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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1)
게시물ID : history_108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2
조회수 : 84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8/03 20:14:04
ㆍ박정희의 유신 7년은 민초들 삶에 무엇을 남겼는가

2013년 나라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 나라에는 대통령이 세 명인 것 같다. 두 명의 전 대통령이 함께 한국을 통치하는 느낌이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끝없이 살아서 정쟁의 소재가 되고 우리를 괴롭힌다. 그들이 남긴 행적과 말에 매달리고 시시비비를 하느라 미래는 잘 안 보인다. ‘경제민주화’나 ‘대통합’ 같은 장밋빛 화두는 완전히 실종되고, 서민의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NLL 문제 공방이나 ‘귀태’ 발언 소동만 횡행한다. 모두 과거로부터 비롯된 증오정치의 소산이다. 박정희의 딸과 노무현의 비서실장이 맞대결한 대선을 치른 뒤끝이니 오죽하랴마는 해도 너무 한다. 앞으로의 5년에 희망이 있을까? 그런 정치야말로 구시대의 유물이자 마지막 쇼였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지만, 과연 우리가 그 유산들을 직시하고 미래를 위해 성찰할 수 있는 재료로 삼을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사람들 마음에 너무 깊이 과거가 남긴 상처가 남아 짓무르고 있고, 상처는 이제 비이성적이며 불합리한 진영 논리가 돼 버렸다.

박정희 시대가 남긴 기억과 상처, 그리고 유산의 양은 물론 다른 어떤 시대가 남긴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깊다. 그 기간은 무려 18년이었다. 지금부터 거꾸로 헤아려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시대 각 5년씩 15년에다 김영삼 시대의 일부까지 합쳐야 되는 참으로 길고 긴 기간이다. 유신 시대만 해도 무려 7년에 이른다. 실로 왕에 비견될 만하다. 북녘의 김씨들이 더 질기긴 하지만, 조선의 이씨 왕 중에서 18년 이상 통치한 자가 몇이나 될까.


197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이전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회 변화와 속도전을 경험했다. 그래서 ‘모든 낡은 것은 공기처럼 흩어지고 녹아났다’. 사진은 유신시대 학원가를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인문·역사학적 관점에서 유신의 삶과 문화 재조명

새로운 인문학과 역사학적 시야와 개념으로 유신 시대의 삶과 문화정치를 재조명하고, 그래서 새 시대를 맞는 데 콩알만큼의 성찰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을 모아 이 연재를 시작한다. 유신의 통치성과 박정희 국가는 흔히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의 개념으로 설명되어 왔고, 때로는 만주국이나 일제강점기 말기의 총동원체제에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두는 일리를 가진 것임과 동시에 뭔가 불충분한 것이다. 박정희 국가를 결정지은 동아시아의 냉전질서나 북한과의 관계, 또는 경제성장과 근대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대중의 문제를 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시대를 살아낸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재의 입장에서 유신의 정치사와 문화사를 입체적으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 연재를 통해 유신 시대의 본질이었지만 살펴지지 않은 이면, 즉 문화정치와 성정치 그리고 유신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을 새로 살펴볼 것이다. 가장 먼저 중점을 두고 말할 것은 그 시대의 근대화와 근대 경험에 대해서다. 

매년 10% 가까이 경제 규모가 팍팍 커지고 어디엔가 공업단지가 생겨나고 도시에 사람들과 건물이 빽빽해진다. 정부가 민생의 아주 작은 구석까지 통제하며 초등학생까지 새마을운동 같은 국가적 사업에 동원한다. 그래서 가능해진 ‘압축성장’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그 같은 ‘유신의 모더니즘’은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변화와 속도전을 경험하게 했다. 어느 석학이 말한 것처럼 이 산업화·근대화의 강력한 힘 앞에서 ‘모든 낡은 것은 공기처럼 흩어지고 녹아났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그때서야 처음 국가와 재벌의 위력을 제대로 체험하고 처음 공장에서 일하고 도시에서 살며 자본주의자가 돼 갔다.

흔히 박정희의 최대 업적을 경제성장과 근대화라 하지만, 그 기획은 비단 박정희의 것만도 아니었고,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도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절대빈곤과 봉건시대의 낡은 것들에 비해서는 물론 좋은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 그 자체로서 거대한 파괴와 또 다른 야만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뭔가 그렇게 빨리 축적되고 성장했다면, 그만큼 동시에 파괴되고 허물어졌다는 뜻이겠다. 유신 시대, 가족은 해체됐고 농촌은 무너졌다. 자살자도 대폭 늘어났고 범죄율도 높아졌다.

그러니 근대화는 하나가 아니다. 박정희식 근대화가 우리가 원한 것이었나? 그리고 박정희의 머릿속에 있던 ‘근대화’란 과연 무엇이었나? 박정희 자신은 메이지유신과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지체와 개인적 교양 수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를 성공한 근대화 혁명가로 만들고 보조한 것은 미국과 일본이 만들어준 국제적 환경, 그리고 박정희 주변의 또 다른 근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한편 일제강점기 이래의 ‘식민지 근대’가 키우거나, 아니면 1945년 이후 미국의 힘에 의해 급성장한 두뇌들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의 근대화 추진세력 속에는 피눈물 나는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근대화가 자기에게나 공동체에게 이익이 된다고 굳게 믿어준 민초들이 포함돼 있었다. 

