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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의 시대
게시물ID : history_236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른미르
추천 : 1
조회수 : 96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0/09 07: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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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너무나 다채로운 인물이다.
워낙 이면이 많아 어찌보면 소쇼패스같은 면모가 있다.
정이 많고 웃음도 많고 울음도 많고 소박하고 냉혹하고 잔인하고 솔직하고 진실스럽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좋아도 안좋은 척, 싫어도 싫지 않은 척 하는 감정표현에 있어 솔직하지않고 위선적인 것이 사대부들의 태도이자 체면이었기 때문에 조조의 이러한 모습과 그의 뛰어나지않은 외모는 사대부들에겐 위엄이 없고 경박스럽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의 이러한 모습은 유협들이나 무장, 뛰어난 사대부들에겐 크게 어필했을 것이다. 사실 순욱같은 뛰어난 선비는 세속의 예의규범에 크게 집착하지않은 점이 있었다. 
조조는 자신과 잘 맞는 심복들은 곁에 두어 쓰고 군자같은 부류의 사람은 외지로 보내 통치하게 했다. 조조의 인재 용인술은 분명 탁월했다. 그러나 인재기용에 있어 대범한 경향도 있었지만 반대로 의심을 많이하기도 했다.
조조의 술지령을 보면 그의 솔직함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그가 권력을 놓지못하는 것은 분명히 이해가 가는 바이다. 당시 천하도 평정되지 못했고 또 그가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 그의 정적들에 의해 그와 일족들이 무사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했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초반 궐기했을 때의 행보는 분명 바로 충신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그런 모습은 원소, 공손찬 등은 물론 손견도 미칠 수 없었고 유비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 권력자의 야욕을 드러내어 조정을 좌지우지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협천자전략을 보면 그 뜻 자체가 천자를 낀다는 뜻인데 봉천자란 천자를 받든다는 표현이 아니었던 것을 보면 심히 무례하고 야심이 가득찼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 조조는 법령이 가혹했고 서주대학살과 원소와의 결전에서 엄청난 병력을 생매장해서 죽이기도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결국 그런 점들이 조조가 후세에 많은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유비는 모든 면에서 조조와 달랐다. 위엄과 덕이 있고 말수가 적었으며 사람들의 말을 경청했다. 인덕이 있어 아랫사람에게 베풀줄 알았고 여러 사람을 잘 따르게하는 매력이 있어 사람들에게 격의없이 대해도 그의 카리스마로 하여금 스스로 따르게하였다. 외모도 기이해서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한나라 창시자인 유방과 비슷한 점이 있다. 물론 진수는 촉나라에서 태어났기때문에 어쩌면 미화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모습은 당시 사대부들이 원하는 통치자의 모습이었다. 워낙 기반이 없었던데다 다재다능한 조조에 비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반을 잡는데 상당히 오래걸렸다. 그는 판단력이 뛰어나 상황이 불리할땐 지체없이 도망쳤고 재기하는 근성이 탁월했다. 일반인이었다면 좌절하여 하늘을 탓하거나 자진하거나 포기했겠지만 그는 결코 그러지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기용하면 믿음을 크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의 면모와 교활한 성격이기도 했다. 드러나는 성격은 진실되어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지만 그런 점으로 때로는 사람들의 신뢰를 배반하기도 하였다. 또 자신의 군사적인 무능으로인해 이릉에서 대패하여 자신이 건국한 촉나라의 국력을 크게 상실시키고 그 자신도 결국 그로 인해 쇠약해지게되어 죽음을 맞이하게된다.

관우는 당시 상류층 사대부의 위선적인 태도와는 정반대적인 인물이다. 그것은 그의 출신성분이 하층민이었던 것도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농공상 중에 제일 하급인 상인출신으로 생각되는데 거기에 더해 살인까지했던 범법자의 신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기록에 실려있지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민담이나 전설을 보면 지역토호를 죽이고 망명했다는 것이나 소금장수 신분, 녹두장수 등의 신분으로 나오는걸 보면 아무래도 이익으로 인한 마찰로 인한 살인이나 유협적 기질로 인한 복수 등으로 범죄를 저질렀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는 이익으로 쉽게 움직이는 일반적인 사대부와는 크게 달랐다. 그런 점이 권력자들을 매료시키기도 했지만 동료들과는 불화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후한말엔 소위 청류파 명사들도 이익으로 쉽게 사람을 배신하고 살인했던 위선이 기본적인 시대이기도 했는데 관우의 이런 솔직하고 감정적인 태도는 사람들을 그에게 따르게하는 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무려 동맹국의 군주인 손권에게조차 그가 속이 훤히 보이는 핑계를 대고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않자 사자의 면전에 대고 욕을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통쾌하다는 생각도 들게 해준다. 생각해보라. 요즘 시대 위정자가 독도에 대해 망언을 하는 일본 정치가에게 외교 공식석상에서 욕을 하는 모습을 말이다. 분명 서민이나 백성들은 속이 후련할 것이다. 
