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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할머니“내 팔자가 그렇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오키나와의 할머니
게시물ID : sisa_10885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희망별곡★
추천 : 17
조회수 : 62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07/30 23:30:39
배 할머니는 인터뷰에서 늘 “내가 가난했던 탓”이라거나 “내 팔자가 그렇다”고 말했다.
"나는 오키나와 종군위안부였다" 그녀가 고국에 못돌아온 이유는..
‘나는 종군위안부였다.’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이처럼 아픈 과거를 공개 증언해 큰 반향을 불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1975년 10월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힌 배봉기 할머니(1914~1991)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배봉기 할머니는 원해서 과거를 드러낸 건 아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남았다 불법체류로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자
당국에 자신의 사연을 밝히고 그곳에 살게 해달라고 탄원했다.
결국 특별영주자격을 얻은 할머니는 당시 현지 신문에 가명으로 응한 인터뷰에서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에 야마타니 데쓰오(山谷哲夫·71) 감독이 그를 인터뷰한 기록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아는 사람은 더 드물었다.
야마타니 감독이 이 영화를 찍던 1978년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종군위안부 문제는 관심을 끌기 전이었다.
“우연히 종군위안부 관련 사진을 본 뒤 작품 주제로 정했다.
몇 번이나 한국에 가서 피해자를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한국인이 유력한 증언을 해줬다.”
그는 “실전이 있거나 부대이동이 있을 경우 심할 때는 여성 한명이 하루 17시간, 200명 이상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는 인터뷰에서 늘 “내가 가난했던 탓”이라거나 “내 팔자가 그렇다”고 말했다.
고생이 많았던 탓에 여생을 무서운 두통과 신경통,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두통이 심해지면 며칠을 집안에 틀어박혀서 소리를 질러 동네 아이들은 ‘미친 할머니’라 불렀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우롱당한 할머니는 늘 고독했다.
1991년 10월 세상을 떠날 때도 혼자였다.
잠든 듯 세상을 뜬 할머니는 며칠 뒤에야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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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할머니께서 자신의 팔자라고 자책하신것이 너무나 아프고 아프네요.
팔자...........
그렇게 생각할 때 얼마나 서럽고 원통하고 슬프셨을까?
저 말이 너무 슬퍼요.
얼마나 악몽같았을까?
저 분들 한을 풀어드려야 할텐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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