 완주하는데 희망을 바라는 사람이 있나요?
상황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100m 는 일상적인 거리지만 42.195km 라는 거리는 힘든 상황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42.195를 주파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지, 42.195를 주파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단언컨대 희망은 마약입니다.
그것은 임종 직전처럼, 더이상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만 투여되는
진통제 같은 역할만으로 인간에게 남아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을 개선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희망은 그 노력하고 투쟁하는 와중에 지쳐 쓰러질 때 극소량 투여되는 진통제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남용하는 약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 나쁜 것이라서 희망에 의지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희망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된 상황이 나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