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사단
* 늘 그러하듯 망상주의, 긴 글 주의, 오글주의
우린 또 만날 겁니다.(톨비쉬 ver.)
언젠가 나에게도 끝이라는 것이 찾아온다면 그 끝에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행복하게 눈을 감게 될까? 아니면 전장에서 나의 신념과 정의를 관철하다 죽음을 맞을까? 같은 생각들. 답이 없는 그 생각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엘베드의 조장이자 기사단의 구성원으로서 죽음을 두렵게 여긴 적이 없었다. 되려 순직은 기사단원으로서의 가장 명예로운 끝이라고 여겼었다. 만약 개인의 안녕와 기사단 전체의 안위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때가 온다면 나는 종국엔 후자를 고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마치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과도 같이 내가 구축한 세계의 일부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에린은 그녀를 두고 세계의 구원자라 칭했고, 그녀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일들을 하나씩 해내기 시작했다. 여신을 구했고 사도를 퇴치했다. 타락한 빛의 기사를 처단했고 타락한 여신의 부활을 막았다. 그녀의 업적이 쌓여갈수록 에린은 그녀에게 더 많은 짐들을 지웠다. 나는 그녀와 내가 어딘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책임'의 무게를 아는 이. 나만큼은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녀는 늘 항상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를 짓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묵묵히 그녀의 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해 나갔다. 언젠가 그녀가 힘이 들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혼자서 이 세상의 무게를 양 어깨에 짊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녀의 곁을 지키리라고. 설령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제바흐와의 결전. 모두가 쓰러지고 나와 그녀만이 남았을 때, 나는 바닥으로 추락하려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그녀에게 자신이 오래도록 생각해온 바를 전했다. 적어도 저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혼자 남겨두지 않을 겁니다. 간절한 바람이 닿기를 바랐다. 세상을 구하는 일도, 선지자들을 저지하는 일도 물론 중요했지만 그에 앞서 그녀에게 전해야 했던 말. 거친 숨 사이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그 단어들을 곱씹으며 실감했다. 내가 그녀에게 건넨 그 말은 누군가 나에게 해주길 바라는 말이었음을.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죽음까지 이르는 그 길이 홀로 외로울까 두려운 것이다.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천천히 감기는 나의 두 눈에 듬직한 누군가의 등이 보이기를 소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을 그녀에게 대입했다. 만약 내가 그녀라면, 늘 전장에 홀로 남겨져 싸워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더라면 나는 어떤 말을 가장 듣고 싶을까? 답은 나와있었다. 분명 내가 그녀라면, 그녀와 같은 처지였더라면 나는 분명.
"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마지막까지 제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
* * *
" 있잖아, 톨비쉬. 기억하고 있어? 그 때, 제바흐와 싸웠던 날. "
" 물론입니다. "
"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만약 그 때에 내가 거기에 홀로 남겨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해. "
" ... 어떻습니까? "
" 으음, ...또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조금 슬퍼졌을지도 몰라. 어쩌면 엉엉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
그녀는 농담하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이내 나의 손을 꼭 쥐었다. 나는 힘을 실어 그녀의 손을 쥐고 싶었지만 몸이 생각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이후 에린에 평화가 찾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단 그 전투에서 뿐 아니라 그녀와 나는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서로를 의지했다. 밀레시안인 그녀에게 죽음이란 끝은 없었기에 나는 더욱 더 분발해야 했다. 그것은 약속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겠다는 약속. 그러기 위해서는 결코 내가 먼저 바닥에 무릎을 꿇는 일이란 없어야 했다. 그 순간부터 결코 두렵지 않던 죽음이, 그 끝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홀로, 내가 없는 마지막을 견뎌낼 것을 상상하면 뜨끈한 것이 가슴 속에서 울컥 치솟았다. 상냥한 그녀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건 그 날의 그 약속은 굳건한 심지가 되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시간이 쏘아놓은 살처럼 흐르고 나는 기사단에서 은퇴해 작은 마을에 새 보금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내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종종 나를 찾아와 안부를 전하고는 했다. 또 다른 대륙의 소식,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바다 건너 마을의 정경과 훌륭한 기사단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옛 견습 기사단원들의 무용담.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세상사들을 이야기했다. 야속하게도 나의 시간은 그녀의 시간보다 한 발 앞서 달려 나의 손과 얼굴에 삶의 흔적과 주름을 남겼지만 우리 둘 사이가 변하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꼭 그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나를 대했다. 그 사실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저 단 한 가지의 걱정이라고는 반평생 내가 지켜온 약속의 기한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다사다난 했던 내 삶의 끝에서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두려움 없이 그녀를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녀와 같은 밀레시안이 아님이 원망스러웠다. 좀 더 오래, 좀 더 함께 그녀와 걷고 싶었다. 불가능한만큼 절실하게, 또 간절하게 기적을 바랐다.
* * *
" ... 그런 표정 하지 마십시오. 역시 그런 표정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
" 그것 참 실례되는 말이네. 내 표정이 어떻다고 그래? "
" ......님, 당신을 만나고 지금까지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저를 버티게 했고, 변하게 했으며, 저의 삶에 빛을 비추어주었다는 것. 당신과의 만남이 제게는 큰 행운이었다는 것 말입니다. 당신은 에린을 구했고, 또한 저의 작은 세계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제가 먼저 눈을 감더라도 슬퍼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
" 그런 말은 하지 마. 하지 마.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아. .....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제에.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은 ... "
" 쓸쓸하실 걸 압니다. 분명 상냥한 당신이라면 마음 아파 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
" .... 지금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
졸음이 눈을 덮는다. 조금 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갈라진 입술 사이로 터져나오는 가쁜 숨이 나의 말을 가로막는다.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이 떨고 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죽음이라는, 또 한 번의 상처를 주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잘 버텨낼 것이다. 그녀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죽으면 그 후대가, 그리고 그 자손들이 그녀를 칭송하며 그 곁을 지킬 것이다. 그녀는 혼자지만 또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역시 그녀의 옆에 머무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하다. 나이가 들어도, 시간이 흘러도 나의 마음은 수십 년 전 그 날에 머물러 있다. 내가 이 세계를 위해 옳은 일을, 바른 일을 했다면 바라건대 또 한 번 그녀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기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꼭 그 날과 같은 모습으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혜성이 몇 백, 몇 천 년에 한 번씩 지구로 되돌아오듯 결국 나의 운명의 길도 돌고 돌아 그녀에게 닿아있기를 바란다. 그리 될 것을 믿는다. 그 때에도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그럼 그 때엔 웃으면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자. 오랜만이라고. 결국 이렇게 되돌아 오고야 말았다고.
그녀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나의 배 위에 엎드려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사력을 다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술을 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의 마지막 말을 바라본다.
" 우린 또 만날 겁니다. 분명. "
* * *
내 심장이 말야, 멈출 때 쯤엔 분명 이 세상을 충분히 만끽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네 곁에서 항상 웃고 싶다고 생각해. 이 가슴의 맥박이 울리는 동안은 계속 너를 지키고 싶어. 사는 이유는 그걸로 충분해.
[BGM] 심박수 #0822 中
이것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톨비쉬한테 영업당한 작성자가 저 대사에 꽂혀서 뭔가 멋진 작품을 써보려다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송해요. 늘...글은 써놓고 죄송하죠. ㅎㅅㅎ....... 다리미 드릴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