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전후 조선의 뉴딜 정책, 여민휴식(feat, 선조)
게시물ID : history_229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rGuinness
추천 : 5
조회수 : 2625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5/09/13 22:03:03
옵션
  • 창작글
 한국에서 17세기는 1600년이 아닌 1598년, 왜란 종결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17세기는 결코 조선에게 좋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두 차례의 외침은 물론이고 소빙기로 인하여 경신대기근이 몰아치는 등 그야 말로 혼돈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조선 왕조는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피폐해진 민간을 되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방법을 채택해야만 했습니다.

1600년 9월, 비변사는 12개조를 선조에게 제출함으로써, 본격적인 전후복구를 시작하려 했습니다. 조정은 더이상 민간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유의하며 왕조 재건의 추제는 어디까지나 민간사회와 백성이며, 이들의 경제적 성장과 안정을 통해서 조선 또한 부흥할 수 있다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는' 여민휴식(與民休息)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전한 초기 문제와 경제의 정책에서 따온 이 정책은 왕실이 주도하는 철저한 절약과 절검,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경세 정책,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형벌 완화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는 아마 한나라 초기의 상태가 임진왜란이 갓 끝난 조선의 그 것과 같다는 점에서 이뤄진 생각이었으며 선조는 대부분의 개혁안을 수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여민휴식 정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 데, 하나는 적극적인 권농 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고, 중앙과 지방 관총들의 재정 자립도를 향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조정은 임진년 부터 적극적인 둔전과 개간을 추천한 만큼, 권농정책에 적극적이었고 이는 지방관들의 태도로부터 나타났습니다. 개간사업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으려 했던 지방관들은 종자나 농우를 민초들에게 지급하였을뿐만 아니라 개간된 농지에는 파격적인 세금감면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방의 적극적인 개간은 종전 10년 만에 과열을 우려한 나머지 조정에서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꽤 성공적인 복구사업이 진행됨을 알리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사회 안정과 경제 회복의 우호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정부가 부세제도의 개혁을 포함해서 각종 재정개혁을 단행한 것이었습니다. 12개조 중 특히 제2조는 전란 전 농민들이 진 부채를 모조리 탕감해주는 조처였으며 태어날 때 부터 막대한 부채를 안고 태어난 16세기의 농민들에게는 그야말로 환영할만한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조정은 불필요한 지출은 모조리 줄이는 등, 과격할 정도로의 감축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안정적인 세수를 거두기 위해 세수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안정적인 공급을 위하여 농민들의 세금을 줄이거나 감면하는 등, 민간을 최대한 배려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조정의 노력은 17세기에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후 10여년 만에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불안이 회복되었으며 17세기 중반 쯤에 가면 급격한 인구 증가와 경제적 번영을 통해 새로운 농업기술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농민들의 영양상태 또한 개선되기 시작합니다. 또한 일본산 은의 유입으로 인해 조선은 한중일 삼각무역의 주요 지역으로써 많은 부를 축적한 동시에 사치와 향락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효종 3년, 전 판서 조경은 '중국의 능화지로 벽을 바르고 능단과 금수로 만든 옷을 해 입고, 최상의 말을 타고,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풍조'가 서울 고관뿐만 아니라 시정의 하층민들에게 까지 만연했다고 한탄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역 사족들까지 편승 하는 등, 사치 낭비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에 가까운 조정의 태도는 민간의 중흥을 불러일으켜왔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대한 비개입은 지배층의 부의 독점화와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한 사회양극화 현상을 크게 일으켰으며 소빙기는 더 이상 민간이 모든 것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그렇기에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은 민간 영역에 대한 정부의 최소 개입보다는 강력한 정부 개입을 필요로 했고 숙종, 영조, 정조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왕권을 지닌 왕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됩니다.
출처 김성우, 전쟁과 번영-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역사비평, 2014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