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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후에
게시물ID : gomin_15247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감자샐러드
추천 : 0
조회수 : 113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9/27 12:45:06
1.
헤어진 후에는 그저 아팠다. 시간 앞에서 영원한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시때때로 숨이 막혔고 시간을 의심했다. 

2.
술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가족 아무도 술을 드시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제삿상에는 술 대신 당신이 즐겨드시던 사이다가 올라갈 정도로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서 이주후, 일을 그만두었다. 그만두기 직전에는 인수인계를 하느라 정말 바빴다. 술을 마실 시간도 울 시간도 없어서 주로 퇴근할때 길바닥에서 울었다. 그렇게 견디다 그만두고 나서부터 이주까지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헤어지고나서 한달째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원래 맥주 한캔을 다 못마셨었는데, 이를 악물고 마셨다. 밤에는 술을 마시고 낮에는 잠을 잤다. 완벽한 폐인이었다.

3.
3년간 다니다가 헤어진 달에 그만두었던 직장은, 내 편이 없어서 힘든 곳이었다. 그 안에서 힘들때는 직장 어느 구석에서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했었다. 집에 가기도 힘들어서 그냥 거기서 밤을 샐때는 새벽에 영상통화를 했었고 일이 가장 힘든 요일에는 나를 데리러왔었다. 모든 인계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출근했던 그날은 여름답지않게 쌀쌀한 날이었다. 냉랭함 속에서 나오면서 무엇에 먼저 속상해야하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내가 미친듯이 힘들어도 더이상 내 옆에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4.
매일 술을 먹고, 매일 산에 갔다. 잠을 자고 싶어서 체력이 되든 안되든 그렇게 했다. 홧김에 소개팅을 했다. 몇번 만나다가 상대방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누구를 만날 준비는 커녕 자기 자신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주제에 가당찮은 짓을 했던게 쪽팔려서 술을 마셨다.

5.
우여곡절 끝에 예전 직장으로 돌아갔다. 월급인상과 출퇴근 시간 단축과 그만두고 싶으면 반년만 더 하고 그만둬도 된다는 수많은 약속을 받고 다시 시작했다. 그래봤자 일은 힘들었고 가장 힘들었던 그 요일을 다시 처음 마주했을때, 와르르 무너졌다. 직장에서 집까지 네시간을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하나. 

6.
한참 폐인꼴로 살때 알게된 친구가 있었는데 나만큼이나 만만찮게 상해있었다. 한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던거라 가까운 친구들에게 할 수 없었던 말이 그 친구에게 줄줄 새어나왔다. 우리는 술을 마시면 주로 내 전남자친구의 욕을 했고 그래도 바람은 아니었을거라는 내 쉴드에 그 친구는 남자 입장에서 봤을때는 백퍼 바람이라며 내 복장을 뒤집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모 연예인보다 못생긴 주제에 부끄럽지 않냐며 나를 만날때는 히잡을 쓰고 나오라고 요구했고 그 친구는 내 외모 정도면 다른 사람의 안구에 폐를 끼치는 수준이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라고 했다. 우리는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면서 웃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고 나만큼 만신창이였던 그 친구한테서 종종 만신창이 판정을 받았다. 

7.
몸을 움직이는 모든 활동을 다 싫어했다. 체력은 바닥이었고 헬스든 요가든 한달 끊어놓고 달에 두세번 갈까말까를 반복했었다. 헤어진지 4개월 남짓, 집에서 가장 가까운 헬스장을 끊었다. 누가 봐도 운동이라고는 1도 안할것같이 생겨서 100% 체지방 몸매를 보유하고 있는 나를 보며 트레이너는 주2회나 주3회 나오는 회원권을 권했고 나는 트레이너에게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은 모두 운동하겠다고 했다. 그 후, 새벽 다섯시에 퇴근해도 운동을 했고 술을 밤새 퍼마시고도 운동을 했고 비가 와도 운동을 했고 일하다 코피가 터진 날도 운동을 했다. 일이 숨막히게 바쁜시기와 겹쳐서 살고싶지않게 몸이 힘들었지만 밤에 잠을 잘 수 있었던것과 맞바꾼셈이라 치면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8.
여전히 나는 몸과 정신을 혹사시키고 있다. 일주일에 삼일은 술을 마신다. 헬스장에 주 5일을 출석하면서 손발에 쥐가 날 정도로 운동을 한다. 새벽 네시 다섯시까지 남아서 일을 하다가 퇴근한다. 가끔은 술을 먹고 그 친구에게 전화해서 운다. 다만 어느 하루는 내 자신이 놀랄정도로 예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말 우연히 휴대폰안에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했을때도 빠르게 손을 놀려 삭제한다. 함께 있었던 공간에서 함께 있었던 시간을 떠올리지만 다시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끔은 다른 사람을 두고 저 사람과 연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까지여서 나를 떠났고 사랑하는 마음이 여기까지어서 나는 지금 괜찮다. 나는 이제서야 우리가 헤어졌다고 느끼고 사랑이 끝났다고 느낀다.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여유를 한때 나와 많은 것을 공유했던 그 사람도 느끼기를, 그래서 더 나은 날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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