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인 김팔용님의 글이 없길래 올려봅니다.
이미 많은분들이 아시겠지만 모르는분들도 계실것같아 글을 올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도 재미있으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1편 >>
년도 대회명 순위
2004년 제2회 대관령 힐클라임대회 ,,,,,,,,,,,,,,,,,,,,,,,,,,,,,, MTB 3그룹 1위
2005년 제3회 대관령 힐클라임대회,,,,,,,,,,,,,,,,,,,,,,,,,,,,,,,, MTB 3그룹 1위
2005년 일본 오사카 (오오다이가하라) 오사카 힐클라임 ,,, MTB 전체 1위
2006년 제4회 대관령 힐클라임대회 ,,,,,,,,,,,,,,,,,,,,,,,,,,,,,,,,, MTB 3그룹 1위
2006년 제1회 제주도 1100고지 힐클라임 대회,,,,,,,,,,,,,,,,,,, 통합 전체 1위
2006년 양양 미천골 산악 힐클라임 대회,,,,,,,,,,,,,,,,,,,,,,,,,,, 전체1위
2006년 봉화 산악 자전거 대회 ,,,,,,,,,,,,,,,,,,,,,,,,,,,,,,,,,,,,, XC- 1위
2006년 춘천 산악 자전거 대회,,,,,,,,,,,,,,,,,,,,,,,,,,,,,,,,,,,,,,, XC - 1위
2006년 전국 시각장애인 텐덤사이클 대회,,,,,,,,,,,,,,,,,,,,,,, (파일럿)- 1위
2007년 제5회 대관령 힐클라임대회,,,,,,,,,,,,,,,,,,,,,,,,,,,,,,,,, 통합 전체 1위
2007년 일본 도쿄 (오모테후찌) 후지산 힐클라임 대회,,,,,, MTB 전체 1위
2007년 제2회 제주도 1100고지 힐클라임 대회,,,,,,,,,,,,,,,,,,, MTB 전체 1위
2007년 제1회 미시령 힐클라임 대회 ,,,,,,,,,,,,,,,,,,,,,,,,,,,,,,, 통합 전체 1위
2007년 오대산 산악 자전거 대회 ,,,,,,,,,,,,,,,,,,,,,,,,,,,,,,,,, XC- 1위
2008년 제6회 대관령 힐클라임대회 ,,,,,,,,,,,,,,,,,,,,,,,,,,,,,,, 통합 전체 1위
2008년 제3회 제주도 1100고지 힐클라임 대회 ,,,,,,,,,,,,,,,,,, 통합 전체 1위
2008년 제2회 미시령 힐클라임 대회 ,,,,,,,,,,,,,,,,,,,,,,,,,,,,,,,, MTB 전체1위
2008년 제3회 미시령 힐클라임 대회 ,,,,,,,,,,,,,,,,,,,,,,,,,,,,,,,, MTB 전체 1위
2008년 제4회 서울랠리 힐클라임 대회 ,,,,,,,,,,,,,,,,,,,,,,,,,,,,, MTB 전체1위
2008년 전국 시각장애인 텐덤사이클 대회 ,,,,,,,,,,,,,,,,,,,,,,,, (파일럿)- 1위
2008년 정선 하이원 산악 자전거 대회 ,,,,,,,,,,,,,,,,,,,,,,,,,,,,,, 1위
2007년 원주 산악 자전거 대회 ,,,,,,,,,,,,,,,,,,,,,,,,,,,,,,,,,,,,,,,, 1위
2007년 강원도민 체전 도로 독주 ,,,,,,,,,,,,,,,,,,,,,,,,,,,,,,,,,,,,, 2위 (은메달)
2008년 대전 산악 자전거 대회 ,,,,,,,,,,,,,,,,,,,,,,,,,,,,,,,,,,,,,,,, 1위
2008년 강원도민체전 도로독주 ,,,,,,,,,,,,,,,,,,,,,,,,,,,,,,,,,,,,,,, 1위 (금메달)
2008년 강원도민체전 포인트 경기 ,,,,,,,,,,,,,,,,,,,,,,,,,,,,,,,,,, 1위 (금메달)
2008년 남양주 축령산 산악자전거 대회 ,,,,,,,,,,,,,,,,,,,,,,,,,, 1위
2008년 평창 산악자전거 대회 ,,,,,,,,,,,,,,,,,,,,,,,,,,,,,,,,,,,,,,,, 1위
2008년 제2회 강릉 전국 산악 자전거 대회 ,,,,,,,,,,,,,,,,,,,,,,, 최고기록상수상 1위
2008년 제2회 원주산악자전거 대회,,,,,,,,,,,,,,,,,,,,,,,,,,,,,,,,, 1위
셀수없는 저 기록들은 도데체 누구의 기록일까 ?
보통사람이라면 완주라는 표현만 들어가도 해냈다는 포만감을 가질 저 익스트림 스포츠
자전거 경기에 명예의 전당이라도 있다면 들어갈만한 기록들을 보유한 이사람은 과연누구일까?
필자가 이글을 쓰고 있는 이시간에도 자신의 기록들을 지키기위해
추운날씨에도 아랑곳하지않고 또 홀로 연습을 나간 이사람! ,,, 또한 이글을 쓰고 있는 기간 중에도
또 전해오는 우승 수식들 ,,,,,,,이렇게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게 만드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틀림없이 자전거와 관련이 있는것같은데,,
그렇다면 그는 국가대표 사이클 선수인가?
아니면 실업선수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에서 MTB를 알거나 사이클을 아는 사람이라면 국가대표도 아닌 실업선수도 아닌
바로 이사람! 자전거 동호인 '김팔용' 이란 이름을 한번쯤 들어 보았을것이다..
필자는 오늘부터 이사람 김팔용에대하여 그의 인생을 스케치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왜? 연예인도 아니요, 성공한 사업가도, 성공한 정치인도 아닌
자연인, 그리고 자전거 동호인중 한사람 김팔용에 대하여 이렇듯 집착 하는걸까,,,?
필자가 처음 김팔용 을 만난것은 MTB자전거를 시작 하고 나서 부터이다.
무었이든 경험을 해봐야 그 진가를 알수 있다고 했다. 2005년 어느날
삼척시내 거리에 "김팔용 일본 오사카 자전거 대회 에서 1위" 를 했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속으로 흠~ 대단한 사람이 같은지역에 살고있다는것에 그냥 기분 좋았다.
그리곤 잊혀져갈무렵 매년마다 걸리는 대관령 힐클라임대회 전체 1위 소식들 ,,,,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참 괜찬은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힘들지만 멎진
스포츠 자전거 각종대회에 연일 1위소식을 전하는 김팔용이 도데체 누구야? 하는 생각이 들쯤
거리에 또하나의 현수막이 걸렸다.
바로 오모테후지 "김팔용! 일본 후지산 힐클라임대회 MTB부분 전체1위" 라는
현수막이 또하나 걸린다. 그때 까지도 나는 그 김팔용이 실업선수나 국가대표 선수인줄 알았다.
같은지역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또한 자전거를 그토록 잘탄다니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그러나 MTB자전거를 알고나서 언젠가 그를 만날일이 있었다.
본래는 큰식당 주방장이 직업이었던 그는 2007년 삼척 대학로 거리에 "사랑방"이란
조그만 실내 포장마차를 개업한것이다. 의아했다. 자전거 선수가 왜 이런 포차를 개업햇지? 생각 하면서
그를 만날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같은 세상에 천사같은 그의 성격과 운동선수와는 전혀 무관한 자전거
동호인인 김팔용 ! 왜 그는 자전거를 포함한 마라톤 철인3종등 운동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것인지
하나 하나 알게 되었다..그의 인생에 희노애락 . 왜 그는 자전거메니아 가 되었는지
또 그는 왜 그 수많은 기록들을 내면서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많치 않은지 ,,, 오늘 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이 이야기는 그에게 전해들은 것이며 또한 그 에 관한 자료들로 이루어져있다.
행여 빗나간 기록이나 틀린내용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길 바라며
보아 주십시오,,,다음편에,,,
<< 2편 >>
2편] 찢어지게 가난했던 김팔용의 어린시절,,
국제대회 국내 대회등 수없이 많은 자전거 대회 1위 기록을 낳은
김팔용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는 현재 삼척시 성내동 에서 홀로계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물론 현재 45세의 나이에 장가도 안갔다.
