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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꿈의 메스 3화+4화
게시물ID : readers_109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떠돌이참견꾼
추천 : 0
조회수 : 26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1/14 23:42:46
여자는 그 길로 곧장 의대를 빠져나와 독립대 정문으로 향했다.
그 곳엔 여자의 보좌관 김만복이 탄 차가 있었다. 
2013년 최고의 한파를 기록한 날답게 차의 배기통에서 나오는 연기도 하얗게 제 형체를 연신 드러내고 있었다.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뛰어 차 문을 급히 열고는 차에 올라탔다.
여자는 차 문을 닫고도 두 손으로 자신의 두 팔을 반복적으로 문질러댔다.
뒷자리에 탄 여자 옆엔 만복이 있었는데 그는 그녀에게 포근한 담요 하나를 덮어줬다.
담요 겉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곰돌이가 수 십 마리나 프린트되어 있었다.


"야 이거 뭐냐?"


"담요죠?"


여자는 담요를 팽개치며 말했다.


"얌마! 누가 그걸 몰라? 
나 이딴 유치한거 안 덮어."


만복은 여자가 팽개친 담요를 주워 다시 여자에게 덮어준다.


"에이, 의원님 그래도 덮으세요. 날 추운날 괜히 아플 수 있잖아요."


여자는 만복이 덮어준 담요를 못 이긴 척 계속 덮고 있는다.
담요를 내팽개치자마자 몸이 오슬오슬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차에 히터는 오래동안 틀어져 있었지만 방금 바깥에 있다 막 들어온 그녀였다.


"차 기사, 집으로 향해."


"네, 의원님."


만복이 자신의 검은색 서류가방을 뒤지더니 스테이플러로 고정된 문서 묶음을 여자에게 건내줬다. 그 서류의 분량은 A4용지 3장 정도 되었다.


"이건 또 뭐야.."


"방금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습니다. 국내외 언론 및 여론의 반응, 향후 정세 예상 등을 정리한 문건입니다."


여자는 그 서류를 받자마자 본체만체 내팽개친다.


"아 몰라.. 벌써 6시야. 의원도 좀 쉬어야지!
이 놈의 직업은 쉬는 시간이 따로 안 정해져 있는거야 왜!"


만복은 여자가 팽개친 문서묶음을 주워 여자의 서류가방에 넣어준다.


"집에 가서 쉬시고 읽어보세요."


"나 잔다."


여자는 금새 골아떨어져서는 코까지 쿨쿨 골았댔다.
도시의 해는 어느새 떨어져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만복은 가만히 차가운 창 밖만 바라본다. 
창 밖의 도시는 오늘도 고요하다.


그렇게 여자를 태운 검은 차는 30분 여를 내달려 평양에 도착했다.


※ 소설의 가상의 대한민국에는 6.25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고층빌딩들이 유난히 즐비한 곳에 차가 멈추었고 기사가 여자를 깨우려 몸을 돌렸다.
만복은 웃으며 손을 가로젓는다. 기다려달란 소리였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나고 만복은 여자를 조심스레 깨운다.
갑자기 일어나게 되면 누구든지 기분 나쁠테니까 서서히 깨우려 함이었다. 


"의원님? 의원님?"


"아...음..."


"집입니다. 들어가셔서 푹 주무세요."


"..."


"의원님?"


"... 아... 망할... 알았어.."


여자는 눈을 비비며 못내 일어난다. 


"벌써 다왔냐.. 아오.. 나 간다."


"네, 잘 들어가세요."


차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한 경비원은 경비실에 앉아 경례를 한다. 여자는 봤지만 못 본 척 태연하게 현관문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웃옷 안주머니에서 전자카드를 꺼내 현관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카드입력장치에 밀착시킨다.


삑- "확인되었습니다."


감정 없는 기계음성과 함께 현관문은 스르륵 좌우로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간 그녀는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 윗층과 아래층을 살피는 습관이 있다. 물론 눈으로만 살핀다. 
수상한 사람이 없음에 마음 깊숙히 안도한다. 


삐비비비비비빅- 띠로링.


문이 열리고 여자는 드디어 고대하던 집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손잡이를 꼬옥 잡고 있다.


