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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듬뿍 담은 쿠키 이야기
게시물ID : humorbest_10849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51
조회수 : 4040회
댓글수 : 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5/06/24 14:22:33
원본글 작성시간 : 2015/06/24 11: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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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모유를 먹던 아들이 이유식을 거쳐 이제는 건방지게 위대한 창조주인 나의 밥상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내가 다른 건 다 뺏겨도 밥만은 뺏길 수 없다며 저항하지만, 아들의 "주세요." 눈빛과 손짓 그리고 아빵하면서 나를 바라보면 어쩔 수 없이
와이프 몰래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나의 밥을 함께 나눠주고 있다. 

와이프는 건강하고, 힘도 좋으며 나와는 다르게 아주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현모양처이지만, 치명적 단점이 있다면 요리를 못 한다는 것이다. 
연애할 때 내 생일에 이벤트로 끓여준 미역국을 먹을 때 동해,서해, 남해의 신선한 바닷물을 대접으로 마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생일에 
기특하게도 바닷물을 아니 미역국을 끓여준 이벤트에 대한 감동과 "맛있지? 맛있지?"를 연발하는 와이프에게 "어 맛있어! 작년 경포대에서 마셨던
바로 그 맛이야! 이거 용왕이 된 기분인걸!."이라고 차마 할 수는 없었다. 
와이프의 음식 솜씨는 결혼 후에도 역시 발전하지 않았다. 신혼 때 기나긴 자취생활로 미각을 상실한 친구들을 모아놓고 집들이하던 날 
와이프가 가장 자신 있다는 음식인 닭도리탕을 선보였을 때 나를 포함한 친구들의 고개는 '이건 아니야!' 하며 하염없이 도리도리 젓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시원한 맥주 핑계를 대며 치킨을 시켜 먹고 그날의 공복을 달랬었다. 물론 남은 닭도리탕은 며칠간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 와이프에 대한
도리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내가 다 먹었다. 

모유를 떼고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 와이프는 아들이 이유식을 잘 먹지 않는다고 고민에 빠졌다.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이유식을 만드는 와이프
옆에서 차마 '우리 아들의 미각은 정상이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 음식을 입으로 넘긴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라며 와이프를 
위로하며 남긴 엄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이유식은 내가 다 먹었다. 신기하게도 고기를 넣어도, 해산물을 넣어도, 온갖 채소를 넣어도 뭔가 허전한 
그 맛은 항상 똑같았다. 그녀가 만든 이유식은 대학시 절 읽었던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아들이 이유식보다 어른들이 먹는 음식에 관심을 가질 즈음, 주말에 와이프를 쉬게 하고 내가 카레를 만든 적이 있다. (군대 취사병 출신에게 카레와 
짜장은 라면 끓이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고 쉬운 음식이기도 하다.) 어른들을 먹을 카레를 만들다 아들 것도 아주 연하게 가루로 볶아서 만들었는데 
아들은 그 카레 볶음을 마치 내가 17년 전 덕유산에서 조난했다가 이틀 만에 비빔밥을 먹을 때처럼 게걸스럽게 목숨을 걸고 먹고 있었다.
"삼삼아 그만 먹어. 아빠가 앞으로 주말에 한 번씩 해줄게. 천천히 먹어"라고 했지만, 아들은 수저도 집어 던지고 손으로 집어 먹고 있었다. 
와이프는 "뭐 3분 카레랑 별 차이 없네. 흥~" 이러며 3분 안에 밥 두 그릇을 비웠다. 이런 밥 도둑 모자를 봤나...
그리고 그날 아들은 맛있는 음식을 처음 맛보게 해준 아버지에게 마치 어른이 쏟아낸 것과 같은 양의 거대한 응가를 선물했다. 

주말 와이프와 함께 마트에 갔을 때 내게 "요즘 삼삼이가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 과일도 그렇고 과자도 엄청나게 좋아해. 그런데 아기들 과자가 
유기농같이 좋은 재료를 써서 그런지 너무 비싸다니까. 이런 몇 개 들어있지 않은 과자가 삼천 원이나 해."라며 아이 과자를 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생활비도 넉넉하게 조달하지 못하는 못난 가장의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재주 중 하나인 요리라도 해서 가사에 보탬이 돼야겠다는 생각에 
"그럼 내가 수제 쿠키라도 만들어볼까?" 라고 했다. 와이프는 "군대에서 그런 건 안해봤잖아? 할 수 있겠어?" 라고 하길래 
"뭐 별거 있겠어. 블로그 보니까 재료 잘 섞어서 오븐에 넣었다 나오면 완성이던데... 닭 튀기기보다 쉬워 보이더라" 
결국 우리는 마트에서 각종 홈베이킹 재료를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의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그리고 과거 전우들을 고사 상태로 만들었던 음식 솜씨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둘은 살짝 흥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와이프는 내일 조리원 동기들을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는데, 카톡으로 이미 남편이 아이를 위한 수제 쿠키를 만든다고 자랑을 했으며,
심지어 만날 때 함께 나눠 먹자고 했다고 기대하며 말했다. 
신혼 때 장만하고 오분도 쓰지 않은 오븐을 잡고 '우린 오늘 좋은 파트너가 될 거야. 잘 부탁한다.' 라며 로맨틱, 성공적인 쿠키 제작에 대해 
기원을 했다. 블로그에 있는 레시피대로 열심히 재료들을 손질하고 쿠키 제작 준비를 하는데, 와이프와 아들은 아빠가 만들어줄 쿠키를 기대하며 
잠들어 있었다. 나란히 침 흘리며 잠든 모자를 바라보며, 너희가 눈을 떴을 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쿠키를 맛보게 해줄게 하며 
예열된 170도의 오븐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반죽 하고 떨리는 심정으로 오븐에 넣었다. 

그리고 15분 후 
과거 군대 시절 사수는 음식의 종류는 '사람이 먹어야 할 것', 그리고 '먹지 말아야 할 것' 이렇게 두 가지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나는 사수를 뛰어넘어 "그냥 버려야 할 것" 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그냥 아들에게 맘 편하게 과자를 사주고 있다. 까짓거 다른데서 아끼지 ㅠ,ㅠ
출처 취사병이라고 음식을 잘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나의 요리솜씨.
그리고 세상에 빛을 보자마자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가련한 수제 계란 쿠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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