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고대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 제국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웠으며 강력한 국가였다. 비록 그들의 시작은 혈기왕성한 농부들과 목동들로 이뤄진 작은 농촌 도시에서 시작되었지만 (크리스토퍼 도슨에 따르면) 막강한 군사력과 천재적인 조직능력을 바탕으로 서쪽 지브롤터 해협에서 비옥한 초승달지대까지의 영토를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갈리아나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같은 지역에 헬레니즘을 전파했으며 오늘날에도 경탄을 마지않을 법과 행정, 정치, 예술, 문화, 건축 등등 후대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유산들을 남기는 등 그 위대함을 다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일까? 제국이 붕괴되자 그 찬란함이 끝나고 혼란이 찾아왔다. 그 혼란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비록 어느 정도 혼란이 지난 후의 인물이지만 풀 디아크르는 기록을 남겨 제국 붕괴 후의 혼돈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람들로 가득 찼던 농촌과 도시들이 어느 날 깊은 침묵 속에 빠졌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은 채 버리고 달아났으며, 부모들은 배에서 김이 나는 아이를 유기했다. 만약 유연히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람을 매장하기 위해 남아 있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의 시체를 매장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세계는 인간에게 인도되기 전에 침묵 속으로 인도되었다. 들판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고, 더욱이 양치기들의 휘파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농작물들이 주인의 수확을 기다렸으나 헛수고였다. 포도송이들이 겨울이 다가와도 여전히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들판은 묘지로 바뀌고, 주택은 야수들의 소굴로 변했다."
그리고 제국의 멸망을 직접 지켜봤을 오슈의 주교 오랑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너무나도 갑자기 죽음이 전 세계를 짓누르고, 전쟁의 폭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가해졌는지를 보라. 울창한 숲이나 높은 산의 거친 흙도,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하천의 물줄기도, 도시나 성채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참호도, 바다에 의해 형성된 장벽도, 저 쓸쓸하고 황량한 사막도, 협곡들도, 침침한 바위 밑에 있는 동굴들도 야만인들의 손을 피할 수 없었다. 속임수와 배신과 동료 시민의 밀고 등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다. 복병들이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민중들의 폭력 또한 기승을 부렸다. 무력으로 정복되지 않은 것은 기근에 의해 정복되었다. 어머니는 자녀와 남편과 함께 비참하게 살해되었으며, 주인은 노예와 함께 노예 상태로 전략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의 먹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화염에 싸인 자신들의 집이 잿더미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 영지, 농촌, 사거리, 모든 진지, 도로상에는 죽음, 고통, 파괴, 방화, 비통만이 가득했다. 하나의 방화만으로도 갈리아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로마가 멸망한 5세기부터 7세기까지, 특히 7세기는 유명한 중세사가 자크 르 고프 스스로도 '암흑시대라는 낡은 표현이 제격일 것'이라 할 정도로 암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군인들에 의한 내전과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로마 제국에서 누렸던 일상생활과 건축물들, 경제조직이 붕괴되었고 예술과 도덕, 의술 등 여러 문화와 기술들이 퇴보의 길을 걸었다. 여태까지 누렸던 혜택들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언젠가는 굶어죽거나 약탈당할 것이라는 공포 속에 사람들은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그들이 지새우는 밤만큼 그들의 앞길은 깜깜했을 것이다.
그렇다 고해서 이 시대를 무작정 암흑만 존재하는 시기로만 보면 안 될 것이다. 비록 고대라는 태양이 비추던 것보다는 볼품없지만 고대의 빛을 지키려는 이들은 존재했다. 그리고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했던 시절인 만큼, 이 작은 빛의 밝기는 당시로써는 태양 못지않았을 것이다.
본론
1.기독교
"오오 축복을 받아 묶인 이 두 발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은 대장장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오오, 축복을 받아 묶인 이 두 발은 주님의 구원을 통해 낙원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오오, 현세에서 당분간 묶인 이 두발은 내세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자유로울 것입니다! 오오 이 두발은 당장은 족쇄와 가로대 사이에서 꾸물거리고 있지만 , 그것은 영광스러운 길에서 그리스도에게 쏜살같이 달려가기 위해서입니다! 질시나 악의에서 비롯된 잔인함이 그대를 족쇄와 사슬로 여기 이승에 직성이 풀릴 때까지 묶어두어도, 그대는 결국 이 지상과 이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빠르게 올라갈 것입니다. 땅속 갱도에서 육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침대와 쿠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로와 휴식입니다. 노동으로 지친 몸은 땅바닥에 엎드리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눕는 것은 결코 형벌이 아닙니다. 목욕하지 않은 그대의 팔다리는 오물이 묻어 더럽고 추해졌지만, 겉은 더러워도 속은 영적으로 깨끗해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빵이 귀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추위에 떠는 그대는 옷을 원하지만,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은 자는 충분히 입고 아름답게 치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성 키프리아누스가 네메시아누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결정으로 로마군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부터 기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로마 사회에서의 기독교인들은 시민권이 존재치 않는 이방인과 외래인, 그리고 반체제 인사들로 낙인 찍혔고 육체적 고문과 위험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그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결국에는 승자가 되어 그들을 탄압한 로마제국의 국교로써 자리 잡았다.