이유는 여자가 없어서 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이 아직 생각이 없어서이다.
왜냐? 어머니 때문이다 치매증상에 귀까지 멀어 생활이 불편한 어머니를 두고 갈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인가 김팔용을 주인공으로 지역MBC방송사에서 김팔용을
방송했다,,이화면 에 보면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현재 김팔용의 집을 볼수 있다.
현재도 잘사는 편이 아니지만 어린시절은 더했다. 필자는 이런 김팔용에대해
언제 부터인가 그의 외로움 과 열악한 환경어서도 그가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열정에 그리고 그의 천사같은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그가 어린시절 태어난곳은 삼척시 노곡면 고자리 칠째골 라는 엄청난 산골 마을
집이라고는 한채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곳은 삼척에 살고 있는 사람조차도 잘 모르는 지역이다.
그곳 사람들은 1950년 에 난 625 전쟁도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 총 칼 탱크를 앞세워 밀고 내려오던 북한 군들도 그곳은 첩첩산중에
길도 없어 들어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곳에서 태어난 김팔용은 원래 8남매중 4째였다.
그런데 현재의 김팔용은 장남이란다 어찌된것일까,,?
그가 태어나기전 원래의 집은 삼척 시내에 있엇다고 한다.
그러나 술과담배 도박, 싸움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해 인적도 없는
노곡면 칠째골로 이사를 한후 그가 태어난것이다.
삼척시 노곡면 고자리 부근 - 김팔용이 태어난 칠째골 자연부락으로 여기서도 4km 이상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김팔용의 형제들은 당시 인적도 없는 그곳에서 의학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당시 민간용법도 잘모르던 무지의 세월에 김팔용의 어머님과 아버님 사이에 태어난 그의 5명의
형과 동생들 모두 다 사망했다고 한다.
그 사인도 가지가지 ,,,,,,,,,
1명은 5살때 감자를 먹다 채해서 사망하고,
1명은 태어난지 1년도 안돼 이유없이 사망하고
또한명은 산에 올라 갔다가 절벽에서 추락사 하고
1명은 떡을 먹다가 채해서 사망하였는데
한명의 동생은 물에빠져 죽었다고 하였다.
가난이 문제 였다.
누구를 원망하랴 누구도 원망할수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고 밭에 일하던 시간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렇다고 조선시대같은 옛날 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니다.
바로 김팔용과 그의 아버지 어머니 가 살았던 이야기다.
모두가 김팔용이 태어나기전과 태어난후 아주 어린시절에 일이다.
그당시 그의 집주변은 전기불도 없었으며 집이라곤 그의 집한채만 있는 곳 집주변은 모두
높은산 이었다고 한다. 어린시절 그는 저산을 넘으면 낭떠러지가 있어 그곳에 가면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 했단다. 그는 현재 3남매라고 한다 누나와 동생이 있다.
그리고 김팔용 또한 그시대에 살다보니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겼다고 한다.
어린시절,, 집부근 산에 비가 간간히 오는날 혼자 올라 갔다가 미끄러지며 낙하해 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던
그를 아버지가 발견하여 집에 데리고 와 눕혀 놨더니 3일후에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또한번은 초등학교때 깊은물도 아니고 학교부근 조그만 웅덩이 물에 미끄러져 빠져 나오지못해 거의
익사한줄 알았던 김팔용을 친구들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끄집어 냈더니 3분정도 지나서 숨을 쉬더란다.
,,,,,,,,,,,,,,,,중략,,,,,,,,,,
그후 그나마 있던 재산마져도 그의 아버지가 인근마을에 다니며 놀음(도박)과 술로 탕진했다고 한다.
그리고 배운것은 없어도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사셧던 어머니도 아버지의 도박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하셧단다. 김팔용은 그렇게 아버지 때문에 고생한 어머니를 보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의 어린시절 기억중 어느날 다른 동네사람들이 찾아와 집에서
농사일을 하던 황소를 마구 끌고가는것을 어머님이 왜이러시냐고 따지자 아버지와 화투쳐서 자기가 땃다며
무작정 끌고가는 것을 목격하였고 땅을치며 분통을 터트리는 어머니를 보았다.
젊은시절을 도박과 술로 그나마 있던 재산마져 탕진하던 아버지의 성격 때문에 어머님은 더욱 많은 고생을 하였고
이후 가세가 기울어 집까지 빼았기고 그가 초등학교 들어가기전
삼척시 근덕면 금계리 곰발치 골로 이사를 하였다.
삼척시 근덕면 금계리 곰발치 부근 사진
이곳 또한 엄청난 첩첩 산중이며 집이라고는 4채 정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아이러니 한것은 이곳 또한
625전쟁이 났는지도 모르고 살었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그 금계리라는곳에서 4km 나 떨어진 곳 높은 산에서 내려다 보면 곰 발바닥 처럼 생겼다 하여 명칭한
자연부락 곰발치 골 로 이사를 했다.
이곳으로 이사한 김팔용은 학교는 다녔을까?
지금은 폐교된 삼척 맹방초등하교 금계분교 최근 모습
그당시 김팔용은 삼척 맹방초등학교 금계분교에 다녔다.
집에서 부터 4km 10리길을 혼자서 걸어 다녔고
이른새벽에 일어나 늦은 저녁 시간에 집에 오곤 하엿다.
그러던 그의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먹을것이 없어 항상 배가 고팠던 김팔용은 집부근에 있던 고얌나무에 열매가 맺힌것을 보고
그열매를 따다가 썩은 나무가지가 부러지며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치고 만다.
생명이 위독한 그를 어머니가 발견하여 곰발치골에서 8km 되는 근덕면소재까지
그를 등에 업고 뛰었다는 것이다.
그때 김팔용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희미해지는 기억속에
처음으로 첩첩산중 곰발치 골에서 삼척시 근덕면 소재로 나와
아스팔트 도로와 불을켜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자동차 , 전기불등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고
난생처음으로 택시라는것을 타고 삼척시 사직동에 있던
삼척도립병원(지금은 다른곳으로 이전한 삼척 의료원) 이란데를
와 보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문명사회를 그때서야 보게 되었던것
희미해지는 정신속에 마냥 신기하기만 하여 이곳이 말로만 듣던 천국인줄 알았단다 .,,,,
현시점에서 계산해보면 이때가 1974~1975년 정도 일것 같다.
그후 그가 초등학교 4학년때 집안 가족들을 그렇게 고생시키던 아버지가 돌아가셧다.
그토록 가족들을 고생시키던 아버지 이지만 아버지 마져 돌아가시자
가족들은 오갈때가 없었다. 그러던 그의가족들은 삼척에 살고 있던 큰아버지의 배려로 삼척시내
조그만 초가삼간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김팔용은 삼척 시내에 있는 삼척 초등학교에 전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환경이 그를 또 가로 막았다.
삼척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진학 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가족을 삼척시내로 이사해준 큰아버지도 형편이 어려웠기에 더이상
도와 줄수가 없었던것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김팔용은 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였던 지금은 없어진
삼광 고등공민학교를 다녔다. 이곳은 학교가 아닌 복지재단이 운영하던곳으로 학업이 인정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세대 에는 보기 힘든 국민학교(현 초등)졸업장 만을 가지고 있다.
(김팔용은 현재 방송통신 고등학교 과정을 다니고 있음)
그렇게 가난했던 세월을 이겨내고 현재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김팔용!
나는 그의 인생을 통해서 나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어디서 부터인지 그의 천사 같은 웃음은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나오는것은 아닐까?,,,,
다음편에,,,,
[3편] 청년 김팔용 성공과 좌절,,,이 이어집니다..
<< 3편 >>
,,,,,,,,,,[3편] 청년 김팔용의 성공과 좌절,,
,,,, 왠만한 사이클 프로선수도 국가대표 상비군보다도 더 유명한 MTB동호인 김팔용!
필자는 그의 인생을 스케치를 하고 있다. 또한 필자가 왜? 그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성공한 사업가나
성공한 정치인도 연예인도 아닌 그저 평범한 자전거동호인 김팔용에 대해 쓰려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다! 그 어느 인물들보다도 필자와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많이 그에대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고 또한
그의 이야기속에 요즘같은 세상에 그리기도 생각하기도 힘든 가난을 경험하며 찢어질듯한 가난속에서 태어나났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사람 김팔용! 필자에게 있어 그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각종스트레스가 증폭되는 현대사회! 그런 현시대가 주는 스트레스에 약한 현대인들
바로 현대인들에게 이사람 김팔용을 소개 하려는 것이다.