띠로롱.


"아아~ 집이다!"


여자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밍크코트, 입고 있던 정장 마이와 치마 그리고 검은색 팬티 스타킹까지 모두 벗어던진다. 핑크색 브래지어도 귀찮은 듯 풀어버린다.
그러고는 곰돌이가 그려진 분홍색 팬티만 입은 상태로 침대에 곧장 눕는다.

어? 잠깐만.. 저 곰돌이 캐릭터 그 담요에 그려져 있던 거랑 똑같은데?

그러고보니 브래지어에도 똑같은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음음.. 어쨌든..


홀로 사는 원룸에 바닥까지 내려가있는 블라인드가 모든 창문을 가리고 있다. 
신발장 천장에 설치되어 있던 자동센서 전등불이 꺼지자 원룸 가운데에 있는 LED 조명이 하나 자동으로 켜져 온 방안을 밝혔다.
이것이 켜지지 않았다면 이 방에 불빛이란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침대에 누운 여자는 오늘 막 차에 올랐을 때처럼 조금의 지체도 없이 꿈나라로 향했다.
오후 7시 10분, 도심의 불빛들이 한창 성행했을 시간대다. 
하지만 그녀의 방 안은 고요하다.


"아음... 여러분... 죄송해요... 음..."


여자는 잠꼬대로 별안간에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어딘가 아픈 듯 뒤척이고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한다.


"잘못했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새벽 3시, 모두가 한창 잠에 취해있을 때 여자는 다시금 눈을 떴다.
집에 들어온 후 8시간 정도를 내리 자버린 것이다.
한참을 이불 속에서 사투를 벌인 후에야 그녀의 눈은 말똥말똥 생기를 되찾았다.


"아 씨..."


여자는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가 찾은 것은 무색의 보드카였다. 
여자는 소주잔도 함께 꺼내고는 네모난 각진 식탁에 앉았다.
다리를 긁적이며 보드카 세 잔을 내리마신다.


"아 이제 정신 좀 드네.. 망할.."


여자는 러시안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책장 옆 책상으로 향했다.
노트북의 전원을 키고 인터넷에 접속한 뒤 메일을 살핀다.


"음... 의원님... 재능1동 재건축 위원장입니다..."


여자는 그 메일을 읽지 않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휴지통에 버린다.


"의원님... 저희 애가 많이 아파요... 음."


그녀는 메일을 클릭하고 그 메일을 보낸 사람이 구구절절 적어 보낸 사연을 읽었다.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자신의 팬이라는 소리였다. 의원님이 싸인한 책을 선물받고 싶다는 부탁의 말도 있었다.


"책 값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이 아줌마가 날 뭘로 보고.."


그 메일엔 해맑게 웃고 있는 한 남자아이의 사진도 있었다.
항암치료 때문인지 민둥산 같은 아이의 머리에 소복히 내려앉은 겨울 눈처럼 하얀 털모자가 씌워져있다.


"고놈.. 여자애처럼 이쁘게도 생겼네.."


여자는 그것을 모두 읽고나서 '소중'이라고 이름 붙여진 자신의 메일함에 이동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또 눈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웅... 나도 이제 늙었나.. 상습적으로 졸리네.. 일단 10분만 눈 좀 감자.."


의자 머리받침대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는 스르르 눈을 감는다.


"음냐..."


...


낮잠에 빠진 여자의 두뇌가 얕은 정도의 수면상태로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여자는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꿈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 어린 날의 악몽과 불편히 마주하게 되었다.


이 괴로운 세계엔 여자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심지어 그는 주요 등장인물에 속한다. 아직 약간 남아 있는 여자의 의식이 이 악몽에서 한 시 빨리 깨려 하지만 실제의 그 이야기처럼 이 세계는 적어도 꿈에서는 몇 일간 지속된다. 끝날 듯 그러나 끝나지 않는다. 


