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 수비를 위하여
수성대장(守城大將) 이양원(李陽元) 휘하의 중위대장(中衛大將)에 임명되었고
다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휘하의 부원수로서 한강을 지켰다.
이 때 김명원은 임진에 가 있었으므로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을 따라
양주에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고 함경도병마사 이혼(李渾)의 원군과 합세하여
양주 해유령(蟹踰嶺)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결과 적의 머리 70급(級)을 베었는데 이것은 왜란 초기 처음 있는 승첩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이양원이 산골에 숨어 있어 소식이 끊겼는데, 그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도망쳤다는 내용의 장계(狀啓)가 올려져
당시 우의정 유홍(兪泓)에 의해 참형을 당하였다.
이날 오후 양주에서 다시 첩보가 도착하여
왕이 그를 죽이지 말라고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어려서부터 호협심이 대단하여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여
남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의협인(義俠人)이라고 불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의의 마음을 내어 나라를 구하자고 권하니 모여든 의사가 수백명이 되었다.
의병을 인솔하여 고을의 주위를 돌면서 우선 고을만이라도 지키기로 하고
적을 만나는 대로 격살하여 막대한 전과를 올렸고 왜적들도 장사진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군위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통과할 일이 있어도 길을 우회하여 다녔다.
어느날 왜적이 복병을 해놓고 유인하는 것을 모르고 추격하다가
적의 함정에 빠져 사면으로 포위되었으나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역전하였다.
적병이 휘두르는 칼에 한쪽 팔이 잘렸으나 굴하지 아니하고 외팔로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승산이 없다 판단한 대다수의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음에도
마지막까지 동문을 사수하다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