필자도 정말 살기 힘들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마음이 정말 힘들어 죽고 싶을때도 있었다.
그러나 김팔용을 만나고 난후 난 그저 챙피할 뿐이 었다. 그래서 요즘 힘내고 살아가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김팔용이 다니던 삼광고등공민학교 (현 삼척 의원부근)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못한 김팔용은 사회복지재단 시설인 현 삼척의원 부근에
삼광고등공민학교 라는 곳을 다녔다 . 그러나 그것도 그나마 중학교 3학년이 될무렴 재단 자체가 문을 닫고 폐교하고 말았다. 홀로 26년 동안 교장으로 .재단 운영자로 있었던 고 갈산 김영준 선생이 사망 했기에 삼광고등공민학교는 1984년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그러나 학교는 없어 졌지만 그후 아무 유족도 없었던 제단 운영자의 유품을 제자들이 정리하고 고인이 된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삼광장학회를 설립 지금도 김팔용 같이 어려운 ·지역 중·고생에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고 한다.
어찌됐든 학교가 폐교 되어 더이상 다닐수 없었던 김팔용은 어린 나이에 삼척시내 철공소등에서에서 막노동을 해야만 햇다. 사람도 없던 산골속에서 살다가 그당시에도 시골이었던 삼척시내로 나왔지만 이어진 가난 때문에 중학교도 제데로 못 다니고 어린나이에 막노동 현장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추운겨울 손이 부르틀 정도의 강추위에 맨손으로 철근 덩어리를 날라야 했고 벽돌을 날라야 했다.
그러기를 3년 18~19세 고등학생정도의 나이가 될 무렵 더이상 삼척에서는 이 가난을 벗어날 비젼이 없다고 생각한
김팔용은 막노동 현장에서 벌어놓은 돈을 모두 어머니께 드리고 차비 1만5 천원을 가지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당시 삼척에서 서울까지 차비는 2천5백원! 별도로 준비한 돈도 없이 올라갔다. 어머니는 상경 한다는 아들이 측은해 눈물을 흘리며 3만원이란 돈을 건네 주었지만 서울에서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모르던 김팔용은 그것 마져도 어머니께서
쓰시라고 반을 떼어 주고 1만 5천원만 들고 변변한 가방도 없어 그야 말로 조선시대 에나 볼수 있었던 보쌈식으로 말은
옷 보따리 하나만 들고 서울로 향했다.
무작정 상경한 김팔용 그는 1977년 WBA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 메치에서 한국최초의 2 체급을 제패한 그 당시 젊은이들에 우상 복싱 선수 세계챔피언 홍수환을 좋아했다 그리고 당시 복싱선수들이 챔피언이 되면 파이트 머니(게런티)를
많이 받는다는것을 보고 자신도 홍수환과 같은 복싱선수가 되기위해 서울로 상경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찾아간 복싱
체육관에서 몇일간 트레이닝 한 결과 콧뼈가 너무 약해 복싱선수로는 부적합 판정이 내렷다. 하지만 김팔용은 그판정에도 아랑곳 않고 끝까지 권투선수가 되겠다고 우겼으나 결국 복싱 체육관에서 쫒겨나 노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골구석에서 태어나 전기불도,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라는것이 있는줄도 10살때 나무에서 떨어져 병원에 실려가면서 처음으로 보았고, 11살이 되어서야 삼척시내로 이사를 왔지만 중학교도 제데로 못다녀 막노동판에 떠밀려야 했던
청소년기, 성인의 나이가 되서야 서울땅을 처음 밟았던 김팔용!,,
서울은 그런 그를 호락호락 받아 들이지 않았다.
무작정 상경해 돈도 없었던 그는 복싱체육관에서 쫒겨나 한강 고수부지와
청계천 일대를 공원을 전전하다가 결국! 위장병과 굼주린 배를 움켜잡고 광화문
부근 길가에 쓰러져 기절하고 만다. 그러나 그런 그를 지나가던 어느 아주머니에게 발견 된다..
하지만 그후! 자신과 같은 강원도 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그 강원도 아주머니의 배려로
서울 청계천 주변 어느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된 김팔용!
그것이 그의 인생을 한번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식당에서 설것이를 하며 일을 시작한 김팔용, 그는 그 식당에서 요리사들이 요리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 했다.
그것은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한 하나의 선택 이었지만 한번 하면 죽기살기로 하는 성격 때문에 그도 어느덧 요리의
세계로 깊숙히 빠져들며 요리를 배우게 된다 .
요리경진대회에서 김팔용
결국 수 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서서히 인정받는 요리사가 되어 큰식당 주방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후 요리 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여러번 하여 요리사 김팔용의 주가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러기를 18년 ,,,
꿈꾸던 복서로서의 꿈도 좌절되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한 식당 설것이 부터 요리사로,,,
요리사로 성공을 눈앞에 두었던 그에게 그러나 또한번에 그림자가 씌워졌다. 바로 그의 어머니!
반드시 성공해서 어머니께 효도 하겠다던 김팔용! 그의 어머니가 병이나 몸져 누웠다. 청각장애가 생겨
들리지도 않는다고 하여 일도 못한단다. 거기다가 또하나의 청천 병력! 치매증상까지 겹친것이다.
김팔용 그는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일생을 고생만 해야 했던 어머니 때문에 귀향을 결정했다.
누나와 동생이 있었지만 어려운 형편속에 누나는 결혼하였고 동생도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결국 4남 이었지만 사망한 5명의 형제들 때문에 장남이 된 성격 착한 그가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18년의 서울생활을 접고 귀향한 김팔용은 지금도 살고 있는 삼척시 성내동 모처에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근처의 한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 ** 숫불갈비집 은 불티가나게 장사가 잘 되었다.
탁월한 요리솜씨를 가진 요리사 김팔용 그의 덕분 이엇다.
필자도 그 당시 그 잘나가는 요리사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를 몰랏다.
그 식당주인은 김팔용의 탁월한 요리솜씨에 반한 손님들로 가득차 장사가 잘되자 그에게 소나타 승용차까지
새차로 선물까지 하였단다. 그리고 정장도 선물하고 신발도 선물하며 그를 인정했다.
그러기를 약 2년 귀향 하엿지만 일하던 식당에 장사도 잘되고 돈도 어느정도 벌어서
결혼할 꿈에 젖어 있던 김팔용!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 나두지 않았다.
2001년 4월,,, 4월은 누가 잔인하다고 했던가 ,,
삼척에 온지 2년여 되던 김팔용에게 예측불허의 장난이 기다리고 있엇다.
돈도 좀 있었던 김팔용 그에게 당시 동네 선배라고 하는 사람이(누군지는 밝히지 않고 있음) 김팔용에게 주식에 투자하여 재테크 하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것은 법 없이도 살아갈수 있었던 그를 또 한번의 좌절의 인생의 쓴맛을 보게
하였다.
그 당시 언론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는 주식투자 소식들 가득찼다,,,
서울에 모 회사원이 하루아침에 아파트 몇채를 벌었다느니,,,
모 자영 업자가 주식투자로 하루아침에 갑부가 되었다 느니 하는 소식들이 판을치고 있었던 때다.
결국 4월에 만난 그 선배의 소개로 김팔용은 주식에 손을 댓다.
컴퓨터와는 별루 친하지 않았던 김팔용은 그 선배가 소개해준 주식 검색 프로그램을 가지고
재미삼아 주식투자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미를 느꼇다. 어느날은 상한가를 쳐 돈이 불어난적도 있엇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은 아버지처럼 여자를 고생 안 시킨다며 동해시 모처에 15평 짜리 아파트까지 사놓고
결혼할 꿈에 젖어 잇던 30대 후반의 김팔용을 또한번 좌절의 인생을 걷게 한 인생에 장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
항공기 동시 다발 자살테러 사건! 바로 "911"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과 김팔용이 우슨 연관일까 하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아는 분은 아실 것이라 생각하여 굳이 설명 안드리겠다.