고통은 그 날들이 지날 수록 보다 짙어진다. 종이 위에, 흐르는 잉크로 가득찬 색깔 펜을 가만히 대고 있듯 서서히 그 색깔, 예컨대 핏빛 또는 암흑이 퍼져간다. 
그 색이 너무 짙어져 더 이상 그 색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종이가 그 심연같은 어둠을 견뎌내지 못하고 구멍이 나버리듯, 이 세계가 주는 쓰라린 고통도 그녀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내버릴 것처럼 위협해댔다.
꿈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소리치지만 끝내 지치고 결국엔 그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그리고 여자는 어김없이 그에게 해방당한다. 그렇게 자유없는 자유가 찾아온다.


여자가 족쇄를 찬 한 마리의 참새가 되어서야 꿈은 끝이 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렇지 않으면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종적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헉!"


허억.. 허억..


꿈에서 막 깨어난 여자는 가쁜 숨을 내몰아쉬기 바빠 보인다. 
그녀는 책상에 자신의 고개를 파묻었지만 함부러 눈을 감진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책상에 엎드리는 것처럼 팔로 햇빛을 막지도 않았다. 어둠이 찾아오면 다시 그 악몽이 되풀이 될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5분 쯤 지났을까? 이마에서 시작된 식은땀이 여자의 날카로운 턱선 부근까지 내려왔을 때 그녀는 겨우 자신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최소한 1분 정도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제서야 여자의 시선은 허공이 아닌 현실로 시점을 이동하기 시작한다. 


"3시 45분.. 30분 정도 지났구나.."


그녀는 그제서야 평상시의 아침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아직 읽지않은 수많은 메일들을 하나씩 열어보고 밀린 서류들을 확인∙정리한다.
아침은 그녀에게 가장 바쁜 시간 중 하나다.


8시 정도에 아침업무를 모두 마친 그녀는 스스로 밥을 차려 먹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갖춰입으며 필요했던 정신적 휴식을 취한다.


여기까지가 오전 9시다.
그녀가 집 밖으로 나오니 그녀의 보좌관 만복과 차가 대기하고 있다. 
여자를 발견한 만복이 차 문을 깍듯이 열어주고 그녀는 차를 탄다.
새벽의 악몽은 잊은 듯한 도도한 몸짓으로..


"진성그룹 본사."


차는 여자의 말 한마디에 황해북도 개성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개성시로 향하기 막 시작했을 땐 마치 해가 땅으로 기울 듯 건물들의 높이도 점점 낮아졌다. 하지만 황해북도에 도달하고 그곳에서도 개성시로 향하기 시작했을 땐 해가 기운 후 달이 떠오르듯 건물들의 높이가 다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높아졌다. 
그러다 커다란 도로와 빽빽이 들어선 고층건물들만이 시야에 닿는 곳에서 차가 멈춰섰다. 전면이 유리로 된 커다랗고 높은 건물 앞에서야 여자의 행선이 마침표를 찍었다.


"아가씨 다 왔습니다."


여자는 대답없이 무거운 얼굴로 차에서 내려 건물에 들어섰다. 물론 차 문은 만복이 열어주었다.
건물 곳곳엔 황금의 장식이 있었다. 천장엔 갖가지 거대 조명들도 매달려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 유럽 귀족들의 연회장에 온 기분이 드는 곳이다.
인테리어는 한 신념 깊은 유능한 디자이너에 의해 창조된 듯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규격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이런 인테리어처럼 각이 잡혀 있다. 
심지어 말단직원인 경비원들까지도 깔끔한 복장에 작위적인 웃음까지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재단되어 있는 것만 같은 인상을 주었다. 


여자의 난데없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경비원은 물론이고 사옥에 있던 여러 직원들은 그녀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자는 가벼운 웃음 정도로 자신의 인사를 대체했다.


이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5대가 있는데 그 중 엘리베이터 4대는 일반 사원용으로 한 편에 모여있다. 하지만 나머지 1대는 따로 떨어진 곳에 마련되어 있는데 이것은 간부용이다.
간부용 엘리베이터로 진입하기 위해선 이곳만을 따로 통제하는 경비원의 재가가 필요한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잠시 멈춰달라는 검문 지시 대신에 공손한 손 인사를 곁들인 형식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간부용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한 늘그막한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 탑승을 위해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중절모를 손수 벗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갈한 콧수염에 칙칙한 검은색의 코트까지 전형적인 영국 신사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이다. 
이번에는 여자도 목례정도의 인사는 한다. 


