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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 경찰의 성추행 수사를 피해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지난 8일 낮(현지시각), 박근혜 대통령은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미국 기업인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제너럴모터스(GM)의 대니얼 애커슨 회장은 "한국에 80억달러를 추가 투자하려는데, 통상임금 문제를 한국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 경제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다. 꼭 풀어나가겠다"고 답했다. 애커슨 회장은 크게 안도했다고 한다.
언뜻 보면 대통령의 성공적인 외자유치 활동이겠다. 대통령 자신부터 그렇게 믿었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한국 대통령에게 통상임금에 대한 '애로'를 호소한 지엠은 통상임금 관련 소송의 당사자다. 이미 1·2심에서 패소해 대법원에 상고한 사건도 있다. 패소가 확정되면 체불임금 반환 등에 8000여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니, 이해관계가 크다. 그런 당사자의 '민원'을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한 박 대통령은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 된다. 부적절한뿐더러, 헌법의 삼권분립 원칙을 무시한 제왕적 행태다. 부끄럽게도, 한국은 대통령 말 한마디로 법원 판결도 바뀌는 나라로 비친다.
대통령이 약속한 '해결'이 노동정책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문제가 크다. '각종 수당 계산의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에 무엇이 포함되느냐'는 물음에, 대법원은 지난 십수 년 동안 한결같이 '기본급 말고도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돈은 모두 통상임금'이라고 답해왔다. 그 뿌리는 꽤 깊다. 대법원은 1996년 2월9일 "1개월을 넘는 기간마다 지급되더라도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것이라면 통상임금"이라고 판결했고, 1995년 12월21일 전원합의체 판결에선 '임금은 근로의 대가인 교환적 임금과 근로자의 복리·후생을 위한 보장적 임금으로 나뉜다'는 기존의 임금이분설을 폐기하고 "임금은 모두 구체적 근로의 대가"라고 선언했다. "분기별로 일정 금액이 지급되는 상여금과 근속수당도 통상임금"이라는 2012년 3월 대법원 판결은 이 판례들을 따른 것이다. 그 이전인 2010년과 2011년 한국지엠 노조 사건의 1·2심 선고에서도 법원은 "성과급, 양복값, 세금환불금, 학자금 등 명목을 불문하고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된 것이면 임금"이라고 판시했다. "정기상여금·근속수당·가족수당 등은 '생활보조적·복리후생적 급여'이므로 통상임금에서 제외한다"는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법원 판결과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터에 정부가 통상임금의 범위를 새로 정하겠다거나, 법원 판결은 특이한 경우에만 해당할 뿐이라고 또 억지를 부린다면 사법부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 된다.
외국 기업의 '민원'으로 논란이 불거졌다는 점은 불길하기까지 하다. 외국 투자기업이 자신의 이익이 침해됐다며 국가 정책이나 법원 판결까지 문제삼아 국제 중재에 넘길 것이라는 걱정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때부터 있었다. 이번 일은 어쩌면 그 예고일 수 있다.
따지자면 통상임금 논란은 기본급이 전체 급여의 40% 정도에 불과한, 한국만의 기형적 임금구조에서 비롯됐다. 기본급도, 수당도 적게 주면서 장시간 근로로 몰던 과거의 우울한 유산이다. 그런 구태가 '창조경제'일 수 없고, 기업 편을 들면서 사법부의 '협조'를 압박하는 게 '새로운 미래'일 수도 없다. 법원이 여기에 굴복한다면 그 결과는 더 끔찍하다. 월급쟁이들이 임금을 더 받고 말고에 그치지 않고, 사법부의 독립과 신뢰 등 헌정체제의 문제가 된다. 지금 인터넷을 달구는 윤창중 사건보다 이 일이 더 큰 일로 여겨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