■ 대중, 권력과 다른 방법으로 근대화에 참여

통치성에 자기통치자로서 대중도 연루된다. 권력과 엘리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중 또한 근대화에 깊숙이 함께 참여하고,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변화시켰다. 1960~1970년대를 거쳐 지금껏 성장해온, 민주주의와 대중의 힘을 생각하면 어쩌면 박정희나 그 독재 같은 것은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개항이나 3·1운동 같은 역사적 계기 이래, 한반도 주민 스스로가 근대화의 주역으로서 삶과 문화와 정치 모든 면에서 그렇게 능동적으로 삶을 변화시키고 바꾼 적이 없다. 그전에 근대화의 동력은 사실 외세나 위로부터 추동된 면이 더 많지 않았던가.

따라서 유신 시대 대중문화와 문화적 모더니즘의 성장은 결코 부차적이거나 2차적인 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의 대중문화는 더 다변화되고 폭이 훨씬 두꺼워졌다. 그것은 박정희의 탄압과 검열도 거스르지 못한 대세였다. TV와 라디오가 전체 국민들의 가정으로 보급되면서 일상의 문화는 물론 미디어와 인간의 관계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TV 앞에 앉아 인생을 보내는 호모TV쿠스가 출현했다.

<선데이서울> 같은 새로운 대중적 읽을거리가 부쩍 늘어난 독서 공중과 함께 인기를 끌었다.

사회 전체가 보유한 교양의 폭도 달라졌다. 개발과 경제발전의 결과가 축적됐을 뿐 아니라, 20세기가 개막된 이후 축적되어온 배움을 향한 대중의 열망이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되고 실현되기 시작했다.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여공들이 다닌 산업체특별학급에서부터 탄압에 신음하던 대학까지 한국 지성사는 새로워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본격 예술이나 서구적이고 전위적인 문화도 함께 유신의 검열체제를 뚫고 성장했다.

유신의 모더니즘과 근대화의 경험은 서로 다른 층위의 욕망과 행동양식을 결합하기도 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민족적인 것과 전통이 새롭게 구성되었다. 공주의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백제사가 새로 쓰여지고, 경주 개발과 함께 옛 신라의 천마총·황남대총이 발굴된 것도 1970년대의 일이다. 이충무공이나 신사임당도 박정희 정권 덕분에 새로 스타가 되었다. 말기의 박정희는 마치 반미주의자로 변신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유신의 독재가 미국식 패권이나 서구적 자유주의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최근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유신 시절에 선포된 9개의 긴급조치 모두를 위헌 무효 판결했다. 또한 긴급조치 9호 위반 재심사건에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은 ‘긴급조치’를 통해 이뤄진 박정희의 통치행위가 모두 ‘법 바깥’의 ‘예외상태’에서 이뤄진 위헌 행위라는 것을 법적으로 다시 판단했다. 그런데 이는 유신통치의 불법성을 보여주는 실례라기보다는 오히려 법의 무능함과 무용성을 보여주는 일 같다. 법은 법으로써 박정희 시대의 불법과 통치를 보족하고 보증해주지 않았던가. 박정희의 정치는 ‘법보다 주먹’이라는 명제에 충실하여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동의와 이데올로기의 기제도 다양했다. 그것은 단순히 ‘반공’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깊이 우리의 습속을 좌우하고, 오늘의 정치체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 개발·투기 열풍·창조경제, 70년대에 이미 나타나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과 과제가 1970년대에 벌써 괴물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잘 알려진 강남 개발과 투기 열풍, 그리고 토건자본의 성장뿐만 아니라 ‘창조경제’의 엄마 아빠들이 그때 나타났다. 공고와 공과대학, 기능올림픽이 대접을 받았다. 우리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대통령을 모신 것도 그 바람 덕분이다. ‘국민행복’의 아이디어도 박정희시대에 뿌리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료 자본주의에 힘입어 복지국가와 전 국민 의료보험 담론이 나왔다.

오늘날 글로벌대기업이 된 재벌들도 박정희 시대에 죽순처럼 쑥쑥 잘 자라났다. 언제나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을 폈지만,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담론도 박정희 시대의 말기에 수입되기 시작했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자유민주주의와 정치적으로는 대립하는 것 같았지만, 본질적으로 부자와 특권층 중심 경제의 수호자였던 박정희식 정치야말로 한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창조자이기도 했다.

■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자로 성장

우리는 유신의 아들딸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이미 보여준 것처럼, 우리 아동·청소년기는 유신의 학교에서 유신의 선생들이 휘두르는 주먹과 말도 안되는 체제선전으로 얼룩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자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전태일과 김상진도 있었지만, 사실 어린 우리는 그들을 잘 알지는 못했다. 중대한 사건들은 유신의 검열관들이 다 감춰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 서울의 공기가 너무 답답해서 옷을 홀랑 다 벗고 종로 거리를 내달린 스트리커(나체질주자)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든가, “왜 불러? 왜 불러?” 같은 안타깝고도 건방지게 들리는 노랫말이나, 미스터리로 감춰진 모호한 사건들로부터 우리는 어딘가에서 저항이 꿈틀대고, 박정희의 체제가 겉과 달리 불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1979년 10월, 부산ㆍ마산의 항쟁과 궁정동의 총소리가 들렸을 때 우리는 여전히 어렸지만, ‘결국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알았고, 18년 독재와 늙은 왕이 사라진 자리에 거대한 새 꽃이 필 거라는 것쯤은 예감할 수 있었다.

한 시대는 그런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신 시대의 모더니즘과 산업화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집단적 새 경험이자 길의 출발이었다. 그래서 긴긴 성찰의 대상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021916525&code=210100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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