그러나 관우의 이런 지나치게 솔직한 모습은 동료 사대부들에게는 그다지 좋게 보이지않아 통치하는데에 있어 치명적인 단점으로 찾아왔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지만 반면에 크게 실패하게 되었다. 

손권은 수성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제대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오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은 아버지 손견이지만 사실상 창업자는 손책이었다. 그는 능력과 외모가 뛰어나고 활달하고 여러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인재기용에도 탁월했다. 그래서 원술의 신뢰를 얻어 강동으로 진격했고 결국 단시간에 토벌하여 오나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단시간에 점령한 탓인지 강동 호족들의 반발이 심했다. 손책이 단시간에 강동을 평정할 수 있었던것은 본인의 뛰어난 능력과 더불어 호족들의 연계에 의한 것이기도 했는데 자신에게 협력하지않은 호족들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바람에 그들의 살인청부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손권이 후계자가 된 것이다. 당시 정국이 몹시 불안정하여 무려 손씨의 일족조차 이탈할 지경이었는데 그것은 자칫 손권의 목숨조차도 보장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뜻이 된다. 어쩌면 손책이 손권에게 후계자를 넘긴건 자신의 직계를 지키기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손권이 능력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손권이 후계자가 되었을때 울기만 했었다는 것은 그런 점으로 눈앞이 깜깜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창업공신인 장소와 주유의 보좌, 어머니인 오씨의 지혜로운 가르침, 일족인 손씨와 오씨의 힘으로 인해 가까스로 지역을 경영할 수 있었다.
따져보면 손권만큼 하류층 인사를 등용한 사람도 드물다. 그것은 인재 기용이 그만큼 폭이 넓었다는 긍정적인 뜻이기도 하나 반대로 보면 사대부와 호족들의 반발이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외지인과 하류층 인사를 적극 기용하여 자신의 정권 기반을 강화시켰다. 당시 강동 지역은 미개발지가 많고 이민족인 산월족과 무릉만이, 도적들(나라에 세금을 내지않고 자신들의 지역을 군사력으로 자치적으로 경영했던 사람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라 실질적으로 다스릴 수 있던 지역이 지금처럼 마냥 넓었던게 아니다. 단양군, 오군, 회계군 일부와 예장군 일부 정도가 실질적인 세력권이었는데 손권은 부하들에게 병력을 주고 해당지역에 대해 위임한다. 그러면 그들은 관련 지역에 대해 군사력을 발동하여 토벌을 시작하고 토벌이 끝나면 거주하던 사람들을 병사로 뽑고 중앙조정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던 그러한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해당 지역에 대해 자치권을 갖던게 당시 오나라의 상황이었다. 그런 형편이었기에 손권은 부하들과 지역 호족들과의 연계가 필수적인 상황이었고 중앙집권적인 정부라기보단 지방연맹체에 가까웠다. 힘이 부족하여 부하들을 활용해 지방영주로 삼았지만 그런 점으로 오나라의 중앙집권화가 어려웠다. 
적벽에서 부하들이 항복을 주장해도 그들을 처단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때문이다. 공신인 장소조차도 항복을 주장했던건 그만큼 조조의 세력이 엄청났던 것과 중앙정부의 세력을 뒤에 업고 있던것과 강동 호족들의 단결이 되지않았던 점과 손씨 일족의 안위를 바랐던 것이었기때문이다. 또 장소의 출신이 서주로서 중원 명사였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벽에서 유비 연합군과 함께 조조군을 보기좋게 대패시킨 후엔 손권의 지배력이 강화되었고 강동 호족들의 단결도 시킬 수 있었다. 
후에 중원에 혁혁한 명성을 휘날린 영웅이자 명장이었던 관우를 패사시키고 육손을 임용하여 이릉에서 유비를 대패시키는 등 적국의 영웅을 모두 격파하는 성과를 이룬다. 또 중앙집권화를 위해 자신의 심복을 활용하여 호족들을 제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손권은 초창기부터 집권이 불안했던만큼 또 나름 중신이었던 장소조차 항복을 주장했을만큼 자신의 신변조차 장담할 수 없던 상황이 있었기에 의심병이 생기고 커졌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후계자 선정에 문제가 생기자 이로 인해 충신인 육손까지 죽게만들었다. 강동의 유명한 호족으로 장씨 고씨 보씨 육씨가 있었지만 육손은 분명한 손권의 충신이었다. 그는 유가사대부로서 덕치를 권장했는데 법치를 행한 손권에게는 이 점이 거슬렸다. 사실 법치란것은 황제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것이고 덕치란 것은 유가사대부들의 권한이 강해지는 것을 뜻한다. 거기에다 손권은 의심이 많아 심복들로 하여금 호족들을 지나치게 감시한 실책도 있었다. 결국 그러한 생각들과 행보들이 마찰을 빚고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육손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손권이 강화시킨 권력도 자신에 의해 약화시키게되었다. 

