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은 커녕 사는 도시 한 바퀴 자전거 여행도 손사래칠 정도로 열악한 생활이었건만,
친척의 배려와 겹치는 우연으로 팔자에 없는 한 달 간의 미국살이를 얻었다.
출국 전 인천공항 벤치에서, 과연 이 뜬금없는 여행이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스러웠던 나는 수속 전광판만을 몇 십분동안 응시하다가 그래도 이왕 가는 해외구경 나중에 추억이라도 실컷 해보자 마음먹고 휴대폰을 꺼내 라스베가스에서 파는 기념품들을 한번 훝었다.
금새, 호텔을 이리저리 건너뛰며 텀블러와 키홀더를 쓸어담는 내 상상속 모습에 흐뭇해졌다. 몇일 전까지 잡초나 뽑다가 슬롯머신 핸들을 내리면서 시가를 꼬나물고 칵테일을 시키는 내 이미지가 스스로 대견해 킥킥댔다.
참 가벼운 사람이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국내선을 타고 사막을 지나 도착한 이 곳의 모습은 상상 그대로 화려했다. 밤이 없는 스트립과 다운타운의 네온라이트,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그림같은 집.. 야자수..
그렇게 이틀정도를 시차와 음식에 적응해가며 지내고 마침내 어제 밤 스트립에 발을 디뎠다. 머릿속에는 기념품 생각, 술 생각, 사진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돌아와서 내가 새벽까지 우울한 마음에 잠을 못자고 이 곳에 글을 올리는 이유는 기대와 너무나도 똑같은 타향의 모습이 나에게 즐거움보다는 절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흐린 눈으로 1센트 빠찡꼬에 걸터앉아 한나절을 허비하는 홈리스들과 바로 30미터 옆 포커테이블에서 천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잃고도 좋다며 희희덕 대는 부자들, 대형 스포츠 경기 화면 앞에서 괴성을 지르다가 터치다운을 하자 돈을 따 기쁜 마음에 드레스를 벗어던지려 날뛰는 여성은 내 상상속에서는 그 자체로 자유로운 외국의 로망이며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직접 상황을 목격한 소감은 그것이 아니었다.
내 집에서의 나의 자본에 대한 분노와 기득권을 향한 증오는 한낯 한달짜리 외국 여행 앞에서 종이처럼 가벼운 것이었나?
순진한 사람들을 갈아 짜낸 돈으로 성채를 짓고 그들의 빈 주머니에 가끔 들어오는 몇 센트까지 기어이 탈탈 털어내며 양심을 팔아넘기도록 만드는 그 사람들에게 캐리어를 가득 채운 기념품과 술담배로 충성하려 한 내 자신이 더럽다.
평소에 쥐어보기 힘든 돈을 손에 쥐고 있음에도 처음 지갑에 넣을 때 만큼 넉넉하고 행복한 마음이 아니다. 아까 숙소로 돌아온 직후에는 자해충동까지 일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허세를 부리며 내가 미국 물건 다 사오겠다고 지랄을 했지만 내심 내가 쓸 돈도 모자라니 친구들 주기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소중한 벗들에게 좋은 선물이나 하나씩 해줘야겠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부모님 모시며 가장 노릇하는 친구와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내 모든 소중한 사람들 생각하니 그 깟 포커 세트를 안 사간 들 무슨 문제이며 호텔마다 있는 열쇠고리를 다 안모은들 무슨 상관인가? 읽는 분에 따라서는 정말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한심한 인간이 맞기에 한탄하며 쓴다.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풍족한곳이다. 사는 사람의 말로는 거지도 하루세끼 뷔페를 먹곤허름하지만 아파트에서 따뜻한 물로 씻는 곳이 라스베가스라고 한다.
하지만 동지도 사랑도 없고 오직 돈만이 만물을 움직이는 이 곳에서 나 같은 사람은 외로워 살아가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