그 사건이 터지기전 주식에 재미를 느낀 김팔용은 투자금액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그 911이 터지기 하루전날 내일 무슨일이 벌어 질지 몰랐던 김팔용은 대량 매수를 주문을 하고 만것이다.
이런저런 종목에 5000천만원 이상 투자한 그의 주식은 911테러 사건으로 폭락하여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18년간 식당 주방 설것이 부터 요리사 생활을 하며 최소의 식 생활비만 빼고는 한푼도 쓰지않고 벌어 놓았던 그돈!
어머니의 고생하는 일생이 애처러워,,,, 자신은 여자를 고생시키지 않고 돈 벌어서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겠다던
바로 그돈을 날린 것이다.
순식간에 김팔용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날린 가산이 생각낫다..자신을 비관했다..
아버지와 내가 틀린게 뭐가 있냐며,,
아버지가 살던때는 주식이란게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놀음(도박)을 해서 날렸고 그런 난,,,,,
나라에서 권장하는 일인 만큼 은행에 예치하는 것과 별 다를것이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더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
비관한 김팔용 ! 그는 또 한번 이성을 잃고 서울생활을 하며 어머니께 매달 보냈던 돈 마져
다시 받아내 복구 하겠다고 주식에 또 투자를 하고 만다.
그 결과는 다시 투자한 종목마다 연일 하한가를 쳐 결국 또 휴지조각이 되었다..
김팔용의 어머니는 아들이 보내준 돈을 아들 장가 보낼때 쓴다며 20년 가까이 한푼도 안쓰고 모아 놓았던 것이다,
은행에 예금하는것을 몰랐던 어머니가 어떤돈은 장롱안에,, 어떤 돈은 통조림 깡통에,,, 어떤 돈은 장독안에등등
몇년을 보관했는지 그 돈들은 곰팡이가 다 피어 빠딱빠닥 말라 있었단다..
그런 그돈! 그런 그 돈마져 다날린 김팔용,,,
결혼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인생의 쓴잔을 너무 마신 그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한듯..
혼자서 고민과 스트레스에 빠져 캄캄한 방구석에서 나오지 못했다.
세상이 무서웠다. 사람도 무서웠다. 누구에게 하소연 할수도 없었던 그는
그 방안에서 쓰러지고 만다..
,,,,,,,,,,,,,,,,,,,,,,,,,,,,,,,,,,,,,,,,
계속 이어 집니다..다음편에
[4편]아픔을딛고 일어나 MTB 메니아가 되기까지,,,
<< 4편 >>
[4편]아픔을딛고 일어나 MTB 메니아가 되기까지,,,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시절
중학교도 제데로 다니지 못하고 막노동판으로 내몰렸던 청소년기
복싱선수를 꿈구며 무작정 상경했지만 노숙자로 전락한 청년 김팔용!
요리사로 성장 햇으나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귀향
결혼을 꿈꾸며 직장생활을 했지만 정글과도 같은 사회구조에 적응 못하고
20년간의 직장생활로 모은 목돈을 다날린 김팔용 그는,,,,,
이성을 잃고 몇날 몇일인가 캄캄한 방구석에서 혼자 스트레스로 고민하다
웅그리고 쓰러져 있는것을 어머니가 발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병원으로 실려갔다.
당시 병원의 진단으로 심각한 위궤양과 신경성 위염 급성 대장염등 위와 장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다행히 어머니의 지극 정성으로 몇일 후 정신을 차렷다.
그러나 치메증상과 들리지않는 소리로 장애가 있던 어머니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 그를 구할수 잇었을까?
그것은 김팔용 그도 의문이라 한다.. 요즘도 그의 어머니는 잘 들리지 않는 귀로 하루에 한번 아들
김팔용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나 하는 말은 매일같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한다.
그가 전화를 받으면 그가 대꾸를 하던 안하던 이내 ,,,,
아들! 아직 안 끝낫어,,? 끝나면 바로 들어와~ 응 알았어 뚝!
이말만 되풀이 하고 그냥 끈어버린 단다.
김팔용 그도 어머니가 어떻게 전화를 하는지 의문이라고 한다.
마라톤을 시작한 김팔용
어쩟든 만신창이가 된 김팔용은 점점 쇠약해져 갔으나 2002년 월드컵에 붐을 타고 운동을 해보기로 한다,
복싱선수의 꿈은 물건너 간지 오래지만 더이상 몸을 학대 하다간 인생의 종점에 도착할것 같아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마라톤을 시작 햇다. 그렇게 시작한 마라톤은 저물어가던
김팔용의 인생을 서서히 안정을 찾아 주었다..
건강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한지 약 1년 그는
운동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 쳤다. 그러나 쉽지 많은 않았다. 주식투자로 날린 돈 때문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각종 공과금 영수증은 쌓여만 갔고 어머니의 병원 약값도 없었다.
직장을 다시 찾기도 어려웠으며 장사를 해보려고 동해시 천곡동 인근에 쫄닥 망한 고기집도 인수해보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보니 마라톤이란 운동도 마음처럼 되지않았다.
인라인 스케이트붐이 일어나 그것도 해보앗지만 김팔용에게는 맞지 않앗다..
그러던 2003년 어느날 삼척의 모처에 "구비구비" 라는 MTB 동호회가 생겼다.
김팔용은 그 구비구비 MTB 동호회 회원들의 권유로 처음 자전거를 접하게 된다.
서울생활을 할때 자전거를 배우긴 했어도 MTB라는 것을 처음 접한 김팔용 !
그런 그에게 자전거는 왠지 모를 희열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값비싼 MTB 구할길이 없어 애태우던 중 MTB샾 주인이 중고로 내놓은 카본 프레임을 80만원에 구입해
조립을 하였다. 그 프레임을 지금까지도 타고 있다. 또한 그 프레임으로 일본에 노구지히노브등
국제대회 1인자들도 세우지 못한 힐클라임 기록들을 세우고 있는것이다. 다시돌아 가,,,,
MTB를 접해본 김팔용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자전거를 타고 산이고 들이고 할것 없이 다녔다..
그러기를 약1년 그에게 지금 국내 최고의 MTB 힐 클라이머 김팔용이 되게한 하나의 계기가 마련된다.
제2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
약 1년정도 MTB 접한 김팔용에게
2004년 제2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가
개최 되었다. 자신이 어느정도 자전거를 타는지 시험삼아 자전거 경기대회에 참가한 김팔용 그의 눈에 비친 수 많은 동호인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현란한 자전거 져지를 입은 사람들속에
수줍은 촌뜨기! 그리고 외롭고 추운, 착한 남자 김팔용도 MTB 3그룹에서
출발했다.
당시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기록
그러나 그 대회 결과는 48분 07초로 MTB 3그룹 1위라는 의외에 결과를 가져다 주며 MTB동호인들에게 김팔용이란 이름 석자를 알리기 시작했으며 동호인 대회에서 인생에 첨으로 스포츠 부분 상장과 부상을 받아 보고는 그도 점점 MTB자전거의 매력에 휩 싸이게 된다.
그후 생활에 활력을 찾은 김팔용은 다시 식당 주방일도 시작했다. 그리곤 식당 사장님의 배려로 각종 자전거대회는
안 빠지고 참가하게 되는데, 그 식당 사장님도 MTB를 타면서 활력이 넘치는 그를 더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것이 식당 홍보에 기폭제가 되며 식당도 더 잘 되가고 있었다.
2005년 제3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 MTB3그룹 1위 시상식
그리고 2005년 국내 자전거 동호인 대회 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제3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 에서 연이어 MTB3그룹 1위를 하며 자전거 동호인들에게 그의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열정은 더욱 불타 올랐다.,,,,,
,,,,,,,,,,,,,, 다음편에 [5편] 김팔용 일본 힐클라임 대회를 정복하다.... 가 계속 됩니다..
<< 5편 >>
[5편] 전사 김팔용! 일본3대 힐클라임을 정복하다.
이글의 1~4편 까지는 김팔용의 태생에서부터 mtb마니아가 되기까지의 역경을 그렸다면
지금 부터는 그가 도전한 유명한 대회 도전기와 그는 성년 인생 대하여 써볼까 한다..
2004년 제2회 대관령 힐클라임대회와
2005년 제3회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에서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1위를 차지한 김팔용
그는 MTB메니아들에 이름석자는 각인은 되었으나 그때 까지도 그는 그리 유명하지도 않았다.