기독교가 승자가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로마제국쇠망사로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은 이러한 기독교의 승리원인을 5가지로 정리했는데 불굴의 정신과 불관용, 여건이 될 때마다 개선한 내세 교리, 기적의 영향력, 기독교의 순수하고 엄격한 도덕, 마지막으로 제국 심장부에서 시작해 강한 독립국가로 형성되어나간 기독교 사회의 통합과 규율을 그 이유로 들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당시 제국의 탄압과 헬레니즘 문화, 동방의 신비주의 종교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거둘 수 있었고 '보편적이고 정통적인'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를 국교화한 테오도시우스를 비롯한 황제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제국의 부흥을 가져올 거라 믿었지만 아쉽게도 기독교는 로마를 살리지 못하였고 오히려 제국은 기독교의 보편성을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작았다. 그러나 한편 기독교 교회는 제국으로 인해 재탄생되었다. 교회는 로마가 가진 요소들을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독자적인 통합원칙아래에 권위 있는 독자적 기관들로 이뤄진 자율적 조직으로써 성장 할 수 있었다.
기독교는 또한 한때 적대했던 헬레니즘 문화를 흡수해나갔다. 비록 테르툴리아누스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라 말할 정도로 두 존재는 이질적이었고 초기 기독교도들은 교육과 교양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 세를 불려나가면서 점차 헬레니즘 문화와의 동화과정을 거쳐 고전문화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형성할 준비를 했다. 3세기경에 살았던 오리게네스는 ‘철학자의 아들들이 기하학과 음악, 문법, 수사학, 천문학을 철학의 시녀라 말하듯이, 우리는 철학을 시녀라고 말할 수 있다.’라 하였고 성 암브로시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의 시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설교를 장식하고 키케로를 자신의 안내자로 삼는 등 헬레니즘 문화는 점차 기독교에 녹아들었고 고전 철학으로 신학이라는 기둥을 빚어냈다. 이러한 노력은 고대문화 최후이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교부철학을 탄생시켰으며 서양 철학의 관념론적 전통뿐만 아니라 신비주의와 윤리학의 원천이 되었다.
비록 로마제국이 붕괴하였고 고대가 종말을 맞이하였지만 제국을 계승함으로써 기독교는 옛 로마 문화의 계승자이자 대표자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새로 일어난 야만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스승이자 안내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세를 이끄는 주체로써 새로운 시대를 이어갈 계기를 만들었다.
2.야만인들
“현재 고트족들이 우리에게 입힌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곧 우리는 연회나 전투에서 그들의 동료가 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공적 직무에 참여할 것이다.”
테미스티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하자 제국 내부와 외부에 있던 야만인들은 제국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약탈당했고 동방, 서방 가릴 것 없이 속주들이랑 속주들은 약탈당하거나 야만인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제국은 로마군과 야만인들과 폭도들이 무차별적으로 뒤섞여 싸우는 극도의 혼란 상태로 내일 바로 멸망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런 편지를 써 남겼다.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신의 은총 덕분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야만인들이 갈리아 전역을 점령했습니다.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사이, 라인 강과 대서양 사이에서 있는 땅은 모두 야만족의 약탈로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우리 영토였던 율리우스알프스 산맥에서 흑해에 이르는 지역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었고, 30년 동안 도나우 강의 국경은 무너졌으며, 사람들은 제국의 땅을 차지하려고 싸웠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눈물도 말라버렸습니다. 수염이 허연 몇몇 노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감금 상태나 포위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고, 자유에 대한 기억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자기 땅에서 영광을 위해 싸우지 않고 단지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이제는 싸우지도 않고 금은보화로 목숨을 사서 겨우 연명하는 데 급급한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히에로니무스의 공포로 가득 찬 편지와는 다르게 야만인들은 퓌스텔 드 쿨랑주가 말한 대로 "장기간의 내분으로 분열되고 일련의 사회혁명으로 기진맥진하여 자기들의 제도마저 상실한 연약한 인종의 잉여 잉간들"은 아니었다. 숲이나 초원지대에서 막 떠나온 이들은 (자크 르 고프의 말을 빌리자면) 수세기의 이동으로 여러 문화와 문명과 접촉하고, 이로부터 관습이며 기술이며 예술 등 을 들려왔다. 그리고 때때로는 인근 제국들의 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그들의 지식과 사치에 대한 흠모감[여기서 자크 르 고프는 치졸하고 피상적이지만 존경심이 결여되지는 않은 흠모감이라 표현했다.]을 품고 있었다.
