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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연합 취재 후기
게시물ID : sisa_1104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Ω
추천 : 12/3
조회수 : 47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1/08/01 00:09:17
누가 이들을 이렇게 과격하게 만들었나
[못다한 이야기] 어버이연합 취재 후기
허재현 한겨레 기자  |  [email protected] 
 
     
 입력 2010.03.23  11:14:00        
 
“빨리 죽어버려야 할 노인들” “돈 받고 나오는 노인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노인들만큼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극단적이고 공격적입니다. 좌파로 보이면 모두 ‘빨갱이’로 부르며 ‘처단’을 외치는 분들이니 이런 푸대접은 사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도 싸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우리 사회 구성원들과 대화라곤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어버이연합의 노인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을 이렇게 욕하고 비난하기만 해야 할까요. 두 개의 평행선은 결코 만나지 않습니다. 이 평행선에사다리를 놓아보고 싶은 마음에 어버이연합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갈등은 오해와 고집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그것을 푸는 방법은 직접 대화를 해보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기사가 ‘과격한 어르신들의 속사정’(<한겨레 21> 801호)이었습니다.

이런 비유가 적당할 지 모르겠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간 토끼같은 행동이었습니다. <한겨레> 기자가 어버이연합(서울 종로구 인의동) 사무실을 찾아간다는 건 할아버지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 이 단체 회원들이 <한겨레> 본사 앞으로 몰려와 시위까지 한 뒤였습니다. ‘무슨 봉변 당하는 것 아닌가’ 걱정됐습니다.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빨갱이 왔다며 고함치던 어르신들, ‘또 왔냐’는 인사도”

2월 어느 날.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백여명 이상의 노인들이 보였습니다. 매일 진행되는 안보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분들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제가 <한겨레>에서 나온 사람이란 것을 눈치 채자마자 대뜸 “빨갱이 왔다”며 고함을 치셨습니다.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들과 손가락질. 취재 접고 당장 철수하고 싶어지더군요. 취재를 허락한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이 나서서 어르신들을 설득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당장 쫓겨나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겨레>에 유독 예민한 것은 굳이 <한겨레>의 진보적 성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월 말 어버이연합의 과격 시위가 한창 부각되던 때, 어버이연합의 활동자금에 다소 의혹의 시선을 담은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에 어르신들은 더욱 화가나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왜곡해 다루었다’는 불만이었지요.

일단,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습니다. 어떨 때는 억지로 어르신들을 끌어안고 애교도 부렸습니다. 좀 비굴한 모습이었지만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은 분들에게 ‘이건 이랬고, 저건 저랬고’ 말씀 드려봐야 끝없는 토론만 이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르신들의 비위를 맞춰드리다가 나중에 친해진 뒤에서야 하고 싶은 얘기를 꺼내야 했습니다. 귀여운 손주처럼 행동하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제 선택은 옳았던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은 곧 마음을 푸셨습니다. “빨갱이”란 욕은 여전히 입에 달고 사셨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무서운’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한두 번 찾아 뵙고, 계속 웃으면서 인사드리자 슬슬 제게 품은 적의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점점 평범한 동네 어르신들에 가까워갔습니다. 제가 의자도 없이 수십 분 씩 안보강연을 서서 경청하자 어떤 분들은 손수 의자를 내어주시기도 했고, 점심 식사 겸 라면을 끓여 드실 때는 제 것도 마련해주시곤 했습니다. 어르신들은 점점 친절한 노인들이 되어갔습니다. 세 번째 그곳을 방문할 때부터는 어르신들이 “또 왔어” 하면서 제게 먼저 인사까지 건넬 정도가 되었습니다.

근 보름 정도, 시간이 될 때마다 어버이연합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이들과 충분히 친해지고,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 솔직한 속내를 꺼낼 때까지 민감한 질문은 꺼내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들은 제가 단체에 들러 이것 저것 묻기만 하고 기사를 안 쓰자 ‘우리 단체 염탐하러 나왔냐’고 의심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분들을 살펴보자 이 분들에 대한 편견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오랫동안 이 분들이 ‘돈 받고 귀가하는 건 아닌지’ 유심히 살펴보긴 했습니다. 때론 화장실 같은 곳에 숨어 몰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추선희 사무총장 없는 곳에서 활동 자금에 대해 물어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해보면 해 볼수록, 이들은 정말 자발적으로 어버이연합에 나오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임진각까지 쫓아가 시위하는 모습도 살펴보았지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자발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점심 한 끼 사먹을 돈 없어서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기도 했습니다.

