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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아버지.
게시물ID : readers_215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13
조회수 : 588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5/08/28 17: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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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포기한 것을 나열해 볼까요?

우선 그림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릴 수 없었던 그림이요.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없이 관두었던 그림 말입니다.

아십니까. 저는 그때 아버지께 대꾸하지 못했기에 더 후회가 됩니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왜 화를 내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후회 때문에 경영학을 관두겠다고 한 것이었고

잘하지도 못하는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겁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동생이 그림에 훨씬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재능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동생은 재능을 갖고 있었음에도 제게 그림을 공부하지 않겠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굶어 죽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가 동생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이나 하실 수 있으십니까.

동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유가 틀린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던 제가 틀린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가깝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눈물을 흘리며 가족을 포기하고 싶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상냥하게도 제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라 타일렀습니다.

저는 더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제 울음소리가 아직도 이따금 저를 미치게 합니다.

그녀와 제가 나란히 앉아 있었던 침대, 방 밖의 찌는듯한 더위, 에어컨의 시끄러운 작동소리.

그 모든 게 생생합니다.

하지만 전 그때 그녀에게 그 말을 한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제 삶에서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감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저는 당신의 그 말 덕에 모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의 말 뒤에 감춰진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포기하게 하고 싶으셨겠죠.

그림이라든지 글이라든지, 돈이 되지 않는 저의 모든 걸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가장 먼저 당신의 이해를 포기했고 그다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포기했습니다.

 

우습죠.

저는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말입니다.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친구분 차 안에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운전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조수석에 앉아 계셨고,

전 아버지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리고 저는 궁금했습니다.

내 시선은 분명히 창밖을 향해 있는데 어째서 아버지의 인상을 쓰고 있는 얼굴이 보이는 건지 말입니다.

 

몇 년이 지나 당신은 제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는 왜 자신감이 없니?’

당신은 또 돈이 전부는 아니지라고도 하셨습니다.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신은 바로 며칠 전에 문학은 돈이 안 되지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저를 비웃듯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왜 나를 믿냐? 너 자신을 믿어야지.’     

 

아버지, 저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더 많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열아홉 살 때부터 지금까지 겪은 슬픈 순간들이 제겐 너무나 거대합니다.

전 스무 살이 된 이후로 나이를 세는 걸 관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 밥을 먹고 익숙한 얼굴을 못 본 척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몇몇 친구에게는 따뜻한 이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제가 좋은 사람인 줄 압니다.

저는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주지 않았냐?’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매번 저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기도 전에 저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제가 외교관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들이 다 아는 큰 회사에서 일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국제관계학, 법학, 경영학.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제 미래에 대한 전부였습니다.

그 미래엔 그림을 그리는 저도 글을 쓰는 저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속이는 데에 능숙하셨습니다.

넌 언어에 소질이 있어’.

그러나 아버지의 칭찬은 당신이 제게 제안하신 미래에만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그림과 글은 아버지의 칭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쓸모없는 재주였습니다.

넌 글을 잘 쓰니까 대학 총장한테 직접 글을 써서 보내라’.

아버지께서 제 입학 문제에 관해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 때 저는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총장에게 쓴 글로 인해 전 아버지가 바라시던 대학의 경영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원하실 때만 저는 글을 잘 쓰는 딸이었고,

당신이 원하시지 않을 때는 전 그저 한국어를 한국에서 자란 사람만큼 하지 못하는 이민자였습니다.

한국어로 글을 써서 작가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꿀 이민자 말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도 한국어로 글을 씁니다.

 

아버지껜 허튼 꿈일 지도 모르겠지만 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될 겁니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될 겁니다.

제가 한국어를 한국에서 자란 사람들보다 잘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은 한국어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것만큼은 언젠가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글의 전부는 아버지십니다.

제가 글을 통해 한 것이라곤 결국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한탄하지 못한 말들을 한탄한 일뿐입니다.

출처 “My writing was all about you; all I did there, after all, was to bemoan what I could not bemoan upon your breast.”

(제 글의 전부는 아버지십니다. 제가 글을 통해 한 것이라곤 결국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한탄하지 못한 말들을 한탄한 일뿐입니다.)

- Franz Kafka. Letters to His Father

여기저기 의식의 흐름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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