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렬한 반유대주의자라 유대인을 몹시 혐오하여 차별하고 유대인 문화와 책을 파괴하기를 주장했으며 그들을 감싸는 사람은 전부 지옥에 들어갈 거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루터는 처음에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고, 루터가 성경의 정경 기준으로 선택한 것도 유대교 회당의 구약성서의 범위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가톨릭을 개혁하면 유대인들을 루터파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지만, 애당초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럴 리가 있나. 결국 그 때문에 어마어마한 과격한 발언들을 쏟아낸 데에는 자기 나름대로 유대인들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토마스 뮌처 등의 시민들이 교회와 왕권의 수탈과 억압에 못 이겨 독일의 농민 봉기에 대해서 농민들의 편에 서지 않았던 탓으로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실 여기에 루터의 책임이 크다고 밖에 볼 수 없는데, 루터가 주장한 만인사제론은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로 여겨졌으나 루터는 만인사제론을 신앙적 관점으로만 언급한 것이라 하여 농민봉기에 반대했다.
물론 루터가 처음부터 농민들을 마구 죽이라고 한 건 아니다. 나름대로는 봉건 영주들과 농민들 사이를 중재해보려 했는데, 영주들에게는 수탈을 좀 줄여줄 것을 요구했고 농민들에게는 복종을 강조했지만 결국 결렬되었다. 루터가 과격한 농민봉기 진압을 역설한 데에는 농민 봉기군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불태운 사건을 듣고서는 빡쳐서부터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루터는 자신의 신분과 차별은 신이 이미 정하신 것인데 이를 어겼으므로 주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죽여서 강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글을 나라에 내서 결국 반란이 진압되고 수 만 명의 농민들이 무참히 죽었다.
루터는 성경대로 행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 나온 '권력에 복종하라'는 말씀에 충실했다고 항변할지도 모르나, 한편으로는 제후들의 보호를 받아 종교개혁을 성사시키고 있던 루터가 농민들의 편에 서게 되면 결국 영주들이 루터를 버리게 될 것이고 종교개혁이 실패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하에서 움직였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하여 당대의 인사들 중에는 루터가 사실 정치적으로는 비열한 위선자라 비난한 이들도 있다. 이런 루터의 오묘한(?) 정치론은 후에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나치에 순종한 루터파 교회의 무기력함에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다.
루터는 결정적으로
성찬식에 대한 논란에서
종래의 가톨릭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종교개혁 시기 당시 개신교의 단일화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바 있다. 종교개혁 당시
츠빙글리 등으로 대표되는 스위스 지역의 개혁세력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라 주장한 가톨릭의 주장에 대해, 그것이 그리스도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는 증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사제의 의식이 평범한 빵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주장했는데,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최후의 만찬 말씀을 들어 그들의 주장을 완전히 기각한 것.
츠빙글리 측은 어떻게든 루터와 합의를 이루어 단결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루터는 이들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에서 가톨릭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루터는 이를 기뻐했다고 한다. 성찬식에 대한 츠빙글리의 입장은
칼뱅에게 이어져 오늘날의
청교도와
루터교회의 결정적인 분리로 이어진다. 성경과 복음에 대한 입장이 동일한 츠빙글리와 루터가 바로 이 성만찬으로 인해 영원토록 틀어진 것을 보면, 루터조차도 오랜 의식에 대한 믿음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존재 자체가
병크인
마녀사냥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어느 누가 마녀혐의가 나와도 무조건 처단하고 태워야 한다고 했다.