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6월 15일 오전 서해 연평도 서쪽 해역에서 우리 해군 함정과 북한 경비정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북한 측이 먼저 선제공격을 하자 우리 해군이 대응 사격을 했다. 북한 어뢰정 1척이 침몰하고 경비정 1척은 대파되었다. 나머지 북한 경비정 4척도 파손된 채 퇴각했다.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우리 측 피해는 경미했다. 내가 취임 이후 일관되게 천명한 대북 정책의 3대 원칙 중 첫 번째인 “북의 어떠한 무력 도발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교전이 있기 전에 이미 연평도 앞바다에는 심상치 않은 조짐들이 있었다. 해마다 6월이면 북한 어선들이 꽃게를 잡으러 북방 한계선(NLL)을 넘어왔다. 그러면 우리 해군 고속정이 출동하여 이들을 몰아내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5~6척의 북한 경비정들이 함께 내려와 꽃게잡이 어선단을 보호하고 있었다. 6월 4일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려왔다. 우리 경비정이 접근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촉각이 연평도 앞바다에 집중되었다. 우리네 포용 정책을 북한 측에 그토록 알아듣게 설명했고, 남북 차관급 회담이 6월 21일 베이징에서 열릴 예정인데도 왜 그런 도발을 계속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실험하려고, 무엇을 노리고, 누구를 겨냥해서 저렇듯 무모한 시위를 하는가. 혹시 북한 내부에 강,온 갈등이 있는 것인가.’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조성태 국방장관한테서 전화가 왔다. 장관은 "강경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보고했다. 나는 네 가지 작전 지침을 시달했다.
"첫째, NLL을 반드시 확보하라. 둘째, 선제 사격을 하지 말라. 셋째, 북이 선제공격을 할 땐 강력히 응징하라. 넷째, 교전이 발생하더라도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
나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조율토록 지시했다. 조 국방장관은 대형 함정들을 동원하여 북한의 함정들을 NLL 밖으로 밀어 올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NSC 상임위원회는 그러한 '밀어내기’ 작전 구상에 동의했다. 사실 나는 네 가지 지침만을 주었을 뿐 그 이후 모든 것은 군에 일임했다. 군사 지식이 빈약하다는 것을 내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르는 소리'를 하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정교해야 할 군사 작전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애만 태웠다.
6월 15일에도 북한 함정과 어선이 NLL을 넘어왔다. 우리 측의 거듭된 철수 경고를 묵살하고 있었다. 아침 9시 30분경 우리 해군 함정들이 북한 함정들을 북으로 밀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그야말로 힘겨루기를 했다. 힘에 부친 북한 함정이 견디지 못하고 먼저 사격을 가했다. 우리 함정이 즉각 응사했다. 포성은 14분 만에 멎었다. 나중에 보고를 받아 보니 북측을 사망자가 30명이 넘었다.
우리 장병들은 늠름햇다. 언론은 이를 연평해전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우리가 승리를 거뒀다 해도 남과 북이 교전을 벌인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2002년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그래서 1999년 6월 서해교전은 제1차 연평해전이라 부르며 구분하여 기억하고 있다. 그레그 전 주한대사는 훗날 역대 어느 정부도 북한의 도발(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김신조 사건 등)에 응징한 경우가 없었는데, '국민의 정부'만이 이를 철저하게 응징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제1차 연평해전은 햇볕 정책이 순진한 발상이거나 유화적인 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내외에 보여 주었다. 이 정책은 내가 누차 강조한 대로 강한 힘이 있어야 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 서해교전이 일어난 시각에 남쪽의 관광객들은 금강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안전이 염려되었다.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16일) 떠나기로 한 금강산 관광선의 출항을 허가하겠습니다. 통일부 장관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임 장관이 그렇게 판단했다니 안심이 되었다. 나는 북한이 더 이상 서해교전을 빌미로 사태를 악화시킬 뜻이 없음을 확인했다. 금강산 관광선은 예정대로 떠났다. 그리고 예약했던 승객들 또한 어떤 동요의 기색도 없이 모두가 승선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민들이 국가와 나를 믿고 포용 정책의 '햇볕'이 되어 주었다. 북은 언제 싸웠냐는 듯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안도했다.
