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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에 출전한 이야기
게시물ID : humorbest_10982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91
조회수 : 8586회
댓글수 : 18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5/07/22 19:55:05
원본글 작성시간 : 2015/07/22 18: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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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때 서울로 상경한 이후 지금까지 내가 그분들에게 해드린 것은 별로 없지만,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자취방 주인 할머니의 영향이 가장 컸지만,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친손주처럼 대해주시고는 
한다. 그분들과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일화 중 하나는 슈퍼마켓 아저씨와 함께 준비했던 전국노래자랑 출전기이다. 

슈퍼마켓 아저씨, 이 분은 올해 70이 넘으셨지만, 내가 처음 그분을 뵈었을 때는 50대였다. 
처음 뵈었을 때 "할아버지, 이거 얼마에요?" 라고 물어봤을 때 진노하며 

"총각, 올해 몇 살이야? 

"스무 살 인대요." 

"나랑 겨우 30년 정도밖에 차이 안 나는데, 내가 무슨 할아버지야."

"아...저희 아버지랑 비슷하시네요."

"그래, 그럼 자네 아버지한테 할아버지라고 불러? 아니잖아. 앞으로 아저씨라고 불러."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분을 아저씨라 부른다. 몇 년 전 중랑구에 전국노래자랑 열풍이 불었을 때 아저씨는 내게 진지하게 
"자네 목소리가 좋은데 전국노래자랑 한 번 나가보지그래. 기타도 좀 친다면서."라며 전국노래자랑 신청을 권유하셨다. 

"저 그냥 취미로 기타 치는 거지. 남들 앞에서 노래할 정도 실력은 안 돼요."

"그런 게 어딨어. 일단 기타 가져와서 한 번 불러봐." 

"네..네?? 지금요?" 

"그래 당장 가져와서 불러봐."

결국, 나는 슈퍼마켓 한쪽에서 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 아저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들으시더니, 일단 예선은 통과할
실력은 되는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흥'과 강한 남성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다른 노래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전국노래자랑을 내가 매주 보거든. 노래 실력이 중요한 게 아니야. 객석의 할머니들을 춤추게 만들 흥이 있어야 하고, 
남자라면 남자답게 씩씩하게 노래를 불러야 해. 좀 전에 자네가 부른 노래에는 전국노래자랑의 핵심인 그 두 가지가 없어."

속으로 '그럼 기타 치면서 마징가 제트라도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저씨 그럼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좀 전까지만 해도 '내가 무슨 전국노래자랑이야.' 했던 나는 아저씨의 칭찬으로 마음은 이미
송해 아저씨와 인터뷰를 나누고 있었고, 최소 인기상은 수상한 기분이었다. 

"우연이의 우연히를 불러야지. 남자답게. 그 노래가 남자가 불러도 흥이 사는 명곡이야."

아저씨와 함께 우연이의 우연히를 들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났네.~~" 로 시작하는 그 곡은 일단 신이 나는 노래는 맞았다.

"저.. 아저씨, 이거 여자 노래인데요." 

"그러니까 박력 있게 자네가 남자답게 불러야지. 군대 갔다 왔지? 군가처럼 부르면 되는 거야." 

며칠 동안, 아저씨에게 남자답게 흥을 살려 노래하는 법을 전수 받고, 물론 할머니들을 유혹하는 춤동작도 함께 가르쳐 주셨다. 

"허리 돌려. 젊은 놈이 디스크 있어? 허리를 왜 이렇게 못 돌려! 마구 돌려."

그날 나의 모습은 우연이의 우연히를 부르는 하와이의 훌라 댄서가 된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아저씨 손에 이끌려 동사무소에서 신청하고, 구청 강당에서 열린 예선에 참여하게 되었다. 
강당에는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예선을 준비했다. 
함께 노래와 안무를 지도해주신 아저씨는 함께 강당으로 오셔서 "평소대로 하면 자네도 방송 타는 거야!" 라며 내게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노래를 전문가들에게 평가받는다 생각하니 떨렸다. 
그리고 긴장은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지배해 결국 '우연이의 우연히'를 지독한 허리디스크 걸린 인생 황혼기의 훌라 댄서처럼 뻣뻣하게 
훌라 춤을 추며, 알프스 산맥에 거주하는 고운 목소리를 가진 목동의 요들송처럼 부르고 말았다. 
당연히 결과는 "땡! 수고하셨습니다." 였다.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긴장해서..."

아저씨는 우연히 가사처럼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수고했다 말씀하시며 
"아.. 우연이의 우연히는 자네한테 안 맞았어. 그 한혜진이가 부른 꽉 낀 청바지 그 노래를 했어야 하는데.." 라며 아쉬워하셨다. 

그리고 소문은 빠르게 번져 나는 한동안 동네에서 우연이 총각이라 불리게 되었고, 남성미를 강조했던 아저씨께서 내게 왜! 여성 트로트 곡을 
부르라고 하셨는지는 지금까지 의문이다. 
출처 전국노래자랑 본선의 벽은 매우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우연이의 우연히는 제 마음속의 금지곡이며, 나이트클럽을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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