이는 로마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야만인들에게 로마 문명은 (물론 약탈거리로서도) 매혹거리였다. 제국을 뒤집은 야만인들은 (유스티니아누스 때 까지 저항했던 반달을 제외하고) 로마 제국의 (명목상이긴 하나) 주권을 인정하고 제국의 아래에 들어갔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키고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조차 제국을 칭하는 대신 동로마의 제논 황제에게 "우리는 우리가 수여한 관직보다도 황제가 수여한 관직을 더 흠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야만인의 족장들은 로마의 관습을 흉내 내고 로마인들에게 자문역을 부탁하였으며 자신을 야만족의 왕보다는 로마의 집정관이나 귀족이기를 더 바랬다.
그러나 로마 문화를 용인하고 로마 정치체제 일부를 채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로마 문화와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지중해 지역에 자리를 잡은 야만인의 왕국은 로마제국에 붙어사는 기생충들에 불과했고 땅에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체 말라죽었다. 게르마니아나 브리타니아(브리타니아는 내부적으로는 켈트, 외부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의 침략에 시달려야만 했다.)와 같은 곳에서는 야만적인 부족 사회가 모든 것을 압도했고 만인에 대한 투쟁을 계속해갔다.
허나 갈리아는 달랐다. 이곳에서 피정복민인 로마인들과 정복민인 야만인들은 대등한 관계로써 만날 수 있었고 프랑크제국의 중심부로써 중세를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역할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종교였을 것이다. 아리우스파였던 고트족이나 반달, 부르군트족들과 달리 갈리아에 정착한 야만인들, 특히 프랑크족은 493년,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와(그리고 로마인들)의 협조가 가능했고 이러한 협조는 중세 역사의 토대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 대제에 무너진 서로마제국을 부활시킨다.
이렇게 등장한 프랑크 왕국은 (여타 다른 야만왕국들이 그러하였듯이) 제국의 전통을 물려받은 상속자로 행세했다. 제국의 행정 제도와 단위를 받아들이고 제국의 위계제도를 따라 관리들을 배치했으며 종래의 재산 등기 체계에 바탕을 두며 세입을 거뒀다. 하지만 야만적인 요소 또한 존재했다. 왕국을 움직이는 힘은 여전히 야만 용사(?!)들의 사회였고 사회 통합을 유지하는 힘은 국가와 법정이 시민에게 갖는 권위가 아닌 봉신이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이었다.
프랑크 왕국이 게르만적 요소와 제국의 요소가 섞여 있는 것과 같이 이러한 현상은 그 시대에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야만인들이 리메스(limes)를 넘어 제국에 (대부분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초기에 두 요소들은 서로 대립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둘 다 자신의 개성을 잃고 새로운 통합체로 바뀐다.
3.수도원
“신성한 씨가 지상으로 내려온다. 들판의 열매가 지상에서 우리의 목숨을 지탱해주는 반면, 높은 곳에서 내려온 이 씨는 우리의 영혼에 영원한 양식을 준다. 땅은 오곡과 포도주와 기름을 낳았고, 이제 형언할 수 없이 신성한 그분의 탄생이 다가온다. 그분은 자비롭게도 신의 아들들에게 생명의 빵을 주신다.”
레오의 전례서 중
493년,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였지만 농촌에서 밭을 갈고 가축들을 기르는 시골사람(paganus)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예부터 내려온 관습과 신앙들을 고집하는 이교도들이었다. 국가가 농경사회로 이행함으로써 도시들이 쇠퇴하였고 이 도시 안에서 성장한 서방 교회는(참고로 동방교회는 처음부터 시골로 침투해 들어갔다.) 고스란히 야만적이고 이교적인 시골 세력에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기반으로 한 주교 관구는 이들에게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고 시골에 침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관이 필요하였는데 이가 바로 수도원이다.
