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았나?"
귄위적인 말투가 침묵을 흩어 놓았다.
"우리가.....자네에게 이 정도 생각 할 시간을 주었다는건 그 만큼 원훈께서 자네의 쓸모를 알아 보셨다는 말 일세, 그런데 아직까지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자네,방에서 글만 쓰고 있다 보니 시국 파악이 잘 안되나 보군? 자네 그 잘난 마나님이 세상 시국을 제대로 전해 주지 않던가?"
나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끄흠..."
그런 내 모습이 답답한듯 멋스로운 양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남자는 연신 헛 기침을 해대었다.
"자네 정도의 지식인이라면 이토 원로께서는 조선인이라는 점은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는 말씀을 내 직접 들었단 말일세, 그런데 아직까지 고민을
하고 있다니..."
남자가 말을 하며 일어나자 낡은 의자가 제 몸을 비틀며 삐걱 소리를 내었다.
곧이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누런 봉투를 건내었다.
"총독부 직할로 임명장이 나왔네, 자네가 이럴줄 알고 내가 이미 손 써두었지...제발 세상 물정좀 알고 살게 문 밖만 나서도 사방이 거지때에
배 곪아 죽는 조선인은 길에 널려있어, 자네 정도의 수재가 그렇게 된다는 건 같은 지식인으로서 손 놓고 볼수는 없는 일이지..."
이걸 받는 다면 아내는 무어라 할까라며 뇌까리는 내 모습에 사내는 한심한듯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또 그 마나님 생각하나? 대체 언제까지 우물안에만 있을텐가? 자네 부인이 요즘 어떤 치들과 어울려 다니는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군 제발
정신 좀 차리게 언제까지 이렇게 살텐가 이대로만 산다면 밖에 저 거지들 모습이 조만간 자네 모습이 될걸세."
남자는 흥분한듯 말을 연신 뱉어 내더니 짜증이 난다는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찾아 올테니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채비를 해놓도록 해, 이 이상은 나도 견뎌 줄수가 없으니."
곧이어 문이 거칠게 닫치고 문 밖에서 나지막한 일본 욕이 들려오는것 같지만 나의 관심사는 오직 봉투에 대한 아내의 반응 이었다.
4시.
곧 있으면 아내가 장에서 돌아올 터였다.
봉투를 보고 성을 낼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니 궂이 보여주어 좋은 일이 없겠다고 생각되었지만 곧 이어 다시 생각에 빠졌다.
'내가 거리에 나 앉게 되면 누가 우리를 보살펴 준단 말인가...' 방금나간 히데키가 한 말에도 분명 일리가 있었다.
얼마전 길을가다가 내 바지춤을 쥐어 잡고 돈을 구걸하던 거지아이가 생각났다.
작은 손에는 땟 국물이 흘럿고 얼굴은 숯보다 검었으며 그 눈마저 탁한 빛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게 무서워 얼른 돈을 던져주며 도망쳐 나왔지만 그 탁한 눈빛은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거리에 나 앉게 된다면 아내의 맑은 눈도 그와 같이 될것 같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덜컥"
문이 열리며 짐을 한가득 든 아내가 들어왔다.
목에 흐르는 땀과 은은하게 비치는 옷이 짐들을 들고 집까지 돌아오기 위해 쏟은 아내의 노고를 알 수 있었다.
미처 왔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내의 시선은 히데키가 놓고간 노란 봉투에 꽂혔다.
곧이어 봉투가 낚아 채져 아내의 손에 놓였고 아내의 밝은 눈이 매섭게 변하며 곧이어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가능 하게 만들었다.
"또 그 총독부 사람이에요?"
매섭게 쏘아 붙이는 아내의 말에 나는 그렇다 대답 할 뿐이었다.
"그 사람은 왜 계속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잘난거야 결혼하기 전부터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난줄 알았으면 결혼 안 할걸 그랬어요."
말투에 긷을어 있는 묘한 비꼼이 아내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려다가 먼저 번에 이 말을 했다가 한 시간동안 말 다툼을 한걸 기억하고 이내 그만 두기로 하고 오늘 저녘은 무엇인지
물어 보았더니 아내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녘에 손님들이 오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간단하게 찬하고 술상으로 내가려구요. 설마, 잊은건 아니죠?"
잊고 있었던 약속이었다, 얼마전 아내가 자기가 새로 사귄 지식인들이 있다며 함께 식사대접을 했으면 좋겠다고 한게 기억이 났지만, 그게
오늘 이었다니...아내는 6시에 약속이 되어있다고 말하였고 때문에 나도 분주히 일을 거들어야 했다.
얼마 않있어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리더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아내의 이름을 대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남자들 이었기에 아내가 어떻게 이런 사내들과 알고 지낸건지 고개가 갸우뚱 해졌지만 이내 잊기로 했다 아니, 잊을 수 밖에 없었다.
한 노인 때문이었는데 체격이 크지는 않았지만 눈빛이 형형하고 한복을 단정히 입어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노인은 자신에게 압도되어 멀뚱히 서있는 내게 악수를 청하더니 제수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며 만나서 정말 반갑다고,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고
말하였다. 무슨 이야기 인지 당최 알 길이 없었지만 일단은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들어가서 식사부터 하시도록 안내하려 같이 식사가 마련된 방안으로
노인과 함께 들어가자 먼저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식사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노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해대었다.
'분명 평범한 모임은 아니다'라고 뇌까리는 내 모습을 본것인지 노인이 허허 웃으며 옆에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먼저 말한 탓에 엉겁결에
노인 옆에 앉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노인주변에 둘러 앉아 말씀을 들으려 하는 사람들로 인해 그 옆에 앉아 있는 나까지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노인의 말을 들으며 면면들을 살펴보니 눈빛이 하나같이 밝게 빛나며 마치 금이라도 얻는듯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엇다.
유독 젊은이 들이 많아 마중을 나갔을 때도 신기했었는데 이제 보니 대부분이 젊은이 들이었고 하나 같이 거사라도 치루려는 듯한 눈빛을 하고있었다
'아뿔싸'
이 시국에 이런 모임은 하나 뿐이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노인이 나를 불러 말을 꺼냈다.
"그래, 선생께서는 일제치하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시오?"
노인의 질문이 확신을 주었다.
'이 사람들은 운동가 들이다. 그것도 총독부에서 이를 가는 독립운동가들... 도대체 어쩌자고 아내는 이런 사람들을 집에 들였단 말인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노인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 보았고 주변의 분위기 또한 점차 이상해 졌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런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를 어쩐다 히데키가 우리집에 이런 사람들이 들락 거린다는걸 알면 사단이 날터인데, 아니 그보다 내가 총독부와 연결되려 한다는 걸 알면
이자들이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정신이 아찔해져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만세운동 당시, 나 또한 그 곳에 있었다.
참여 한건 아니었지만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지금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모두 순사들에게 매와 총을 맞고 끌려가지 않았던가...아내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되려고 나 몰래 이런 일을 꾸민 것인가...
아찔해진 정신을 잡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에 아내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