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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친척이었던 탈북자의 5.18에 대한 증언입니다. txt
게시물ID : bestofbest_1100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이다주세요
추천 : 303
조회수 : 25051회
댓글수 : 6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3/05/16 12:37:11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5/15 18:54:55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친척이었던 강명도 씨는 자신의 저서 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북한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명도 씨가 당시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실토한 임천용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점을 유의하십시오:

"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황금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자간의 갈등 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라며, "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 응용·활용보다 사태 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 그 후 사태는 22일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받았을 때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의 얘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내렸다. 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소 (일명 121호 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 명령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 북한 최대의 대남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 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 명의 정예 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써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옮겨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돌연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공작원들은 무기를 내려야만 했다." (강명도 저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39-2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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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북한군 침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측 주장도 있는데 방송에서 인터뷰 했다고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북한에서 몇명이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체는 어딨습니까?
임무 다 마치고 다시 북한으로 올라갔나요?
당시 대한민국 안보가 무슨 동네 뒷동산 올라가듯이 그 정도밖에 안됐습니까? 북한군이 맘대로 왔다갔다 하게?


출처: http://blog.naver.com/chiyahn/2017130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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