수도원은 동방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사 및 은둔자들이 홀로 사는 일상적 불편과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동생활의 수도원을 세웠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전통은 요하네스 카시아누스와 성 호노라투스의 노력으로 인하여 서방에 전해졌고 동방의 수도원들이 사막이나 절벽위에 있는 것처럼 울창한 숲이라던가, 사람이 살지도, 접근하기도 힘든 절해고도 등, 수도생활에 적합한 외지에 자리 잡았다.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온 주교들이나 사제들 보다 검은 옷을 걸치고 같이 쟁기질을 하는 수도사들에게 농민들이 친근감을 느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농민 문화와 아주 가깝게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수도사들은 새로운 종교의 정신을 농민 문화에 자연스럽게 불어넣을 수 있었다. 물론 수도사들이라 해도 이도교의 오래된 관습을 타파하기란 어려웠다. 대신 이도교 풍습을 기독교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성한 나무와 돌, 연못들은 새로운 신에게 바쳐졌고 새로운 대상과 결부되었고 농사일을 돌보던 정령들은 성인들로 대체되었다. 이교 신들을 위한 축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농민들로 하여금 마음을 열게 해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했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렇게 농촌에 복음을 전하고 농민들을 개종시킨 것은 대단한 일이었지만 수도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교황의 주요 대리인으로써 교회 개혁 운동을 이끌고 유럽 사회의 정치와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하는 데에는 성 베네딕투스의 역할이 매우 컸다.
흔히 몬테카지노 수도원과 베네딕트 수도회를 창설한 것으로 유명한 성 베네딕투스는 수도원의 목적을 엄격한 고행과 금욕 생활을 통해 영웅적인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닌, ‘주님에 대한 봉사의 수련장’으로서 공동생활을 수련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베네딕트회 수도원은 고도의 조직력과 안정성이 필요했고 위계제도와 회칙을 통해 조직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작은 국가나 다름없었다. 또한 성 베네딕투스는 ‘신에 대한 봉사’라는 명목아래에 학문 연구를 중요시 여겼다. 성 베네딕투스는 ‘베네딕토 규칙’을 저술하여 서유럽 수도회의 보편적인 생활 규범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끔 하였다.
성 베네딕투스의 노력으로 더욱 탄탄해진 수도원들은 적극적으로 영국이나 독일과 같이 로마 제국의 문화에서 동 떨어진 곳으로 진출했다. 특히 영국에서는 수도원이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파견된 베네딕트회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의 켈트족 수도사들은 상대적으로 허약하고 야만적인 부족 국가 대신 기독교회가 로마 문화를 계승하고 구현했을 뿐만 공통된 조직과 연례적인 종교회의와 행정의 전통을 통해 영국을 통합했다. 로마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앵글로색슨족들은 이제 경건한 수도사와 선교사들로써 교황에게 가장 헌신적인 동맹자이자 종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 시대의 토대를 놓는데 도움을 주었다. ‘게르만족의 사도’라 불리는 성 보나파키우스처럼 말이다.
결론
크리스토퍼 도슨은 ‘유럽의 형성’ 머리말에 이러한 글을 남겼다.
“내가 선택한 시대는 서양 문명이 인접한 동양의 위대한 문명보다 분명 열등했던 시대, 외면적으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줄 만한 화려함은 전혀 없는 시대였다.”
그의 말대로 이 시대는 그 어떤 시대에 비하더라도 나쁘면 나빴지 좋을 것이 별로 없었던 시대였다. 앞서 여러 사람들이 말 한대로 죽지 못해 살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사람들은 밭을 오고 씨를 뿌렸으며 생을 살아갔다. 미약하지만 자신의 보고 들은 것들을 두루마기위에 적고 옛 기록들을 보존했다. 옛 지식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밝혀냈다. 끔찍하고 폭력적이며 잔인한 세월이었지만 야만인이나 문명인이나 높은 분이나 낮은 이들도 다들 삶을 살았고 결국엔 어둠을 이겨냈다. 그리고 그들이 맞이한 빛은 그들이 어둠을 헤쳐 나오기 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참고서적
크리스토퍼 도슨, 유럽의 형성, 유럽통합체의 기원을 찾아서, 김석희 역, (한길사, 2011)
자크 르 고프, 서양중세문명, 유희수 역, (문학과 지성, 1998)
버트런드 러셀, 러셀 서양 철학사, 서상복 역, (을유문화사, 2009)
민석홍, 서양사개론, 개정판 (삼영사, 2009)
출처 | 옛날 제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