그 또한 유명해지는것을 그리 반가워 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냥 동호인일 뿐이니까,,,!
보통사람 같으면 이겨내지못할 정도로 힘들게 살아오던 어느날 부터 성공과 좌절을 맛본 김팔용
우연히 시작한 MTB 자전거! 그 자전거를 통해서 자신이 살아야할 이유를 찾은 그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자전거와 함께 살았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그는 언제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라이딩코스로 향했다.
말이 라이딩이지 라이딩이 아닌 훈련 이었다. 2회 대회와 3회 대관령 대회에서 1위를 하였지만
무었인가 목이 말랐다..또한 성격 좋기로 유명한 그에게 사람들의 질투가 시작 되었던 것이다.
연속 급부 1위를 한 그에게 축하의 격려도 쏫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우연 일거야" 라는
비아냥이 주변을 맴돌았다.
무었이건 그렇치만 한국인들 특유의 속담중에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속담처럼
어떤 사람이든 유명해지면 그뒤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안티 피플들도 생기는것
김팔용 그에게도 그것은 피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말들이 들리곤 할때마다 그는 그런말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언제나 처럼 자전거를 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대관령과 비슷한 코스, 비슷한 거리를 두고 있는 삼척시 하장면 에 댓재 코스이다.
김팔용이 가장 많이 타는 코스 삼척시 하장면 댓재 정상 부근 (이곳을 환선재라고도 함!)
이곳은 삼척시가 개발한 환선굴과도 가까우며 환선굴의 물줄기가 관통되어 있는 산이며
해발 822m의 경사도 6% 삼척에서 댓째 정상까지는 25km 의 만만치 않은 고개다.
그는 항상 근무가 끝난 어두운 밤 혼자서 그곳으로 향했다. 배낭에는 항상 미숫가루를 탄 피티병과 물병2개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산에서 잘수 있는 1인용 텐트를 넣고서 말이다.
어떤때는 밤늦은 시간에 올라 갔다가 타이어에난 빵구를 떼우지 못해 산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잔적도 많았다.
그러던 2005년 6월 한 월간 바이시클 라이프라는 잡지사의 일본 3대 힐클라임대회 오오다이가하라 산을 올라가는
"오사카 힐클라임 대회" 모집 공고를 보았다. 그것을 본 김팔용! 특유의 열정이 불타 올랏다.
오오다이가하라는 일본의 미에 ,나라,와카야마현의 3현에
걸치는 국립공원이다. 그러나 그에 열정은 곧 고민으로 바뀐다.
거금 80만원에 달하는 참가비가 문제였다..
이대회는 본래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의 원조 격이다.
이 오사카 힐클라임 대회를 밴치마킹한 국내 대회가 바로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 였던것 1회와 2회 대관령 대회때는 대회 주관사가 자매결연을 맺어 한일 원정 경기 참가단을
각 클라스 1위 선수들을 상호 초청하는 방식으로 각 클라스 1위 선수들은 개인의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2005년 때마침 발생한 독도문제로 한일 양국의 상호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대회주관사들의 자매결연이
자연스럽게 무너져 버렷다. 그리하여 2005년 부터는 월간지 회사에서 개인들의 참가신청을 받아 함께
출전하게 되었는데 ,,,
김팔용도 그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대회 참가비 걱정이 앞서 포기하고야 만다.
그놈에 돈!
일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그놈에 돈이 또
김팔용을 괴롭히고 있었다.
식당 주방장으로 일은 하고 있었지만 몇년전 주식 투자로 날려버린 돈 때문에 그리 여유롭지 않았던 그는
대회 참가비를 포함해 참가하려면 약 100만원 정도의 돈과 대회 참가 기간중에 식당 주방의 일에 대한 걱정이 앞서자,,,
언제나 그렇듯 스트레스만 쌓이면 찾아오는 신경성 위염과 과민성 대장염이 그를 또 찾아 왔다.
마음과 몸이 불안해지자 그는 이내 얼굴에 표가 났다. 그런데
어두워진 그의 얼굴의 내막을 알고는 흔쾌히 다녀오라며 다음달 월급까지 가불을 해준
식당 사장님 덕분에 그는 참가모집 마지막 순간에 대회 참가 신청을 할수 있었다.
그당시 참가인원을 모집했던 모 월간 잡지사의 바이시클 라이프 대표이자 편집장인 김병훈씨도
그가 누군인지 아직 잘 몰랐다.
그리고 그당시 참가했던 한국선수들은 엘리트 선수는 고사하고 거의 대부분이 동호인들이었다.
오사카 대회는 국제 대회로 많은 외국 엘리트 선수들도 참가 하는 대회이다.
오오다이 가하라! 일본에서 비가 가장 많이 온다는 일본의 자존심이자 일본 3대 힐클라임 대회인 일본
오사카 대회장소로 김팔용 이 달려 갔다.
오사카 대회 참가한 한국 선수들 왼쪽부터 정치성, 김팔용, 양희동, 송재홍, 박길화,
외국 땅 이라곤 처음 밟아본 김팔용 MTB자전거를 시작한지 불과 2년 밖에 안된 김팔용이 해발 1570m의 28km 우리나라에 대관령보다 더 가파르고 더 긴 오오다이가하라를 오를수 있을까? 많은 일본선수들과 참가한 한국 선수들 그리고 외국선수들과 같이 김팔용도 함께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김팔용! 한국 최고의 힐클라이머인 그의 객기는 여기서부터 시작 되었다.
2번의 대관령 대회 1위의 기록과 사람들의 비아냥 속에 그는 말은 필요 없다!
여기서 또하나의 기록을 만들고야 말겠다던 그의 초인적인 힘은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김팔용! 그의 얼굴도,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수 많은 일본 선수들은 당황했다.
그들을 제치고 그는 MTB부분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일본땅이라는것에 왠지모를 조국애가 느껴지던 김팔용
심장이 터질것 같은 호흡을 내 뿜으며 평균시속 20,56km 달리던 그의 눈 앞에는 결국!
오오다이가하라! 결승지점이 눈에 들어 왔다.
함께 참가 했던 한국 선수들도 놀랐고 당시 한국 선수들을 모집해 사진과 기사를 쓰며 결승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월간 바이시클 라이프 편집장인 김병훈씨도 엘리트 사이클 선수들 사이에 끼어 들어오는 김팔용을 보고도 믿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빠른 시간에 오오다이가하라를 한국선수가 1위로 들어온다는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2005년 당시 8월호 월간 바이시클 라이프 기사 사진
그순간! 있는 힘을 다해 피니쉬 라인을 MTB 전체 1위로 통과하던 김팔용은 김병훈씨를 향해 일본까지 오게한
감사의 표시로 손을 높이 흔들었지만 우리 선수들은 언제나 오려나 하고 팔짱을 끼고 몸을 움츠리고 있었던
김병훈씨는 그 감격에 순간을 놓칠뻔 했다. 그 당시 김병훈씨의 회고록 기사에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월간 바이시클 라이프 김병훈님 기사 ------------------------------
구름이 자욱하게 낀 해발 1570m의 오오다이가하라 정상, 체감온도 10도 이하의 추위에 몸을 웅크리며 기자는 힐클라임 대회 결승점을 보고 있었다. 엘리트 1위로 가장 먼저 골인한 야마시타 타카히로 선수와 함께 기자는 선두차량으로 결승점에 도착 햇다. 로드바이크(사이클) 엘리트 선수인 야마시타의 기록이 1시간 11분 평균시속 23,42km 여서 일반 동호인 선수들이 골인 하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할것 같았다. 조금은 마음을 놓고 하나둘 골인하는 챔피언 클래스(엘리트)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데 로드바이크 사이에(사이클) MTB한대가 무서운 속도로 피치를 올리고 있는게 아닌가,,?
어떻게 MTB가 벌써 올라왔지 ? 대단한데! 속으로 감탄하면서 자세히 보니 우리 한국 선수였다! 아침에 자전거를 조립하면서 디레일러 행어가 휘어지고 변속케이블 마져 끊어져 낙담하던 나이40에 삼척MTB 구비구비 소속에 김팔용 씨였다.
김씨의 기록은 1시간 21분 41초로 평균시속 20.56km 로 MTB전체1위는 물론 로드바이크 통털어서 통합 22위의 놀라운 기록 이었다.