또 이들은 제게 적극적으로 그들의 신념을 설파하셨습니다. 시간만 되면 저를 붙잡고 나라가 어떻게 위기에 빠졌는지 설명하려 하셨습니다. 때론 절박한 눈빛으로, 때론 격앙된 어조로. 자발성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지요.

그제야 조금씩 제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그런 느낌 있지요. 촛불집회에 나오는 분들 가만히 살펴보면,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나왔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나왔다는 게 자연스레 느껴지는 것 말입니다. 어버이연합의 노인들에게서도 똑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뒤를 캐며 활동자금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이들이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어버이연합에 나오는지 그 이유를 캐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애국과 반공, 그리고 빨갱이

이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 ‘애국’과 ‘반공’ 신념이었습니다. 이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고, 좌파가 성장해 ‘빨갱이’들이 득세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라를 구하려고 어버이연합에 나온다는 설명을 했습니다. 그들이 청년 시절 나라를 구했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어르신들의 공통점은 지독한 반공주의였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장단점을 학문적으로 비교해볼 기회를 박탈당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공산주의=빨갱이=김정일’이라는 등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좌파는 공산주의에 호감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 ‘북으로 보내버려야 한다’고 심심찮게 주장하셨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신념을 굳게 견지하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젊은 사람들이 이를 몰라주기 때문에 이들은 과격 시위라도 해서 뭔가 표현해야겠다고 느낀 듯 했습니다. 또 어르신들은 5-60년대 정치깡패가 횡횡하던 시절에 청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이 정도 과격 시위는 문제라고 인식도 안하는 듯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이 어르신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취재하면서 이 해답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사실 뚜렷한 해법은 없었습니다. 진중권씨를 찾아가 물어봐도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요”라는 답변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게 현실적인 대답이었습니다. 한번 굳어진 세계관은 쉽게 바뀌지 않고 이미 이분들은 평생을 왜곡된 반공주의에 찌들어 사셨으니 뭔가 바뀌길 기대하는 건 순진한 일일 것입니다.

한데 한 켠에서는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어르신들을 이렇게 욕하면서 죽기를 바라는 것만이 과연 최선인가. 그러기엔 사실 좀 찜찜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시대의 피해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불행했던 시대에 불행한 세계관을 주입 당했으니 피해자라는 것이지요. 이들이 시대의 피해자라면, 그렇다면 가해자는 누구일까. 가해자를 찾지 않고 ‘이들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가해자는 뒤에 쏙 빠진 채 우리들끼리만 서로 삿대질하면서 욕하고 싸우며 지내면 끝인가. 그게 제 고민이었습니다.

이 가해자를 찾아보는 게 이 기사의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실체가 누구인지, 어버이연합 노인들을 만나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뚜렷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국가를 가해자로 여기지도 않았고, 되레 고마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은 이들의 사무실에 보물처럼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국가입니다. 해방 이후 권력을 잡은 남한의 지배계급은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활용했고, 국민들에게 절름발이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습니다.

저는 국가가 이들 노인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봅니다. 당신들을 이렇게 만든 것에 미안하다고. 당신들을 전쟁에 내몰고, 지금까지 거리로 내몰고 있는 것에 미안하다고. 무릎 꿇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 전 이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을 이용했던 그 가해자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 지 안보입니다. 지금은 이들만 덩그러니 남아 우리 사회의 이방인처럼 손가락질만 당하고 있습니다. ‘철없는 노인들’이라고 ‘뒷  돈 받는 노인들’이라고 욕만 먹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어버이연합 노인들을 대하는 최선의 대응인지 우리 사회가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가해자에게 끝내 책임을 묻진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들에 대한 연민의 끈만큼은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피해자들끼리 서로 손가락질 하며 싸우고 있는 지 모릅니다. 정작 손가락질 당해야 할 분들은 따로 놔둔 채 말입니다.

오랜만에 어버이연합 추선희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고맙다고 하더군요. <한겨레 21> 수십 권 구입해서 할아버지들이 집에 갖고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 기사 역시 어버이연합을 꼭 좋게 그린 건 아니었는데, 다소 의외였습니다. 추 사무총장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노인들이라고 써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독한 소외감에서 나온 자기 위안이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어버이연합은 계속 거리 곳곳에서 기자들과 시민들에게 욕 하며 소동을 피울 겁니다. 물론, 우리 사회는 냉정하게 이들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급적 아픈 데 없이 편안하게 세상을 살다 가셨으면 좋겠다는 게 저의 또 다른 바람이기도 합니다. 가해자를 명확하게 찾아 고발해드리지 못한 자식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까요.

어버이연합 관련 동영상은 <한겨레 21>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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