"유 이사님 아니세요? 요즘 재현이는 좀 어때요? 공부 좀 해요?"


심지어 말도 먼저 걸었다.



"허허.. 손자 녀석 사랑은 할애비가 다 한다는데.. 영 정이 안 가는 녀석이네요. 어찌 그리 지 애비를 닮아 글자를 멀리하는지 걱정이 되네.. 허허.."


"하하, 그땐 다 그러는 거죠, 뭐. 이제 겨우 15살이잖아요."


"허허.. 그나저나 회사엔 어쩐 일로..?"


"그냥 뭐 아버지 보러 온 거죠."


"아.. 그러시군요.."


...


약간의 어색한 침묵 끝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유 이사는 32층을, 여자는 33층을 누른다.


...


엘리베이터가 한 5층 쯤 올랐을 때 유 이사가 정적을 깨고자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허허.. 요즘 아가씨 바쁘시죠?"


"저요? 바쁠 게... 음... 글쎄요."


노인의 난데없는 질문에 여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요즘 국가 정세가 좀 어지럽잖아요? 고놈들 그거 힘겨루기 하는 틈에.. 고래들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거 아니겠지요? 허허.."


"아아.. 에.. 뭐 저는 사실 별 상관 없어요. 그냥 시키는 일 하는 건데요 뭐.. 그래도 위에서 내리는 지시는 확실히 더 많아졌으니 그 전보다 바쁘긴 하네요."


노인은 그녀의 별 영양가 없는 대답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이야기를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고민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말 없이 엘리베이터 층수만 괜히 확인한다. 이 여성은 아무래도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승강기 한복판에서 노인은 손톱으로 연신 지팡이를 두드려댔고 여자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의미없이 떨어댔다.


"허허.. 그럼 아버지 잘 뵙고 가세요."


그렇게 힘겹게 시간이 흘러 32층에 엘리베이터가 도달했고 노인은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 후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에서 재빨리 내렸다.


"네. 항상 건강하세요."


이번에는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노인에게 먼저 목례를 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바람에 노인은 인사를 하지 못했다.
노인의 몸짓은 아침 햇살에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한 마리의 굼벵이마냥 굼뜨기 그지 없다. 두꺼운 철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33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 전, 여자는 무대를 목전에 둔 배우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는 한 차례 깊게 숨을 들이마쉬고 내뱉었다.


"후.."


문이 열리고 그녀는 마치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다.


'난 괜찮아. 후.. 난 괜찮아.'


머리 속으로 자기암시도 열심히 해보지만 영 소용이 없는지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다. 여자에게는 이것이 윗층 꼬마아이가 한 밤 중에 방방 뛰어대는 소리처럼 짜증스럽게 들렸다.


'아 씨..'


33층엔 원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대문과 그 앞에서 그것을 지키고 있는 충직한 여비서 한 명만이 있었다. 대문은 특별한 알림판 없이도 "나 회장실'이라고 써져있는 것 같이 거대한 위용을 자아내고 있다.
그것은 비서의 키의 족히 두배는 되었다.
비서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인터폰을 통해 회장실에 연락을 시도했다.


삐- "회장님, 아가씨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비서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그 앞에 서서 그녀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좋은 하루 되세요 아가씨."


여자는 비서에겐 눈길하나 주지 않고 회장실로 들어갔다. 비서는 그녀가 회장실에 들어선 후 조심스레 열었던 문을 닫을 뿐이다.
이내 닫혀진 대문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툭- ...


회장실 역시 이 건물 내부 전체와 동일한 패턴으로 장식이 되어 있다.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한 넓은 창으로 따스한 햇살이 골고루 방안에 퍼져있다.
코끼리 상아와 갖가지 종류의 원목으로 제작된 가구들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다.


회장실 한 편엔 접견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여자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젊은 청년과 같은 검고 생명력 넘치는 머리칼을 지닌 노년의 신사는 세련되었지만 중후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깊게 패인 이마 주름들이 인상적이다.


"몸도 안좋으시면서 뭐하러 움직이셨어요."