----------------------------------------------------------------------------------- 라고 기사는 썻지만
그후의 일화에 팔짱을 끼고 카메라도 꺼내지 않은채 멍하니 보고 있다. 한국선수임을 확인하고는
급히 카메라를 꺼내 골인 순간을 한장밖에 못찍었다고 한다.
손을 잡고 시상식 세레머니 중 고개를 숙인 2위를 한 일본선수, 가운데가 김팔용
그렇다 일본의 3대 힐클라임 대회인 "오사카 힐클라임 대회"에서 그는 명예롭게 MTB부분 전체 1위를 한것이다...
1위를 놓쳐 자존심이 상한 일본 선수는 시상대에서 그가 세례머니를 위해 손을 잡자 고개를 떨구었다.
김팔용! 그는 개인의 명예도 높였지만 일본이 자랑하고 있는 일본 3대 힐클라임 대회에서
한국인의 명예를 높이고 귀국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명예를 드높이고 귀국한 김팔용의 고향 삼척에서는 작은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많은 자전거 대회에 참가하다보니 그가 일하는 식당에서 종업원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그래서 김팔용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사이에 기분을 언잔케 하는것이 싫어 직장을 옴기기로 결정하는데
그의 생각에는 옴기게 되면 서울로 갈것 같았다...그래서 정들었던 자신의 MTB동호회 삼척 구비구비팀에 작별을
고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서울로 직장을 옴기려 했던 그는 결국 죽어도 고향에서 죽겠다는
어머니 때문에 직장을 옴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일로 MTB 동호회 구비구비 에서 탈퇴한 김팔용을 삼척 모아모아 MTB클럽에서 명예회원으로 가입되어
이때부터 모아모아 클럽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후 김팔용은 2006년 4회 대관령 힐클라임대회에서 또한번 MTB 3그룹 1위 차지했고
같은해 제주도! 한라산에서 열린 제1회 1100고지 힐클라임 대회와
양양 미천골 산악 힐클라임 대회에서 처음으로 통합 전체 1위 하게 된다.
국내, 국외 할것 없이 힐클라임 대회를 석권하고 다니던 그해! 그에게 또 한번 사람들의 비아냥이 시작 되었다.
김팔용은 힐클라임만 탄다. 산악자전거를 도로만 많이 타며 그것도 업힐 전문이며 다운힐은 겁쟁이어서,,,,등등
그래서 그는 말없이 봉화 산악 자전거 대회 와 춘천 산악 자전거 대회(강촌챌린져) 크로스 컨크리 대회에 참가해
XC 부분 1위를 석권하며 그를 바라보던 시각을 불식 식혔다....
운명에 2007년 4월!
김팔용 그의 기억속에 2001년 4월은 악몽이었다. 하지만 그 악몽의 기억을 7년후 추억으로 바꾸어 놓은 또하나의 사건이 그를 유혹했다. 바로! 오모테후지 - 도쿄에서 열린 후지산 힐클라임 대회다.
이때는 2005년과 달리 월간 더바이크 잡지사에서 선수들을 모집을 했다.
후지산! 일본 시즈오카현 북동부와 야마나시현 남부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 3,776m 나 되며 일본인들의 자존심으로
생각하는 산이다. 또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B조 3차전 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홈팀
이었던 일본팀을 이민성의 역전골로 2대1로 역전승 했던 당시! MBC 중계를 하고 있던 송재익 캐터와 신문선 해설위원이 흥분을 하며 외치던 "도쿄 대첩! 후지산이 무너졌어!" 요란 해설로 국민들을 흥분에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후지산!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모르고 있는 또하나의 도쿄대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2007년 4월 김팔용의 후지산 힐클라임 대회 였다.
당시 함게 참가했던 현 764팀의 김연수님, 엘리트 출신의 최정일님 그리고 김팔용
이때 참가한 한국선수들중 엘리트 출신의 최정일(춘천)과, 프랑스 외인부대와 경찰특공대 출신으로 현재 국내 익스트림 스포츠 대회를 석권하다 시피하는 현 764팀의 팀장인 김연수, 이대회 입상을 기대하며 많은 준비를 한 대구 강북 MTB 출신의 조종환등 기라성 같은 많은 MTB 선수들중에 아직은 수줍은 촌뜨기! 외로운 남자! 김팔용도 끼어 있었다.
총 길이 : 16.5km, 평균 경사도 : 6.9%, 고도차 : 1150m 당초에는 28km였으나 대회 전 일어난 지진때문에 길이 끊겨
갑자기 16km로 변경되었지만 짧아진 거리대신 경사각도가 높아 그리 쉽지않은 대회였다!
당시 함께 참가했던 선수들과 경기장 후지산 앞에서
그러나! 결과는 모든 일본인들을 제치고 하얗게 내린 눈으로 뒤덮힌 결승선을 38분 35초 평속 17.87KM의 놀라운 속도에
기차 화통을 삶아 먹는 숨 소리를 내 뿜으며 MTB부분 1위로 통과하는 한국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팔용 이었다.!
당시 한국선수들을 모집해간 월간 더바이크 임우택 편집장은 귀국한후 이렇게 회고했다.
====오모테후지 힐클라임대회(4월20~22일)를 마치고========= 월간 더 바이크 임우택 편집장===
일본 오모테후지 힐 클라임대회에 참여하신 선수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한일 첫 교류에 수많은 추억을 남기고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상깊은 일은 한국선수(삼척 모아모아MTB 김팔용 님)가 MTB부문 1위를 차지했다는것 입니다.
사실 조금은 염려를 했습니다. 한국 참가선수중 한명이라도 순위권에는 들어야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우고 올수있을텐데하는 우려였습니다.
눈덮힌 겨울날씨의 후지산 골인점에서 모두들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염려는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사이클 상급자(일본프로선수)뒤를 이어 MTB를 탄 선수가 올라오는데 그것도 한국선수 라는것에 안내방송과 함께
박수가 쏱아져 나왔습니다.
가슴 뿌듯한 순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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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에서 보듯 그때의 감격을 느낄수 있다..
그 당시 오사카 대회때와 마찬가지로 2위를 한 일본선수가 자존심 상한 나머지 시상식 세례모니에서
김팔용의 손을 잡지 않았다.
강원도 두메 산골 소년 김팔용! 인생의 최악의 좌절을 딛고 일어난 청년 김팔용!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자 김팔용! 그렇다! 그는 이제 혼자의 힘으로 한국에 명예를 드높이고 온,,,
수줍은 촌뜨기! 외로고 추운 착한 남자! 김팔용이 아닌
한국에 전사 ! 김팔용 이었다.....
다음편에,,,,,,
<< 6편 >>
전편에 이어서,,,,,,,,,
인생에 낙오자에서 MTB자전거를 통해 부활한 김팔용 그는 2007년 4월 21일 일본도쿄에서 자전거와 관련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몇안되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후지산 힐클라임대회를 통해 우리국민들이 모르고있는 또하나의 도쿄대첩을 이룩하고 왔다..그때부터 전국에 MTB메니아 동호인들에게 김팔용이란 이름은 스타와 다름 없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 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그는 삼척의 작은 길모퉁이에 조그만 '사랑방' 이란 실내포장마차 주인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전 직업은 주방장! 하지만 필자와 그가 만나면 이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웃고 만다. 왜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런 낭만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들에겐 더 불쌍하게 생각 되기 때문이다,,,,
자기만족이라하나 이런걸,,, 하지만 그런 김팔용을 볼때마다 느끼는것이지만 참 천사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때는 2006년 12월경
전편에 마지막 부분에 쓰려 했지만 내용이 엊갈리는 부분이 있어 이부분에 쓴다.
2007년 후지산을 가기전 사실 김팔용은 자신의 직업이었던 주방장일을 그만 두었다. 이유는 일하고 있던 식당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발생한다. 김팔용 주방장의 탁월한 솜씨 때문에 항상 잘됐던 식당이 문을 닫았다는것은 먼가 앞뒤가 안맞는 상충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보면 그식당 여사장님의 잘못된 선택이 잘되던 사업을 송두리채 뿌리뽑힌 당시 삼척 사회에서 시끌벅적한 사건이 이었다. 김팔용의 이야기를 하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는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현재의 김팔용을 이해하기에는 이야기는 꼭 해야만 하기 때문에 넣어둔다.