서해교전이 벌어진 다음 날, 긴급 여야 총재 회담을 열었다. 안보 위협에 초당적으로 대처하고, 이런 모습을 국민에게 보이는 것이 국론을 결집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햇다. 박준규 국회의장,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김영배 민주당 총재권한대행, 박태준 자민련 총재, 조성태 국방장관이 참석했다. 이회창 총재가 햇볕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햇볕 정책의 당위성을 다시 설명했다.
“대북 포용 정책은 확고한 안보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일,중,러 등 주변 4대국과 전 세계가 지지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햇볕 정책이 북한의 옷을 벗기려는 것으로 생각하며 주저하고 있지만 햇볕은 우리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북한도 우리에게 햇볕을 보내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햇볕 정책 추진 과정에서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 미사일 실험, 서해 사태 같은 것이고 긍정적인 면은 지난해부터 장성급 회담이 열리고 금강산 관광 등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변화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2차 연평해전
서해에서 다시 교전이 일어났다. 월드컵 폐막식을 하루 앞둔 6월 29일 오전 연평도 부근이었다. 북한 해군 경비정 2척이 북방 한계선을 넘어오자 우리 고속정이 이를 저지하려 접근했고, 그러자 북한 경비정이 기습 포격을 가햇다. 우리 고속정의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응사했지만 기선을 제압당한 뒤라서 어쩔 수 없었다. 고속정음 침몰했고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했다. 나중에 보고를 받아서 알았지만 장병들의 최후는 장렬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총을 놓지 않고 바다를 지켰다.
이날의 교전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고속정의 순찰 작전을 엄호할 초계함이 사정거리 안에 없었다. 고속정이 북의 경비정을 밀어내는 등 작전을 할 때는 함정이 뒤를 받쳐 북의 도발에 대비해야 함에도 그러한 수칙을 지키지 않앗다. 나는 이를 엄중하게 생각했다.
언론은 이를 훗날 제2차 연평해전이라 이름 붙였다. 한반도 전체가 월드컵 축제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북이 왜 그런 도발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참히 패한 제1차 연평해전의 복수를 노리고 기회만을 엿봤던, 계획적인 도발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가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 곧바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우선 해군 장병들의 희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유가족에 대해서는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 조치를 취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강경한 대북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확전 방지 및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등 냉정한 대응을 지시했다. 이에 국방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했다.
“묵과할 수 없는 무력 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엄중 항의하며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강력히 요구한다.”
북한은 신속하게 응답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남북 정상 회담 이후 개통된 핫라인으로 긴급 통지문을 보내왔다.
“이 사건은 계획적이거나 고의성을 띈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아랫사람들끼리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사고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북한의 사과는 더 이상의 사태 악화는 원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사과문은 당시에는 공개할 수 없었다. 우리 측은 다시 공개 사과하고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보장을 요구햇다. 북측은 약 4주 후인 7월 25일에 통일부 장관 앞으로 보내온 전통문을 통해 정식으로 유감의 뜻을 표했다. 이것이 북측이 우리 정부에 보낸 최초의 사과 문서가 되었다. 북의 사과를 확인하고 나서 예정대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햇다. 분당 국군수도병원 영결식장에는 박지원 비서실장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서해교전을 빌미로 일부 언론과 야당이 연일 햇볕 정책을 공격햇다.
“패전의 원인은 다름 아닌 햇볕 정책에 있다.”
야당 대통령 후보는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동요하지 않앗다. 그것이 햇볕 정책의 위력이었다. 바로 그날 밤 터키와의 3~4위 결정전이 열렸고, 수백만 명이 응원을 하러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관광객들은 북쪽 금강산을 찾았고, 북측의 경수로 안전 통제 요원들은 남쪽 대덕단지로 연수를 왔다.
출처 | 당연히 원출처는 김대중 자서전이겠고.. 저는 http://wooramy.tumblr.com/ 여기서 퍼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