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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 2015년 여름호 위만조선 왕험성 위치고찰
게시물ID : humorbest_10989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15
조회수 : 2454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5/07/24 02:05:38
원본글 작성시간 : 2015/07/21 17: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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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이 논문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군사학적 효율성으로 따져보니 사기기록에 근거에 지금의 평양(왕험성으로 비정되는)을 공격하는건 매우 어렵다.
그래서 지금의 평양은 왕험성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부제인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의 연고권 개입 명분에 대한 함의"에서 보듯이
3천년이 넘은 과거역사에 기반해 중국이 연고권을 주장할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았으며 국제법상으로 전혀 통용되지 않고,
영토분쟁관련하여 "현점유가 가장우선"이라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례조차 검토하지 않은 "상상"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를 인용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기, 한서, 자치통감등에 따르면 한나라 육군은 연(燕)과 대(代)에서 모집된죄수 부대로, 이 연 ․ 대 지역 군사가 ‘요동(遼東) 군사’들로 표현되었다. 
대는 지금 하북성장가구 울현 ․ 회래 일대이고 연은 지금 역수 유역과 북경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당시한나라 국경지대인 요동은 하북성 동북단에서 멀지 않은 지역을 지칭함을 추정할 수 있는대목이다. 1)
군사 모집과 군대 이동의 효율성을 고려하면 군사 모집지인 연 ․ 대 지역은 군대출발지인 요동 내부이거나 가까워야 한다. 2)

또한 한나라 수군이 산동성 북단 동래(東萊)에서 출정한 것은 당시 요동반도가 한나라 요동군 관할이라는 사학계 다수 의견과는 달리요동반도가 한나라 세력권이 아니라 위만조선 혹은 또 다른 비우호적 세력의 수중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만일 요동반도가 우호세력권이었다면 한나라 수군은 요동반도 남단인 여순이나 대련 또는 압록강 입구인 단동에서 발진했을 것이다. 3) 

수군은 매우 가변적인 해양환경을 극복해야 하므로 최단거리를 기동 루트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항구로 쓰이는 진황도를 수군의 발진기지로 하지 않은 것 역시 이곳이 위만조선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한나라 육군과 수군이 모두 한반도에서는 원거리인 하북성이나 산동성 북단에서 출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나라 육군이 원정을 출발한 지역은 현 중국 하북성 내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의 태자가 한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무장한 군사 1만명을 이끌고 국경인 패수를 건너려 하자 초기 전투에서 이미 많은 군사를 잃은 한나라 군부에서 위협을 느껴 무장해제를 요구하다 협상이 결렬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위만조선태자가 인솔한 병력 1만 명은 적어도 도성 수비대와 왕궁 경비를 포함한 위만조선 전체 병력수의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4)

논문의 일부인데, 이 논문의 서술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증거"에 대한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이러는 것이 합리적이다와 이럴것이다로 일관하는 서술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2) 효율성을 따지면 당연히 징병지역이 출발기지와 가까와야 겠죠.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당때도 대고구려전쟁에 대한 징병은 전국적으로 행해졌고, 임진왜란때 이여송이 이끌어던 원군의 상당수는 요동병이 아닌 남방병
(중국 남부지역병사)이었습니다. "당위"와 "사실"의 혼동입니다.

그래서 가까와야 하니 요동이 징병지역 가운데 하나인 대나라 지역(하북성)과 가까워야 한다고 주장하는건 
요동의 위치를 현재 요하 서쪽으로 당기기 위한 끼워 맞추기이고 방법을 다르게 하는 전형적인 유사역사입니다.

3) 2)와 다르지 않습니다. 요동반도가 우호세력권일 경우 효율성을 따지면 그래야할수 있겠지만, 대규모 군사작전이 효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건
역사가 증명합니다. 수양제가 2차 고구려 원정을 위해 선택한 출발지는 북경 근교의 탁군이었지만, 효율성을 고려할때(행군거리) 북경보다 요동근방이 되는게 더 효율적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출발기지는 북경이었습니다. 

4) 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위만조선의 태자가 항복하기 위해 간다고 했을때 항복의 뜻을 보이기 위해 태반의 병력을
데리고 갔을수도 있습니다. 이 병력이 전체병력수의 일부가 되야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국방부관련 학술기관들은 이전부터 이른바 역사적 "고토"에 대해서 매우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이 긍정의 태도는 고구려나 고조선의 강역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대륙의 영역을 말하는 겁니다.

국방연구는 등재학술지가 맞으나, 국방관련연구에 있어 등재학술지로서 자격을 가지는 것이지
역사에 대한 검토에 있어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 논문처럼 명백하게 상상속의 "중국의 비상사태시 연고권주장"같은 목적을 가지고 쓰는 논문은 검토할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출처 https://www.kndu.ac.kr/rinsa/index.jsp?mid1=00000135&mid2=00000682&mid3=&contents_seq=31584&b_mode=R /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국방연구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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