그 큰식당을 운영하기전 다른 사업을 펼치다 한번의 고배를 마신 사업주가 다시 용기를 내어 식당을 오픈하엿다.
그후 김팔용과 인연이 된 그 식당은 몇년간 장사가 잘되 사업이 번창 하였다. 하지만 식당을 운영하기전 다른 사업을
하다 실패한 그 사업의 채권 채무 관계가 해결되기도 전에 식당운영이 잘되자 또 사채 및 금융권의 채권을빌어 무리하게 식당을 확장 하였다. 그 결과 잘되던 식당운영과는 관계없이 2006년 12월에 결국 9억여원의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만것이다. . 그후 그식당은 몇몇 상위 채권자들이 결합해 식당을 운영하기로 하였지만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할수 없었던 김팔용의 마음도 이미 떠나 있었고 때문에 실직을 하고 만다.
그것 뿐인가? 월급생활을 하던 김팔용 운영자의 실정을 알수 없었던 그는 2006년 일을 하면서 받았던 몇개월에 월급
약 500만원을 주인에게 빌려주고 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보증을 서달라는 사장의 말에 평소 자신에게 잘해 주엇던
사장님이라 거부하지 못하고 보증을 서주었다.. 알고보니 신용 보증도 아니요 2년이나 밀린 1000만원자리 카드빛
보증 이엇다. 2년이 지난 현재도 그 보증건으로 인해 캐피탈 직원들에게 채권 압박을 받고 있다. 성격이 착한지라 어디가서 하소연도 못하던 김팔용은 결국 그 식당 사장이 사준 차를 팔아서 자신이 일부를 해결하고 일부는 자신의 대출로 전환해 지금도 갚고 있다. 빌려준돈 500만원도 못받고 사장과 종업원 사이에 보증을 섯다가 자신에게 돌아온 채권을 해결하기 위해 차는 물론이요 자신이 아끼는 로드바이크 마져 팔아야 할 지경 있었다. ,,,,
그로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은 김팔용은 2007년 삼척의 대학로 라는곳에 사랑방이란 조그만 실내포차를
개업한후 후지산 힐클라임에 참가 하게 된것이다. 이하생략,,
후지산을 정복한 김팔용은 그의 나이를 잊은듯 기량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은 만큼 그가 할수 있는 것은 자전거를 더 많이 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엘리트 선수들 처럼 특별한 훈련을 하는것도 아닌데
더 좋아지는 기록은 어찌 된것일까,? 참 연구 대상이다.
그러던 2007년 8월 MTB 메니아 들에게 그의 유명한 일화를 하나 더 남긴다.
제5회 대관령 힐클라임대회,,,,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대회를 참가하기 한달전
그는 아이러니한 생각을 하게 된다. MTB를 타던 그가 갑자기 로드바이크(사이클)를 삿다.
이유중 하나는 로드바이크를 타면 기록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생각과 로드바이크에 적응 되면 트라이애슬론 철인3종
경기에도 도전해볼려는 마음 때문이다.
대회가 있기 보름전 부터 열심히 로드바이크 연습을 한 김팔용은
어젯밤 자신의 가계에 늦게온 손님을 때문에 늦은 새벽시간에 장사를 마치고 귀가해 대회 당일! 조금 늦게 일어 났다.
부랴부랴 짐을챙겨 자전거를 강릉까지 가는 버스 밑칸에 싣고 버스에 몸을 싫었다.
대회장인 강릉까지 간 그는 낙담할수 밖에 없었다.
버스 밑칸에서 짐을 내리던 그는 자전거만 싣고 오고 클릿슈즈와 헬멧, 장갑등을 급히나오느라 집에다 두고 온것이다.
대회 시간은 다가오고 집에 갔다올 시간이 없는 김팔용은 그냥 대회장소인 강릉시청으로 향했다. 터미널과 별루 멀지 않았던 강릉시청 까지 몸풀며 자전거를 타고온 김팔용은 후지산대회의 영향인지 많은 바이크 메니아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기념촬영등 유명세를 치르며 먼저 도착한 동호회 회원중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 헬멧과 고글을 빌렸다
2007년 대관령 대회 개회식장 많은동호인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필자도 MTB를 탄후 처음으로 그대회에 참가해 그를 지켜보면서 얼마나 많은 메니아들이 알고 있는지 실감
할수 있었다. 필자도 그 대회 장소에서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대회장에는 엄청나게 많은 동호인들이 참가하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대회 주최즉에서는 국제대회로 부상하기 위해 국제 힐클라임이란 타이틀을 붙이고 일본에서 초청한 아시아 선수권 1인자 일본에 아마모토 가즈히로등 일본에서 참가한 선수들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며 그들에 대한 이벤트를 마련하는등 관심을 보인 반면 정작 같은해 4월 일본도쿄에서 열린 후지산 힐클라임대회 1위를 한 김팔용에게는 별다른 관심과 이벤트가 없었다.
대회에 참가한 일본선수들에게 최명희 강릉시장이 기념품을 전달하고 있다.
필자는 그당시 의아 했다. 일본참가자들에대한 배려가 그정도 였다면 일본에서 1위를 하고온 김팔용을 소개만 해주었더라도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만의 생각인가,,,? 어찌 됬든 개막식이 끝나고 김팔용도 출발지로 이동을 하였다.
하지만 첨으로 로드바이크로 참가하는데다 잊고온 클릿슈즈 장갑등 불편하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던 김팔용
그러나 남에게 불편을 끼치기를 싫어 했던 그는 이내 모든것을 잊고 있는 그대로 경기에 임하기로 하였다..
제5회 대관령 대회 많은 선수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출발 총성이 들렸다. 로드바이크 MTB 상급자들이 출발하고 난후 사이클 3그룹과 함께 참가번호 1907번
김팔용도 출발하였다.
사이클 3그룹에서 출발하는 김팔용 (원안)
김팔용은 핸들과 기어가 적응이 안돼 불안하였지만 안간힘을 쓰며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그의
운동화와 여차하면 놓칠것 같은 맨손핸들 이 문제 였다..물도 미쳐 꼿아놓치 못했다..할수 없었다. 그냥 달려야 했다.
첫번째 물 주는곳에서는 물주는 스테프와 타이밍이 맞지않아 물을 먹지 못하고 달렸다.
그런데 대관령 99굽이중 한구비한구비 돌고돌면서 서서히 운동화와 클릿페달이 적응되기 시작했다.
약 8km지점이다. 언제나 그렇치만 금방이라도 엊을듯한 숨을 고통스럽게 쉬며 한명두명 제치며 올라가던 김팔용의 눈에
개회식때 환영받던 일본선수가 보였다. 그때 였다 운동화면 어떠리 맨손이면 어떠리 저 선수 만은 따라 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그의 특유에 힘을 솟아내며 달려가 그를 앞질렀다.
마지막 순간 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굳은 인상으로 골인한 김팔용의 기록은 44분 07초 로드 바이크를 타고 먼저 들어간 선수가 있었지만 먼저 출발한 사람들 이었다. 기록에서 그에게 뒤졌다. 그는 그대회에서도MTB 사이클 통합 1위를 한것이다.. 그당시 자전거 대회의 특성을 잘몰랐던 각종 언론매체들은 그날 대회의 성적을 알리며
======당시언론기사들======
남자상급 1위는 아마모토 가즈히로(일본) 선수로 44분33초, 2위 최진용 45분 11초, 3위 고병욱 45분 28초를 기록했다.
남자MTB 1위는 정의명 선수로 48분 04초, 2위 박정임 49분 45초, 3위 조종환 51분 35초를, 여자MTB 1위는 이선희 선수 1시간 08분28초, 2위 최민희 1시간 12분 19초, 3위 박미송 1시간 17분 40초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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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기록들을 기사화 하였지만 정작 전체 1위를 한 동호인 김팔용의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또한 대회가 끝난후 패막식장에서 사인회를 하는 아시아 선수권자 일본에 가즈히로와 일본선수들
사이에 동호인 김팔용은 없었다. 그러나 사인회를 하고 있던 그들이 김팔용 그의 기록에 대해 어떻게 생각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바늘 방석이 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회가 끝난후 수 많은 네티즌 들에게 화제가 되었던
사진 하나가 인터넷을 떠돌았다.
