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일본 아사히신문 5월 1일자 전면에 실린 윤봉길의사의 체포모습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속 인물이 과연 윤봉길의사일까요?
잘보세요 그의 얼굴이 윤봉길의사인것 같습니까? 잘모르시겠다구요?비교사진을 봅시다.
위는 윤봉길의사의 사진이고 아래는 일본신문에 실린 윤봉길의사의 체포사진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25살로 앳된 청년인데, 저 사진속 호리호리한 중년 남성은 누구인가요?
그렇습니다. 저 사진은 일제에 의해 매우 악의적으로 실린 조작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의 왜곡에 대해서는 강효백 경희대교수님에 의해 밝혀졌는데, 몇가지 근거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폭탄이 터진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당해 쓰러졌다.
주먹,군화,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사람이 죽게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였을것이다."
"잠시후 그 조선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곧 차 한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상하이 타임즈-
"폭탄 투척자(윤봉길)의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은 분노하였다.
그들은 그를 붙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으며 주먹으로 몰매를 때리고 그의 옷을 찢어 내었다. 그는 머리에서 허리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노스 차이나 헤럴드-
당시 일본을 제외한 모든 신문이 공통적으로 집단으로 구타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얌전히 두팔을 잡고 체포하는 사진이라니요.;;일본이 실은 사진에는 어디에도 구타를 당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에게 구타당한 모습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사진조차 실을수 없을 만큼인지 짐작이 갑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인해 수많은 중국인들이 감명을 받아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만약 구타를 당한 사진을 신문에 그대로 내었다면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마음에 불이붙는건 불보듯뻔하며, 국제적 여론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뻔하기에 테러범(일본입장)도 신사적으로 잡아가는 일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저렇게 조작된 사진을 낸겁니다. 참으로 치졸하지 않습니까?
그 해 12월 19일 일본인들은 윤봉길의사를 처형한 후 시신을 쓰레기 하차장에 던져 방치시키는 만행까지 저질릅니다.
순국직전 일본인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마지막까지 당당하고 두려움이 없었던 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일을 하고 미련없이 떠나가오"
거사직전 김구선생님께 남긴 그의 유서를 읽어보면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 윤봉길의사의 유서 중 동포에게 보내는 글-
이때 그의 나이 25세....
왜 더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허나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던졌습니다.
홍커우공원 의거
: 일본 제국주의가 자신의 위세를 더욱 높이고자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전승축하기념식을 함.
이때 윤봉길의사가 단상으로 접근해 폭탄을 던져 당시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그자리에서 폭사시켰고,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 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등 제국주의 침략의 주요인사들에게 중상을 입힌 일대 쾌거. 그 후 대대적으로 중국언론에 보도되며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중국이 적극적으로 조선독립에 협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4억 중국인을 부끄럽게 한 어느 조선청년의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