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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급적 꾸준히 쓰려고 노력하는 짧은 글쓰기(7)
게시물ID : readers_217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18
추천 : 8
조회수 : 35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9/12 00:38:09
* 언젠가 증손자에게 물려줄 물건을 하나 고르고, 왜 그걸 골랐는지 아이에게 설명하는 편지를 써라.

네가 이 편지와 함께 내가 남기는 작은 선물을 받게될 쯤에,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아마 너는 내 아들놈,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그 놈을 그렇게 키운 게 바로 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두마.

편지와 함께 작은 종이 상자를 하나 받았을 거다. 이제 그걸 열어보렴.
열어서 내용물을 꺼낼 때는 손을 조심해야 할 거다. 날카로운 물건이 들었으니까.

이 할애비가 그런 물건을 네게 남겼다고 해서 지나친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칼이란 건 여러가지로 쓸모가 있는 물건이지. 칼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정신나간 살인마는 아닐게다.

가능하다면 날이 잘 선 새 물건을 남겨주고 싶었다만, 할애비가 쓰던 물건을 네게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 놈을 상자에 넣었다.
나이프를 사용해 볼 생각이 있다면 나잇값 못 하는 내 아들놈,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에게 용돈을 달라고 해서 더 좋은 것을 사렴.

그 칼은 내가 30년이 넘도록 들고 다닌 물건이란다.

사실 이 할애비는 어릴 적부터도 칼이나 총같은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칼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직장에 있을 수 없게 된 후였지.
그때의 나는 심한 마음의 병을 앓게 됐단다.

남자는 자신의 능력과 목표를 명확하게 드러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란다.
그 어떤 남자라도 하루 아침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단을 잃는다면 우리에 갇힌 토끼보다도 더 약한 존재가 되어버릴 거다.

실제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루하루 약해지는 내 자신을 느끼는 것이 너무 싫었단다.
그래서 내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찾아낸 것이 나를 자연 속에 내던지는 것이었단다.
산과 들에서의 삶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무기나 도구를 뛰어넘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값싸고 튼튼한 그 칼을 구하게 된 거란다.
그 칼을 차고 산이며 들로 나다니기 시작한 뒤로 나는 점점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했지.
책상머리에 앉아있을 때와는 다른 존재감과 충실감을 느꼈단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 네 증조할머니는 생전 처음으로 나에게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지.
그렇게 욕을 먹을 때도 그 칼은 내 발목에 동여매어져 있었다.

그 칼로 예쁜 꽃을 뿌리채 캐서 네 할머니에게 선물하려다 굴러 떨어져 환갑이 다가오는 나이에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었지.
네 아버지, 나의 손자에게 선물할 나무로 된 부적을 깎을 때도 그 칼을 썼단다.
칼 끝 쪽에 이빨이 나간 게 보일텐데, 그건 집에서 호두를 쪼개먹으려다가 파인 거란다.

그 칼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내 손에 들어온 뒤에는 나의 모든 순간에 함께 했단다.
이 할애비가 네게 그 칼을 선물하는 건 할애비의 손길이 스며든 물건을 들고 감상에 젖으라는 뜻은 아니다.

이 할애비에게 왜 그 칼이 필요했고, 그 칼이 되찾아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거란다.
만약 네가 그 칼 대신 다른 물건에서 같은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그 물건을 네 자손들에게 물려줘도 좋겠구나.

아마 살면서 쓴 글 중에는 제일 긴 글인 것 같다.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는데 글로 써도 똑같구나.


가능하다면 그 칼을 잘 보관해다오. 별로 흥미가 없다면 다시 네 할아버지에게 돌려줘도 괜찮다.
대신 칼을 싸고 있던 종이는 기름이 매겨진 거니까 버리지 말고 다시 잘 포장해 놓으려무나.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 할애비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너를 사랑할 거고, 또 사랑했단다.

좋은 남자가 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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