제갈량은 만고의 충신이자 2인자만을 고수한 재상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충신이라하면 무조건 청렴하고 재산이 없고 권력욕이 없는 신하만을 충신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는 선입견이자 편견이기때문에 틀린 생각이다. 제갈량을 흔히 그런 충신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제갈량은 권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엄청나게 노력했고 노력에 따른 보상만을 취했기때문에 그렇다 하더라도 크게 비판을 받을 일은 못된다. 
제갈량은 낭야 양도 사람으로 원래는 서주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조의 서주 대학살로 인해 정든 고향을 떠나게되고 형주로 정착하게되어 형인 제갈근과도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제갈량이 조조 정권에 출사하지않은 것은 이미 조조 정권에 인재들이 즐비했던 것도 작용했겠지만은 그보단 서주 대학살로 인한 악연이 더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것이 지금처럼 쉬운 시대가 아니다. 인구가 곧 돈이고 힘이 될 수 있었기때문에 호적으로 붙잡아두었고 법령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후한 말엔 사실상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파괴상태였던지라 군벌들이 횡행할 수 있었고 그들 또한 인구의 이주를 반기고 이탈을 막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제갈량은 형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제갈량이 형주에 정착하기까진 쉽지않았지만 형주에 정착해서는 나름의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당시 형주는 유표의 신중함 또는 소심함으로 전쟁을 많이 겪지않았기에 당시의 석학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래서 형주의 학문이 발전되고 있었던 때다. 
유표는 전쟁을 좋아하지않았기에 형주엔 평화가 있었지만 신진사대부들로서는 마냥 좋아할만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이미 형주의 관직은 다 차있던 상태였으니 이들이 임용되려면 유표가 타지역을 공략해서 관직 배분이 필요한 상태여야했다. 그러나 유표는 그러질 않으니 신진사대부들의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사대부들은 관계 출사를 하지못하면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신분의 하락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계의 진출은 이들에게 있어서 힘든 과업이자 숙원이었다. 그런 사정과 배경이 있었기에 비주류였던 조조가 평을 해주기 싫어하는 허소를 협박하고 강요하여 치세간적 난세영웅이라는 월단평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는 천거가 관계로 진출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에 사대부들의 평가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갈량은 숙부인 제갈현이 유표의 친구였고 또 제갈씨도 관계에 진출했던만큼 재산도 있었기에 형주에 안정적으로 정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유표와의 인맥으로 유력 호족인 방씨, 괴씨, 황씨, 채씨 등과 연을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갈량이 당당한 미남이었던만큼 누나들도 물론 이뻤을거라 추측한다. 그러나 워낙 타지인 형주에서 모아놨던 재산만으로 살기엔 힘들었을 것이고 거기에 제갈량은 학문도 하고 있었기에 제갈량과 제갈균은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형주 시절 제갈량의 자존감은 엄청났다. 별다른 커리어가 없던 시절 무려 관중과 악의를 자칭했는데 이는 자신이 재상으로서의 재주와 장군으로서의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홍보한 것인데 당연히 사람들은 인정하지않았다. 요즘으로 따지면 어떤 백수가 내가 세종과 충무공의 능력이 있다라고 하는 셈인데 쉽게 인정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럼에도 친구였던 최주평과 서서는 인정했던 것을 보면 그를 잘 아는 사람은 그가 상당한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정말 친한 사람에게 호평을 받는건 의외로 어렵다.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과 악의로 칭한 것은 출사하기위한 이미지메이킹 혹은 홍보수단이었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요즘같은 민주시대에도 자신을 당당하게 포장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존감이 없으면 힘든 일이다. 정확히 알긴 어렵지만 제갈량은 유력 군웅들을 여럿 두고 냉철하게 비교분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꿈을 마음껏 떨칠 수 있던 사람을. 그런 면에 있어 유비는 적격이었다. 유비가 기반이 없지만 조조와 대적해서 살아남은 영웅이었던데다 유표 사후 유비로 하여금 대체할 생각을 갖고 있던건 아닐까. 유비가 형주에 입성한 이후에 호걸과 선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유비의 명성과 역량, 또한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임관을 위해서였다. 조조와 대적하고 유표에게 조조를 공격하기로 건의했던 유비라면 그라면 분명 인재를 필요로할 것이므로. 