접견테이블 앞 노인이 앉은 의자 옆에 지팡이가 하나 놓여져 있다.
검은색 지팡이는 은으로 제작된 호랑이 대가리로 화룡정점을 찍어 그 멋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형상이다.
한가지 흠이라면 호랑이의 표정이 너무나도 용맹해서 지팡이를 쥘 때 그것이 나의 손을 물지는 않을까 겁을 먹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됐다. 늙은이 이렇게라도 움직여야지.."


노인은 한 번의 눈길도 없이 대답했다. 군살 하나 없는 무덤덤한 말투였다.
이제보니 노인의 얼굴은 자신의 지팡이의 험상궂은 호랑이를 꼭 닮았다.


삐- "임 비서, 여기 차 두 잔 내와.. 콜록콜록.."


"네 알겠습니다."


노인이 인터폰을 통해 비서에게 지시를 내릴 동안 여자는 접견테이블 양 옆에 있는 4개의 의자 중 한 개의 의자를 골라 앉았다.
노인의 좌측에 위치해있으면서도 그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
그녀가 자리에 앉자 노인이 말을 꺼냈다.


"일은 다 처리했냐?"


"50% 정도는 된 것 같아요. 임상의학 정교수 급까지 모두 채웠으니까.."


여자가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은색 서류가방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노인은 접견테이블에 놓여있던 돋보기 안경을 꺼내들어 그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그 눈매가 경험 많은 늙은 매가 사냥할 때처럼 노련하게 보였다.


"흠.. 내과 송성식, 외과 최영호, 소아과.. 얌마 소아과∙산부인과 이런 건 돈 안 되는거 아니야?"


"그런거 있어야 허가가 나와요."


"내 돈 주고 내가 병원 세운다고 하는데 그것도 허가가 필요하다는 거냐?"


"법률안 공포 전까진 병원 간판도 못 달아요 아버지. 현행법 상으론 돈 버는 병원 자체가 금지에요."


"하이튼 조선 놈들 돈 우습게 보는 건 알아줘야 돼. 그기 얼마나 중요한건데.
나중에 돈 필요해봐. 죄다 거지되지. 쯧쯧.."


"걱정마세요. 여론 형성 과정은 차질 없이 진행 중이에요."


"확실히 해라. 국운이 달린 것이야.. 콜록콜록.."


"네.."


"기초의학은 아직이냐?"


"아직 접촉 중에 있습니다."


"그기 나중에 큰 돈 될거야. 단디 신경써."


"네."


문이 열리고 비서가 차 두잔이 올려진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 다소곳이 접견테이블로 걸어왔다. 여자와 회장은 비서에게 차를 한 잔씩 건네받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들로 황급히 서로의 시선을 거뒀다. 은은한 초록빛을 띄고있는 차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봄 기운을 닮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비서가 회장실을 나서고 여지없이 침묵이 회장실을 감돌았다.


스릅- 스릅..


차를 넘기는 목의 울림들 만이 이 곳에 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는 듯 했다.


째깍.. 째깍..


'아 이 방에 시계가 있었구나..'


"음음!"


여자는 용감히 어색한 정적을 깨고 서류가방에서 또 하나의 서류를 꺼내들었다.


"또냐?"


"네.."


"그 놈의 자식들은 도대체 얼마나 받아 처먹을라고 그려? 으이구!"


그 문건을 건네받은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두 장이야?"


서류엔 여러 명의 이름이 직업, 나이, 연락처, 희망사항, 특이사항과 함께 표로 정리되어 적혀있었다. 국회의원부터 사업가, 공무원까지 A4 용지 한 장에 20명, 총 38명이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일명 '골드리스트'!


"네.."


"이번엔 왜 이렇게 많아?"


"이번 일이 그만큼 어려워요 아버지.."


"쯧쯧쯧.. 뒤탈 없게 해라."


"알겠어요.."


"그나저나 이거 세우면 독립대 놈들 의사 구하느라 고생 꽤나 하겠구먼. 콜록콜록.."


노인이 손에 들었던 서류뭉치를 테이블에 털썩 내려놓으며 그제서야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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