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fajade/80017593253 에서 그대로 펌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건 역사학계의 설 입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의종군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잘못된 이야기인 경우가 많고(저 아래 누군가처럼) 저는 이 설이 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몇자 소개해보겠습니다. 먼저 이순신은 일생동안 백의종군을 두번 당했습니다. 첫번째는 녹둔도 사건 때문이죠. 이 전투가 조정에 잘못 알려지고 큰 처벌을 받을뻔한 이순신을 구한것은 드라마에서처럼 원균이 아니라 선조였습니다(이걸 보면 나중에 편집증 증세를 나타내기 전의 선조는 꽤나 통찰력 있는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가 이순신이 전투에서 패배한것은 아니라 하여 백의종군으로 감형 시켜준것이지요. 여기서 알 수 있듯, 비변사 취조보다 낮은 수준의 처벌이 백의종군입니다. 중종실록에 보면 변경의 백성이 한명이라도 납치되면 그 주장을 백의종군 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녹둔도 사건의 경우 피랍된 백성이 106명인데 `패전책임은 없으므로 처벌을 깎아서`백의종군을 시켜주었습니다. 뭔가 거꾸로 된것 같지 않으신가요? 송우혜씨의 말에 따르면 무장에게 있어 처벌은 처형-유배-파면-백의종군 이라는 것입니다. 백의종군은 말하자면 보직해임 내지는 근신의 처벌인것이죠. 심지어는 백의종군 상태에서 공무를 집행한 경우도 발견됩니다. 가령 고을 수령같은경우 백의종군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고을 일이 돌아가질 않으니 일단 흰 옷을 입었지만 임무를 수행한것이죠. 옷 색깔과 종류로 겉으로 나타내는 계급이 정해지는 조선시대에 부하들도 울긋불긋한데 혼자 흰옷 입고 있음 얼마나 쪽팔리겠습니까? 이런점을 감안한 명예형이란 말입니다. 다음은 송우혜씨가 같이 제시한 백의종군의 예 들입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일 행궁의 시위가 너무 적어 체모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궐내의 시위 장사와 의금부 관원 등을 모두 백의종군시켜 처벌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22일조). <양사가 아뢰기를, "사변이 일어난 뒤로 군율이 해이해졌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장수를 일일이 벌 주기가 어려워 매양 백의종군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미 극도로 구차해졌습니다.">(<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18일조). "군율을 위반한 변장과 수령들을… 백의종군시키는 것도 형벌을 감해주는 것인데"(<선조실록> 선조 30년 8월 15일조)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가기)를 회피한 정명해를 전례에 따라 백의종군토록…"(<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2월 1일조). "임금이 기우제 지내려고 북교(北郊)에 거둥할 때 길을 잘못 인도한 훈련대장 장붕익을 백의종군토록…"(<영조실록> 영조 1년 7월 23일조). 보시면 아시겠지만, 힘든 업무를 뺑끼치거나 길 안내 실수한 무관들에게 내려진 처벌이 백의종군입니다. 기록을 더 살펴 들어가면 이러한 백의종군형에 처해진 인물들은 곧 복직되는 경우가 많았고(이순신의 경우만 보아도) 차후의 관직생활에 페널티가 되는경우가 없었습니다. 이 경우도 이순신이 근거가 되는데, 선조는 갖은 꼬투리를 잡아 이순신을 못살게 굴었지만 `백의종군 했던놈`과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경력에 흠이 되는것이 아니기 때문일것입니다. 그리고 난중일기만 보아도, 백의종군 시절의 이순신은 군관을 몇명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들르는 고을에선 수령들의 인사를 받았고 권율이 찾아와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못 찾았는데 녹봉도 받았다고 하더군요. 정유재란 직전에 체포된 이순신에 대한 처벌은 비변사에서 이미 끝났고(하긴 모든 수군장수들이 죄인신분이긴 했구나...), 백의종군은 `너 완전히 용서한건 아니다`란 표시이며 복직(꼭 통제사가 아니더라도)전의 근신상태라고 보면 이상할까요? 제가 옳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전 이상의 이유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김탁환의 불멸에 보면 이순신은 평생 백의종군 경험이 있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며, 백의종군중인 이순신에게 옛 부하들이 반말을 까는등, 터무니 없는 모습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하여간 어딜가나 소설이랑 현실이랑 착각하는 인간들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