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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창숙과 박정희..그리고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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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cckk
추천 : 1
조회수 : 178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8/26 16: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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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막막하네요

김수환추기경의 큰 대인적인 성품도 느껴지고

김창숙님의 아픔도 느껴지고

박정희는 그나마 좋은일도했었네요..ㅡ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40807113305091

독립운동가 김창숙과 박정희..그리고 김수환

[임기상의 역사산책 72]마지막 선비 김창숙, 일제와 이승만에 맞서 싸우다노컷뉴스 | 입력 2014.08.07. 11:33 | 수정 2014.08.07. 15:00
◈ 아주 특별한 손님,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병실을 방문하다

여기에 아주 특이한 사진이 남아 있다.

1962년 5월 초 서울의 중앙의료원.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사경을 헤매는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 선생을 병문안했다.

두 달 전 3.1절에 군사정권은 심산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수여했다.

해방 후 생존한 독립운동가가 받은 유일한 건국훈장이었다.


.......

↑ 고 심산 김창숙 선생의 빈소를 방문해 분향하고 있는 박정희 의장.

박정희가 병실을 다녀가고 며칠 후인 5월 10일 김창숙 선생은 향년 84살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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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경찰, 가혹한 고문 끝에 김창숙을 앉은뱅이로 만들다


↑ 자신의 84년 인생과 자식들까지 조국에 바친 심산 김창숙.


1927년 6월 10일, 김창숙은 상해에서 체포돼 대구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일본 경찰이 추궁하려는 것은 조선에 잠입해 600여 명의 유림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일과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의 배후를 캐는 일이었다.

이들은 각종 형구를 벌려놓고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말로 다하기 어려운 고문을 받은 결과, 점차 두 다리가 마비돼 하반신이 불구가 되었다.

앉은뱅이가 된 것이다.................

↑ 공판장으로 가는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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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숙 사건의 재판을 보도한 기사. (사진=시대의 창 제공)

김창숙은 항소를 포기하고, 대전교도소로 이감해 길고 긴 감옥살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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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을 맞아 외세에 맞서 민족분단의 저지에 나서다

↑ 김창숙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성규관대학에서 유림들과 함께 선 심산 (맨 앞에 앉아 계신 분). 그 뒤가 아놀드 미 군정장관.

일본이 항복한 그 다음날 김창숙은 청년들의 부축을 받으며 옥문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일가친척 등 천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다들 집에 모여 술잔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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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암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된 김창숙 선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시대의 창 제공)


◈ 반독재 기치 아래 이승만과 정면승부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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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3선 연임까지 강행하자 심산이 나섰다.

그는 공개적으로 각료 중 간신배에 해당하는 몇몇을 해임시키고, 민의 조작의 주동 집단인 자유당을 해체하며, 부정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김창숙 아니면 감히 하기 어려운 제언이었다.

그 대답은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과 유도회에서 쫒아내는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갖가지 공작을 벌여 일제 때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낸 친일파 윤우경이 중심이 된 자유당 정치 브로커들이 유도회를 장악하도록 했다.

성균관대 총장 자리는 김창숙을 몰아내고 역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이선근을 앉혔다.

모든 공직에서 밀려난 김창숙은 서울에서 영업용 택시를 모는 아들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집 한 칸 없어서 여관을 전전하고 병원비를 구하지 못해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권력자들의 도움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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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망명…병상에서 일어나 백범 김구의 한풀이에 나서다

↑ 성균관대학교 교정에 서있는 김창숙 선생의 동상. (사진=시대의 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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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선생이 서거하자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심산상을 제정했다.


2000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여섯 차례 큰 절을 올렸다. (사진=심산사상연구회 제공)

심산상 수상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기일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였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이 절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다.

김 추기경은 행사 직후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심산 선생은 모두가 존경하는 분이고, 이 분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큰 절을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세월이 지난 후 심산사상연구회가 재정난에 허덕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그마한 상자를 보냈다.

그 안에는 본인이 받은 상금 700만 원에다 300만 원을 더 보탠 1,000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유교나 천주교의 장벽을 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나 김수환 추기경이야말로 후손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보여주는 등불이 아닐까?...............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40807113305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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