그런 판단으로 제갈량은 여럿 선비들과 함께 유비를 먼저 찾아간다. 그 만남에서 총명한 모습을 보여 유비에게 살짝 인상깊은 모습을 인식시킨다. 그러나 유비의 관직도 이미 만석이었을 것이니 제갈량의 그릇이 비범하다고는 생각했겠만 바로 중책을 맡길 수 있다고 판단하진 않았을 것이다. 요즘으로 봐도 제아무리 출중해도 바로 실권을 맡기기란 상당히 희박한 일 아닌가. 그러다가 나중에 서서에게 제갈량을 듣고난 후 '아~ 그 친구?' 이렇게 떠올리고선 삼고초려를 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여기서도 제갈량은 상당히 비범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중견기업 회장이 심복들 몇명과 직접 찾아오는데 상대는 용맹한 조폭 건달 출신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이런 사람이 찾아오는데 감히 집을 비우고 자빠져잘만큼 간댕이가 부은 혹은 대담한 사람은 정말로 찾기 힘들다. 
아무튼 유비에게 깊게 각인시키고 엄청나게 발탁된다. 이 부분에서 관우와 장비가 불평하는데 사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내가 중견기업에서 20년간 개고생해서 겨우 부장이 되었는데 어떤 듣보잡이 단번에 실장이 되었다면?
그 이후에 제갈량은 유비에게 존경을 받고 높이 쓰이는데 사실 공적으로는 엄청나게 예우했지만 사적으로도 엄청나게 친했다고 생각은 되지않는다. 20년의 연차에다 성격과 취미가 달랐을터인데 정말 친해질 수 있었을까. 다만 분명 능력은 있었으니 예우하고 존경은 했을테지만.
아무튼 제갈량은 유비가 조조에 의해 깨강정이 되었을때 손권과 외교하여 동맹을 맺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당시 동년배이자 군주였던 손권을 상대로 격장지계까지 이용하는 것을 보면 제갈량을 결코 원래 소심하거나 신중한 사람으론 볼 수 없다.
제갈량은 유비 생전까진 소하의 임무를 맡고 열심히 수행했다. 유비가 판단하기에 제갈량의 군략이나 모략은 방통이나 법정보다 낫다고 생각하진 않은 듯하다. 혹은 그의 그릇이 종군참모보다는 재상에 적임이라고 생각했을수도 있다. 유비는 임종 직전에 제갈량을 탁고대신으로 임명하는데 평생 그를 신임하긴 했어도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생각으로 견제책도 쓴것 같다. 그 방법이 이엄도 같이 탁고대신으로 임명한 것과 '그대가 나라를 취하시오' 드립. 애초 촉나라는 유씨였기때문에 일어설 수 있던 나라인데 제갈씨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또한 유비가 제갈량에게 그리 말함으로써 모든 이목이 제갈량에게 집중되었을테니 말이다.
제갈량의 성격이 소심하고 신중하게 바뀌게 된 것은 아무래도 관우의 양번 진격 실패에 따른 형주 상실, 유비의 이릉 대패, 그리고 본인의 1차 북벌 실패가 그 요인으로 생각된다. 모두 본인이 힘들게 복구한 경험이 있는데다 사소해복이는 오류는 결정적인 패배로 이어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뭐 원래도 알고 있었을 터이고 양홍의 진언으로도 다시한번 느꼈겠지만 그럼에도 고치지못한 것은 본인의 어깨에 실린 책임감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제갈량은 경영하는 것에 있어선 생각이 달라도 최대한 협조하고 아꼈지만 국익에 위배된다고 느끼면 가차없이 숙청했다. 촉나라의 형벌이 시행된 것을 보면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멸족, 사형이 드문데 이건 법전인 한과(촉과)를 만드는데 여러 파벌이 두루 참여했고 촉나라의 지배력이 공고하지못했으며 제갈량의 사상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반역에 가까운 발언, 상관에 대한 무례 정도면 타국 상황에선 멸족되어도 별 할말이 없는 상황이다. 후한 말엔 표정만 좋지않아도 처형하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과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다. 이는 제갈량의 인사 정책이 인품중시였던 영향도 있던것으로 보인다. 조조의 유재시거와 비교하면 확연하다. 그랬기에 어쩌면 북벌의 실패는 필연일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단점으로 보긴 어려운게 제갈량 사후로도 상당한 시간동안 국가가 무난히 흘러갔으니 말이다. 타국의 상황을 보면 권력자끼리의 투쟁으로 인한 내분으로 국력이 크게 상실되었었다. 
또 제갈량의 군략 문제도 있었는데 그는 지나치게 안정중시로 군대를 지휘했다. 1차북벌 이후로는 아마도 어쩌면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고 느껴 안정적으로 군대를 운용해서 손실을 줄이고 보존해서 후대에 넘겨주자라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소국이 대국을 상대할땐 어쩔수 없이 모험은 필수불가결한 상황이다. 거기에다 제갈량은 임기응변과 모략이 부족했던 것도 요인이 되었다.
출처 http://smh2829.blog.me/220300616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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