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나는 신이었다. 13
게시물ID : civil_10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가멜가가멜
추천 : 6
조회수 : 1489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0/10/27 11:10:15
층계를 따라 5층을 올라가자 문 하나가 나타난다. 남자는 문을 천천히 열고 나에게 들어오라 권한다.
나는 문턱을 넘으며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훑어본다. 잘 꾸며진 홀은 상당히 넓었으며, 바닥은 과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윤이 날 정도로 깨끗했다. 그리고 눈이 부실정도로 환했다. 그렇지만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딥니까? 당신은 누구고요."

"안 쪽에서 얘기하시죠."

남자와 나는 따로 마련된 작업실로 들어간다. 작업실엔 수 십대의 최신형 PC가 하얀 탁상위에 놓여져 있었다. 또 바닥엔 나무 뿌리처럼 굵직한 선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는데, 열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저건?"

내 옆구리에 끼고있는 같은 형태의 노트북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나에게 편히 앉으라고 말했다. 나는 앉지 않고 그대로 남자를 쳐다봤다. 

"안녕하십니까."

등 뒤에서 고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여자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은근히 늘어진 주름 위로 덧붙인 화장이 보기 흉했다.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작은걸로 보아 얼추 168은 하지 않을까. 여자는 어지럽게 높인 케이블선을 발로 밀어내며 의자 하나를 간신히 자리시킨다.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가 나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보셨겠죠. 저희도 당신과 같은 게임 참가자입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럼요. 우리는 진작에 노트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용카드로 계산해 이렇게 멋진 작업실을 하나 만들었죠. 밖에서는 이 공간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도 그 신이라는 사람에게 물건을 받은건가요?"

"그렇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노트북을 켜더니 화면을 내쪽으로 돌려놓고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시나요? 게임 상황을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모드가 있는데."

"네?"

나는 남자가 권했던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본다. 남자가 나의 곁에 붙어 뭔가를 알려준다. 버튼 몇개를 조작하자 어떤 그래프가 하나 뜨고, 그 옆에 작은 사진이 일렬로 나열된다. 사진을 클릭하자 사진이 커지고, 그 밑으로 프로필이 뜬다. 나의 사진도 보인다. 탈락한 자는 x자가 돼있다. 여자는 내가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마타 하리라고 합니다. 말미잘족의 신이죠."

자신을 마타 하리라고 밝힌 여자의 목소리에 별로 집중할 수가 없다. 나는 모니터에 가득 찬 사진을 하나하나 확인해본다. 내 눈알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원숭이족의 신은 야비하게 생긴 청년이다. 장어족의 신은 키가 작고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 고등학생이다. 사슴벌레족의 신은 우락부락하게 생겨 인상이 썩 좋지않은 남자이다. 도요새족의 신은 얼굴이 기록돼 있지 않다. 올빼미족.. 원숭이족.. 그리고 탈락한 타민족의 신들. 그 옆에 한 남자가 눈에 띈다. 내 옆에 서있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동자가 흐릿한 중년이다. 이름은 라울 라조르박이다. 나이는 42세. 휘하에 두고있는 민족은...

"돼지족..?"

그 이름을 보자마자 혈관에 흐르는 피가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다. 눈 뒷쪽에 달린 영사관이 영화 한 편을 틀어준다. 죽어가는 나의 민족들. 불에 타오르는 나의 사람들. 돼지족의 소문으로 문명 말로에 들어설 뻔했던 안좋은 시간들..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하나로 우리 민족은 나락 끝까지 떨어졌었다. 몇 명의 인명이 죽었는지 모르겠다. 화가 난다. 나의 민족을 괴롭혔던 자가 내 옆에 서있다. 나는 순간적인 기분에 자리를 박차, 남자에게 주먹을 날린다. 주먹이 남자 얼굴에 그대로 박혀들어간다. 상대방의 앞니가 부러지고, 피가 튀긴다. 갑작스런 공격에 돼지족의 신은 방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진다. 난 분을 삼키지 못하고 남자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가한다. 아드레날린이 미친듯이 분출된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다. 이 자를 죽여버리겠다. 나의 민족이 당했던 아픔을 그대로 전해주겠다. 살기를 가득 머금고 나는 의자를 집어든다. 그러자

"그만 해요!"

날카로운 쇳소리가 손길을 막는다. 마타 하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의자를 제 자리에 놓고 털썩 주저앉는다. 돼지족의 신. 그러니까 라울 라조르박이 끙끙 앓는 소리를내며 간신히 일어선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게임 플레이 스타일을 보면 추측할 수 있거든요. 당신은 자신의 민족을 사랑합니다. 마치 그들이 살아있는 것 처럼 생각하죠."

"살아있어!"

"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 추측이 맞았군요."

"살아있다고! 당신이 나의 민족을 나락으로 몰았었지. 지금은 아냐. 내가 되돌려놨거든."

"살아있다고요? 어디에요? 그들은 숫자로 된 체계일 뿐입니다."

"아니야. 살아있어."

"증명할 수 있습니까?"

"...."

나는 꿀먹을 벙어리처럼 입을 닫는다. 그들은 살아있어. 증명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살아있어!

"어쨌든 당신에게 가한 행동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왜 사과하는 거지?"

"왜겠습니까? 오면서 총을 든 괴한들과 마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라울 라조르박은 입안에 고인 피와 침을 한데 모아 퉤하고 뱉어버린다. 부서진 이 조각이 빨간 침덩어리에 섞여있다.

"도요새족의 신 말대로 게임은 급박해졌습니다. 신용카드는 무제한으로 긁어지고.. 그 덕에 일부 사람은. 그러니까 올빼미족의 신이죠. 그는 살인청부업자와 폭력배들을 고용해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참 호전적인 사람이죠. 지금 올빼미 민족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사슴벌레족 군대에게 참패한 덕택에 억지로 평화협정을 맺게됐고, 기하급수적인 금액의 세금을 강제징수당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올빼미족의 신은 더 많은 사람의 킬러를 고용해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죠. 조급할겁니다. 민족이 패하면 신도 패배하는 거니.."

"그래서?"

"그래서긴요. 동맹을 맺자는 겁니다. 올빼미족의 신처럼 공격적인 사람을 제거하고나서 우리끼리 싸우자는 그런 이야기죠. 머리로 싸우는 겁니다. 총과 미사일이 아니라.."

"동맹이라.."

난 머리를 긁적인다. 마타 하리가 라울 라조르박의 제안을 거든다.

"그래요. 동맹을 해 나머지 사람을 제거하는 겁니다."

"그 후는요?"

"모릅니다. 일단 모두 다 제거하는 겁니다."

"패배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릅니다. 들은 이야기가 없거든요."

"...."

남은 민족 수가 그리 많은 건 아니다. 하지만 변수는 신이 없는 민족이다. 그들은 조용히 힘을 키우고 있다. 그렇지만 게임을 같이 한다니.. 나는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승락하지 못한다. 
그 때 말미잘족 신이 들고있던 노트북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타 하리는 노트북을 켜더니 입을 쩍 벌린다.

"이럴 수가.... 내 민족이.."

라울 라조르박도 상처를 추스리며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나도 그들을 따라 게임 상황에 눈길을 돌린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