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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릉급 무덤들이 도굴을 피할수있었던 이유...
게시물ID : history_229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ckk
추천 : 3
조회수 : 182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9/14 1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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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도 대단했네요
왠지 당시 왕/제사장 급 분들에 대한 경외하는 문화도 장난아니었던듯..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50913170031553

[여적]신라임금 이발하는 날

경향신문 | 이기환 논설위원 
.......일본인마저 한숨 쉰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고분들이 있었다.


4세기 후반~6세기 전반 사이에 왕경(경주) 안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들이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묘제 덕분이었다. 돌로만 쌓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과 달리 

........

이 시기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차례차례 두껍게 쌓은 형태였다. 

돌과 흙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령 황남대총 남분의 전체 체적은 4만2291㎥에 이르렀다. 

2.5t 트럭 2만4877대가 실어 날라야 하는 양이다. 나무 관 위에 곧바로 덮은 자갈돌(적석)의 양만 쳐도 1290㎥에 달했다. 돌의 양만 2.5t 트럭 758대분이었던 것이다. 

실제 1900년대 초반 경주 황남동 고분군을 첫 발굴한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했지만 자갈돌이 끊이지 않고 나오자 끝내 조사를 중단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조선통감부의 지원 아래 권총까지 차고 공식발굴에 임했던 이마니시마저 끊임없이 솟구치는 자갈돌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만 것이다.

“도굴을 하려면 갱도를 뚫어야 하는데 그 엄청난 돌과 흙을 감당할 수 없죠. 곧 무너져서 생매장될 수밖에 없으니까…”(이한상 대전대 교수). 게다가 시간이 흘러 돌과 흙이 와르르 무너져 목관과 완전히 밀착됐기 때문에 관속 유물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신라인들은 이 왕릉급 무덤들에 금(동)관을 비롯한 황금유물들을 묻어놓았다. 살아있을 때처럼 사후세계까지 지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처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5091317003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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