바로 이사진
대회 최고 기록을 운동화를 신고 레이스를 펼치는 김팔용
이 화재가 됐던 사진 한장에 수없이 많은 네티즌들은 그를
"대단하다, 지구인이 아니고 외계인이다, 사람이길 거부 햇다". 등등 엄청나게 많은 찬사를 쏫아냈다.
그랬다! 대회장에서 눈에 띤것은 가즈히로등 일본선수들 이었지만
김팔용! 그는 이미 모든 자전거 메니아들에 전설이되어 있었다!
다음편에 [7편] 지독한 연습벌레 김팔용,,,,,,,,, 이 이어 집니다
<< 7편 >>
전편에 이어서
2007년 대관령 힐크라임대회에서 전체 1위를 하며 화제를 만들었던 김팔용! 그의 레이스는 그후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자전거와 원수진 사람도 이렇게는 못탈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동호인이지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팔용 그는 같은해 대관령의 운동화 전설을 만들기전 제주도 한라산 1100고지에서 열린 챌린져 대회에서도
mtb부분 1위를 했다.
그런 김팔용은 2007년 첨으로 생긴 제1회 미시령 힐클라임대회에 어머니를 모시고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에 갈때마다 어디가냐고 물어보시는 그의 어머니! 그는 나이드신 어머니를 모시고 대회에 참가해
미시령 대회마져 접수했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내 덕분인줄 알아라 하신단다,,
항상 아들 잘되라고 빌고 계신다며,,,, 약간의 치매 증상과 청각장애가 있는 어머니가 항상 밝은 웃음과
그런 익살스런 말씀을 하시며 살고 계시는 것은 김팔용의 효도와 어머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때문은 아닐까?
돌아오는길 어머님께 1위 트로피를 주며 그 영광을 어머님께 드렸다고 한다.
또한 그해 오대산 산악자전거 대회와 , 원주 산악 자전거대회 xc부분 1위를 차지하며 이제 자전거와 그는 떨어질레야
떨어질수없는 인생에 동반자가 되었다...
필자는 여기서 가장 많은 대회에서 1위를한 김팔용에 대한 2008년도를 스케치 하기전 그에 대해 다시한번
돌아보기로 한다. 그는 이렇게 보통사람과는 틀린 폭팔력을 가진 특별한 사람일까,,? 엘리트 선수들처럼
특별한 훈련을 받은것도 아닌데 그가 내는 기록들을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평가외엔 머라 말할수도 없는
막연함이 밀려왔다. 그가 자전거대회에 두각을 나타내는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체력은
타고난 것일까?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필자는 누가 머래도 그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타고난 체력이라도 그의 나이는 현재45세이다. 혹자는 불혹의 나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그 나이에 20대30의 젊고 패기 넘치는 선수들도 내기 힘든 기록을 내는것은 순전히 노력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가 장사를 하고 있는 관계로 손님들을 치르고 저녁 늦은시간 퇴근하게 되면 항상 자전거를 타고 남모르게
연습을 한다. 그리고 대회가 있기전 부터 몸관리를 들어가면 철저하게 소식을 하며 그만의 노하우로 몸을 만든다.
그런 그도 살찌는것을 자신의 가장 큰단점이라 생각하여 체중조절을 할땐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엄청난 연습후에도 먹는것을 보면 살찌는 음식은 철저히 피한다. 담배도 안피고 술을 안먹는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체중조절을 위해 음식도 가려서 먹는다.
대회가 있기전 체중관리를 위해 감자와 계란을 저녁대용으로 먹고 있는 김팔용
필자는 그가 먹는 음식에 대해 일일히 나열 할수는 없지만 그와 함께 200km 라이딩을 한후 배가고파 고기라도 왕창먹어야지 살것같은 상황에서도 소식을 하는것을 보며 혀를 차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만의 노하우 인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자전거 대회1등도 좋치만 먹는 즐거움이 인간에게 있기에 그유혹을 뿌리치는 것을 보면
그만의 철저한 스테미너 관리가 그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는
자전거를 만난 이후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인생에 긴항해를 자전거와 함께 할것같다.
그런 자전거와 동반자적인 입장에있는 그는 아직도 쟁쟁한 체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음식조절만으로
그는 기록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필자도 몇번 함께 라이딩을 하적도 있지만 그의 연습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엄청난 연습을 하는 지독한 연습 벌레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기록은 언제든지 무너진다는것을 알고 있는 그이기에 철저한 몸관리와 연습만이 그를 지켜줄수 있는것이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그의 연습 일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그만 달력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연습일지는
가히 잘나가는 연예인 스케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팔용의 연습일지 생활일지와 함께 적혀있는 연습일지 2008년도 5월
한간에 사람들은 그가 어린시절 힘들게 살아온 인생이 그를 최고의 업힐러를 만들었다고도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그것이 지켜질까 ? 위에서 보듯이 그를 지켜내는것은 그의 어린시절이 아닌 지금 그의 노력인 것이다. 김팔용은 사실
몸이 약해서 운동을 시작한것이다. 사회적 약자인 그가 약한몸을 추스리기 위해 시작한 자전거! 그리고 그의 열정이
제2의 인생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위의 연습일지를 보고 놀란 필자는 8월의 일지를 보고 더놀랐다..
무더운 여름 더워서 물놀이를 가가 해야할 시기임에도 그의 연습일지는 쉴날이 없었다 2008년 8월 의 일지 그래 지금까지 그를 만들어 것은 우연으로 이루어 진것이 아니었다.
필자도 언젠가 그를 시기하는듯한 말을 들은적 있었다. 일본 오사카 후지산 대회의 1위 기록과 각종 국내대회 1위기록들이 우수한 선수들이 잘안나가는 대회에서 이루어졋다는 ,,,,,,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싶지만 그렇게 한들 무었하리 나는 그냥 세상이 어떠하더라도 나만은 이사람에 대해 진정한 마음으로 그를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스맨 김팔용 이 아니었다. 방송을 통해 김팔용은 아이스맨으로 유명하다. sbs 세상에 이런일이에 주인공으로 나가면서 많은 방송사에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아이스러운
모습을 많이 내보내 자전거대회 우승자 김팔용이 아닌 아이스맨 김팔용에 가려 우리는 그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아이스크림을 안먹는다는것은 아니다. 얼마전 만난 김팔용 깊어가는 가을녁 에도 연습후
저녁장사를 준비하며 가계앞 벤치에서 아이스 크림을 먹고 잇는것이 목격 되엇다.
2008년 11월초 약간 쌀쌀한 날씨에도 아이스 크림을 먹고 있는 모습
그모습은 역시 그의 명성 다웠다. 앉자있는 자리에서 20개나 되는 아이스크림을 혼자서 다 먹고 있는것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오늘 자전거타고 180km 나 되는 라이딩을 혼자서 다녀 왔다는 것이다. 그 불난 속을 아이스크림으로 달래던 김팔용,,, 아마도 방송에서는 자전거 대회 우승자 보다 이런 아이스맨 김팔용이 더 필요 할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이스맨으로 가려져 있는사이 그의 진솔한 모습을 제데로 보지 않은 사람들이 때론 그를 바보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가까이서 몇일만 이라도 함께 대화를 나누어 보면 그의 인간미에 빠져 들게 된다. 인생을 살면서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는 그의 성격이 또한 어떤 부탁을 들으면 거부하지 못하는그의 성격이 오히려 자신의 오해를 불러 일으켜 자신의 정신적 괴로움을 산 일도 많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성격은 정말 천사 같다. 언젠가 같은 스포츠 클럽에 회장님과 오해가 있어 고민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평소 존경하던 회장님이라 오해를 받고 있던 그가 그 오해를 풀기 위해 편지를 썻다. 마지막 구절에 있던 글이 마음을 아프게 햇다. '' 회장님 저에 대한 오해가 풀리셧다면 문앞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 주세요 풀리지 않으셧다면 빨간 손수건을 걸어 주시면 다시는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라는 문구를 보고 요즘에도 이런분이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다는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마음으로 감동이 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 편지를 전하지 말라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것을 오히려 다른 문제를 일으킬것 같다고,,,,, 후배의 직언을 받아들인 그는 그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후 그 오해는 조금 식 풀어 졌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이 따뜻한 김팔용을 아이스맨이 아닌 진정 자전거 동호인 스타 김팔용으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